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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55·是枝裕和)는 따뜻하고 깊이 있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입니다. 그가 천착하는 주제는 가족, 기억, 죽음, 상실, 위로 등이죠. 다큐멘터리 터치로 만드는 극영화가 그의 강점인데 최근에는 작심한 듯 철저히 스토리 위주로 진행되는 극영화를 만들고 있기도 합니다.
데뷔작 ‘환상의 빛’(1995)이 베니스영화제 황금오셀리오니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 고레에다 감독은 '디스턴스'(2001)를 시작으로 5편이 칸영화제에 초청받는 등 현재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전 세계에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른다'(2004), '걸어도 걸어도'(2008), ‘공기인형’(2009),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세번째 살인’(2017)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고레에다는 영화를 만들 때 어떤 생각을 할까요? 그가 쓴 영화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이지수 옮김, 바다출판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5가지 포인트를 짚어봤습니다.
1. 영화는 ‘나’과 ‘세계’의 접점에서 태어난다
“저는 다큐멘터리로 시작했기 때문에 작품은 결코 나의 내부에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나와 세계의 접점에서 태어난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세계와 만나기 위해 카메라를 이용하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기본이며 픽션과의 큰 차이점입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TV 프로듀서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까지 '또 하나의 교육: 이나 초등학교 봄반의 기록', '심상 스케치: 저마다의 미야자와 겐지', '그가 없는 8월이', '또 하나의 교육: 이나 초등학교 봄반의 기록' 등 사회 비판적인 시각이 돋보이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습니다.
또 영화감독이 된 이후에도 TV PD로서 경력을 버리지 않아서 그는 ‘걷는듯한 속도로: 37,319명의 오디션’(2002, NTV), ‘나의 유아 시절 타니가와 슌타로 편’(2008, NHK), ‘나쁜 것은 모두 하기모토 킨이치이다’(2010, 후지TV), ‘미래의 편지 2014: 그로부터 3년이 지났습니다’(2014, NHK) 등 틈틈이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는 TV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만들 때 차이점이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매번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작업에 임한다고요. 이는 그가 영화를 만들 때에도 리얼리티를 굉장히 중시한다는 뜻이 될 테고요. 한편으로는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 객관성보다는 어느 정도의 주관성을 강조한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제 영화가 픽션과 다큐의 경계를 부술 수 있길 바랍니다. 그 경계란 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리 공고하지 않습니다.”
고레에다 감독의 초기작에는 프로페셔널이 아닌 아마추어 배우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아무도 모른다’의 아이들이나 ‘원더풀 라이프’의 배우들이 그렇죠. 리얼리티를 강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는 ‘아무도 모른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그리고 싶었던 건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든가, 어른은 아이를 이렇게 대해야 한다든가, 아이를 둘러싼 법률을 이렇게 바꿔야 한다는 등의 비판이나 교훈, 제언이 아닙니다. 정말로 거기서 사는 듯이 아이들의 일상을 그리는 것, 그 풍경을 그들 곁에서 가만히 바라보는 것, 그들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이를 통해 그들의 말을 독백이 아닌 대화로 만드는 것, 그들 눈에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이는 것... 제가 원했던 건 이러했습니다.”
2. 직접적인 전달은 피하고 간접적으로 묘사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제가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엄청난 수의 신발이었습니다. 무엇이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과거를 선명하고 강렬한 이미지로 소생시키는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 경우에는 시계나 안경 등의 장신구 같은 물건에 엄청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직접적인 전달법 이상으로 간접적인 묘사에 끌립니다.”
고레에다 감독이 아우슈비츠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면 직접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보여주기보다는 이처럼 쌓여있는 신발을 보여줌으로써 감정에 동요를 일으키려 할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자신의 작품에서도 그렇게 합니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많은 사건이 집 안에서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식사 장면이 딱 한 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밤에 장어 요리를 먹는 장면입니다. 나머지는 먹는 장면이 아니라 요리를 준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음식을 만들고 또 설거지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대사가 식사 장면에서의 직접적인 대사보다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또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에는 장례식이 세 번이나 나오는데 이것이 지나치게 직접적인 메시지로 다가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고레에다는 네 자매들에게 타나토스와 전혀 다른 성격과 감정을 심어놓으며 균형을 맞췄습니다.
3. 삶의 풍성한 순간들의 디테일을 담는다
"만약 제 영화에 공통된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은 비일상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 속에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의미 있는 죽음보다 의미 없는 풍성한 삶을 발견하는 것. 영화가 그런 주장을 소리 높여 하는 게 아니라 영화 그 자체가 풍성한 삶의 실감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 이것이 제가 지향하는 바입니다.”
"'걸어도 걸어도'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제 나름대로 슬픔을 치유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어머니를 잃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리하다 영화로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점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질질 끌려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웃을 수 있는 영화를, 건조한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의식이 있어서 드라이한 홈드라마로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부재를 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영화를 만듭니다. 유럽의 한 영화제에 갔을 때 한 기자가 고레에다 감독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상실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고 하지만, 사실 당신이 만든 영화는 상실을 겪고 살아남은 자에 관한 이야기에요.” 고레에다는 이 말을 듣고 자신의 의도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무척 기뻤다고 하네요.
‘생명은 결여를 품고 태어나 그것을 타자로부터 채운다.’
요시노 히로시의 시 ‘생명은’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고레에다는 이 문장을 무척 좋아해서 ‘공기인형’을 만들 때 모티프로 삼았고, 그의 2015년 산문집 ‘걷는 듯 천천히’에서도 이 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문장에서 엿보이는 인간관이 그의 영화철학과 매우 잘 맞는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혼자서 스스로를 채울 수 있는 게 아니라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채워지는 존재라는 것이죠.
그가 영화 속에 풍부한 디테일을 삽입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채우기 위해서죠. ‘아무도 모른다’를 찍을 때는 아이들이 실제로 하는 생각과 말을 알아내기 위해 배우들에게 영화 줄거리를 알려주는 대신 상황만 던져주고 실제로 어떤 대화를 하는지 취재해 영화 속에 대사로 녹였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만들 땐 직업과 성향이 전혀 다른 두 아버지를 대비시키기 위해 말투 하나까지 미세하게 조정했습니다.
그 결과, 그가 택하는 소재는 굉장히 비극적인 것들입니다만, 영화는 아픔을 치유하고 어느 정도 긍정의 에너지를 불어넣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모두 디테일이 주는 힘일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촬영장에서 후쿠야마 마사하루(왼쪽)와 함께
4. ‘작가’보다는 ‘장인’에 가깝다
“맛있는 제철 생선을 어떻게 요리하면 재료가 가진 맛을 살리면서 손님도 만족할 만한 요리를 낼 수 있을지를 궁리하는 것이 장인이라면, 감독의 일은 역시 그것에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저는 오리지널 각본을 쓰기 때문에 작가라고 불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떤 재료라도 나의 프렌치 요리로 완성해 보이겠어' 같은 타입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스스로를 작가보다는 장인으로 규정합니다. 영화를 통해 나만의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는 스타일이 아니라 최상의 재료를 찾고 거기서 최상의 맛을 내는 요리사 같은 장인이 자신이 지향하는 바라고 말합니다.
그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배우들에게서 지금까지 없던 모습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아무도 모른다’를 만들 땐 지금껏 본 적 없는 신선한 이미지를 위해 아역 오디션을 열어 마에다 코키와 마에다 오시로 형제를 발굴했습니다. 또,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선 잘생긴 주연 배우 후쿠야마 마사하루로부터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매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 그를 꽤 비열한 남자로 설정하는 각본을 썼습니다.
'진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상영을 위해 한국을 찾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5. 시간은 순환하고 인물은 성장한다
“제 영화에서 시간은 직선적인 게 아니라 순환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선 처음과는 다른 곳에 착지하고 싶습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곧잘 오즈 야스지로 감독과 비교됩니다. 소시민의 일상과 가족을 소재로 한 영화를 주로 만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처음에 고레에다 감독은 해외 영화제에 나갈 때마다 오즈와 비교되는 게 부담스럽고 불편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를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있는데 스페인의 산 세바스찬 영화제에서였습니다. 한 기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 영화는 시간이 돌고 있다. 직선적인 게 아니라 한 바퀴 돈 다음 조금 다른 곳에 착지한다. 그 점이 오즈의 영화와 닮았다."
고레에다 감독은 곰곰이 생각해본 뒤 이것이 일본인의 사계절에 대한 감각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 스페인 기자에게 반문했다고 합니다. "여기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순환한다는 감각은 없습니까?" 그랬더니 그 기자는 "없다. 시간은 직선적으로 흘러가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는군요.
모든 일본 감독 혹은 비슷한 동양 문화권의 감독들이 고레에다 감독처럼 순환하는 시간을 가진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면, 이는 일본인의 감각이라기보다는 일본인 중 한 명인 고레에다 감독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하는 편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주로 상실 이후 살아남은 자를 주인공으로 삼기 때문에 이들이 어떻게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기적으로 불리든, 치유로 불리든,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작은 희망이 샘솟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고레에다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인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화가 처음 시작했던 자리로 돌아와야 하고, 거기에서 인물은 한뼘 더 훌쩍 자라 있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에게 ‘성장’은 결코 눈에 보이는 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죄를 뉘우치거나, 갑자기 고백을 남발하거나, 죽은 반려견이 살아 돌아오는 것 같은 화려한 불꽃놀이가 아닙니다. 섬세하고 작은 변화, 사소한 용기, 우연한 행동 같은 것들이 그에겐 기적이고 성장입니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엔딩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들이 바라던 극적인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만 소소하게 ‘작은 기적들’이 벌어집니다. 소극적이던 한 아이가 가장 먼저 앞으로 뛰어나가는 식이지요. 실제 고레에다 감독은 이 영화를 구상할 때 '기적이 이루어지기를 빌러 가지만 결국 빌지 않고 돌아오는 이야기'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빌지 않고 돌아와서 결국 성장하는 이야기로 만들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줄거리를 본 관계자가 "부모가 각자 아이들이 없어진 것을 깨닫고 신칸센으로 구마모토까지 쫓아가서 가족 넷이서 다시 잘해 보자며 얼싸안고 끝나면 감동적이지 않을까요?"라고 역제안을 합니다. 애초 이 영화가 새로 개통한 신칸센의 홍보용으로 기획되었기에 만약 이 제안을 고레에다 감독이 받아들였다면 영화는 전형적인 드라마가 강조된 광고 영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은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건 기적도 아니고 성장도 아니야.” 그래서 그는 더더욱 그것과 정반대의 세계를 그렸습니다. 결국 영화는 걸작으로 남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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