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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은 고대 일본. 쿠보는 애꾸눈의 소년으로 바위산 꼭대기 동굴에서 몸이 아픈 엄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쿠보의 특기는 세 줄 현악기로 마법을 연주하며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현을 튕기면 종이가 이야기 속 캐릭터가 되어 움직입니다.


그러나 엄마는 할아버지 달 왕(Moon King)과 저승사자 쌍둥이 자매를 피해 이곳에 숨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쌍둥이 자매가 마을을 공격하자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쿠보 역시 엄마를 잃고 쓰러집니다.


쿠보는 마법에 의해 생명을 얻은 원숭이의 돌봄을 받고 깨어납니다. 종이 캐릭터인 한조는 쿠보와 원숭이에게 마을이 처한 위기를 막으려면 아빠의 갑옷을 찾아야 한다고 제시합니다. 가는 길에 스스로를 사무라이라고 생각하는 풍뎅이를 만나게 되고 넷은 머나먼 모험을 떠납니다.



<쿠보와 전설의 악기>의 앞부분 줄거리입니다. 어떤 영화일지 느낌이 오시나요? 전혀 모르겠다고요? 그럴 수밖에요.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믿기 힘든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퀄리티 높은 이미지와 상상력 가득한 환상의 세계가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비주얼과 이야기 완성도를 모두 갖춘 3D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저도 뒤늦게 보게 된 것이 억울할 정도로 멋진 작품입니다.



도대체 어떤 회사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찾아봤더니 라이카(Laika)라는 회사입니다.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 공동창업자인 필 나이트가 2002년에 재정난에 허덕이던 윌 빈튼 스튜디오를 인수한 뒤 <크리스마스의 악몽>의 헨리 셀릭 감독을 고문으로 영입해 2005년에 세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제작사입니다. 영화, CF, 뮤직비디오 등을 주로 만듭니다.


라이카에서 지금까지 4편의 영화를 제작했는데 헨리 셀릭 감독의 <코렐라인: 비밀의 문>(2009), 유령을 보는 소년 이야기 <파라노만>(2012), 박스를 입은 인간과 몬스터의 모험담 <박스트롤>(2014), 그리고 <쿠보와 전설의 악기>(2016)입니다. <쿠보와 전설의 악기>는 필 나이트의 아들이자 이 회사의 대표인 트래비스 나이트의 감독 데뷔작입니다.



<쿠보와 전설의 악기>가 놀라운 점은 일단 비주얼입니다. 정말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극강의 세밀한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원숭이, 풍뎅이 뿐만 아니라 거대한 해골 인간까지 모두 실제로 만들어서 조금씩 움직여 촬영했습니다. 믿지 못하는 관객을 위해서인지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엔 제작과정을 살짝 보여주기도 합니다.


가장 멋진 장면은 쿠보가 현악기를 연주할 때 종이가 날아다니는 장면입니다. 작은 움직임까지 섬세하게 담아 눈을 뗄 수 없습니다. 또 일본 전통문화에서 가져온 연등과 사무라이검, 우키요에 판화 속 파도를 비롯해 바닷속 거대한 눈, 변신하는 낙엽 등도 매혹적입니다.



비주얼이 강한 영화들은 이야기가 약한 경우가 많습니다만 이 영화는 스토리도 흥미진진합니다. 영화 자체가 '이야기의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널리 구전으로 전파되어 온 이야기가 실제로 벌어지고 그것이 또다시 구전의 시작이 되는 식의 구성입니다.


쿠보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좋아하지만 해가 지기 전에 집에 가야 하기 때문에 한 번도 이야기의 결말을 말해본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이야기의 끝을 궁금해 하겠죠? 영화는 이렇게 이야기의 끝에 대한 호기심을 잔뜩 부풀린 뒤 결말을 향해 갑니다.


원숭이와 풍뎅이가 쿠보의 호위무사가 되는 것도 재치있고 나중에 이들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도 재미있습니다. 원숭이가 말을 해서인지 고대 일본은 마치 <혹성탈출>의 지구를 닮았네요. 드라마 <도깨비>처럼 저승사자가 등장하고 과거와 현재의 인연을 뒤늦게 알게 되는 에피소드도 있는데요. 이런 스토리는 이 영화가 일본 구전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우리가 흔히 보는 디즈니, 드림웍스, 일루미네이션 혹은 2D 일본 애니메이션과는 전혀 다른, 오리지널리티가 강한 작품이면서도 전계층에 폭넓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전세계 흥행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아마도 소재가 낯설기 때문이지 않나 싶네요. 하지만 선입견을 깨고 보면 충분히 즐겁고 환상적인 102분을 경험할 수 있을 겁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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