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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프랑스 파리, 에펠탑이 쌍둥이 타워처럼 나란히 서 있습니다. 두 타워의 사이에는 케이블카 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케이블카는 증기기관으로 달립니다. 파리에서 베를린까지 82시간이 걸린다는 안내방송이 나옵니다.


센느강 인근에는 대관람차가 보입니다. 톱니바퀴가 돌아갈 때마다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움직입니다. 석유가 아니라 석탄을 에너지원으로 하는 자동차는 뒤가 아니라 위를 향해 희뿌연 매연을 내뿜으며 달립니다. 파리지엥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다닙니다. 증기기관과 석탄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인해 공기가 심하게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구가 늘면서 석탄이 부족해지자 프랑스제국은 캐나다의 자원을 놓고 미국과 전쟁을 벌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 독특한 과거는 프랑스 애니메이션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에 등장하는 세계입니다. 영화는 보불전쟁이라 불리는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가상의 역사를 배경으로 합니다. 실제 역사에서 독재자 나폴레옹 3세는 이 전쟁의 패배로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고 프랑스는 대통령제를 채택해 제3공화국을 열어가는데요. 이 애니메이션에선 불사의 약을 개발하려던 나폴레옹 3세가 갑자기 죽어 전쟁이 벌어지지 않고 나폴레옹 4세가 왕위 계승해 제국의 시대가 계속됩니다.


그로부터 70여년이 지난 1941년 프랑스는 나폴레옹 5세가 지배하는 가상의 독재국가입니다. 19세기 후반부터 60년간 아인슈타인, 페르미 등 전세계 과학자들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면서 과학의 발전은 증기기관과 석탄의 사용에 멈춰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시하며 사용하고 있는 내연기관, 가솔린, 석유 정제, 전기, 전자 같은 기술은 발명되지 않았습니다. 자동차, 기차 등은 증기기관으로만 움직이고, 모든 기계는 톱니바퀴로만 굴러갑니다.



이처럼 이상한 세상을 상상한 영화가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가 처음은 아닙니다. 세상이 증기기관으로만 움직인다는 설정은 사실 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작품을 호칭하는 장르까지 생겼습니다. 그 장르의 이름은 바로 ‘스팀펑크’입니다. 지금부터 스팀펑크에 대해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대체역사와 SF의 서브장르 '스팀펑크'


스팀펑크는 ‘Steam(증기)’과 ‘Punk’의 합성어입니다. 예사롭지 않은 이 두 단어의 조합에서 보듯 스팀펑크는 두 장르의 서브장르입니다.


하나는 'SF'입니다. ‘Punk’는 SF의 서브장르인 사이버펑크에서 가져온 단어로 사이버펑크가 사이버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면 스팀펑크는 사이버를 증기기관으로 대체합니다.


또 하나는 ‘대체역사’입니다. 실제 일어난 역사가 아닌 가상의 역사를 그린 장르 중 스팀펑크는 증기기관이 에너지의 중심이 된 가상의 세계를 상상합니다. 인류는 내연기관, 전기, 전자, 사이버기술 등을 만들어내며 이미 증기기관을 역사 속으로 밀어냈지만 스팀펑크는 이 모든 것이 발명되지 않았다고 가정하거나 혹은 발명되기 전의 세상을 그립니다.


H.G. 웰스 원작, 조지 팔 감독, 로드 테일러 주연 <타임머신>(1960)


스팀펑크의 원조 작가는 쥘 베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H. G. 웰스 등입니다. [셜록 홈즈] 시리즈, [타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드라큐라 백작] 등도 스팀펑크로 분류됩니다.


그러나 이들이 ‘스팀펑크’라는 용어 아래 묶인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입니다. 이 용어는 미국의 과학소설가 K. W. 지터가 처음 만들었는데요. 그는 1970년대부터 H. G. 웰스의 [타임머신]를 롤모델로 삼고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 여러 편을 남겼습니다. 그는 1987년 ‘사이버펑크’가 과학소설계를 휩쓸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가 새로운 유행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네. 그런 시대를 배경으로 한 팀 파워스, 제임스 블레이록, 그리고 나의 작품들에게 공통적인 명칭을 부여할 수 있다면, 아마 그것은 ‘스팀펑크’ 정도가 되겠지.”


K. W. 지터


사이버펑크와 스팀펑크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세상을 보는 시선'입니다. 사이버펑크는 대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 주를 이룹니다. 미래는 어둡고,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통제된 사회입니다. 네트워크에 갇힌 개인은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외로워 하고, 신체나 영혼이 변형되기도 합니다.


사이버펑크 대표작 <블레이드러너>(1982)


하지만 스팀펑크는 다릅니다. 증기기관은 18세기에 발명돼 19세기 빅토리아 시대(1837~1901)에 주로 사용됐습니다. 이 시대에는 ‘벨 에포크’, 즉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불릴 정도로 평화로웠던 시기가 포함돼 있습니다. 대놓고 유토피아는 아니지만 과거에 대한 아련한 향수, 서구문명 전성기에 대한 그리움 등이 녹아 있는 것이 스팀펑크의 특징입니다. ‘펑크’라는 단어가 들어 있긴 하지만 ‘펑크’의 특징인 반항, 냉소, 적개심 등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문학에서 시작된 스팀펑크는 다양한 장르로 퍼져 나갔습니다. 만화, 영화, 음악, 게임, 회화, 조형, 디자인, 공예, 패션, 타이포그래피, 보석 세공, 건축 등으로 영역을 확장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스팀펑크 작품들은 내용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를 그린 작품, 묵시록 이후를 보여주는 작품, 대체세계를 보여주는 작품 등입니다. 이 분류에 따라 소설과 영화,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나눠봤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배경


카렐 제만 감독 <쥘 베른의 놀라운 세상>(1958)

H. G. 웰스 [타임머신](1895) / 조지 팔 감독 <타임머신>(1960)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천공의 성 라퓨타>(1986)

윌리엄 깁슨, 브루스 스털링 [다른 엔진](1990)

배리 소넨펠드 감독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1999)

월트 디즈니社 <아틀란티스>(2001)

스티븐 노링턴 감독 <젠틀맨 리그>(2003)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 <스팀보이>(2004)

필립 풀먼 [황금 나침반](1995) / 크리스 웨이츠 감독 <황금나침반>(2007)

가이 리치 감독 <셜록 홈즈>(2009)

스코트 웨스터펠드 [리바이어던](2009)

폴 앤더슨 감독 <삼총사 3D>(2011)

마틴 스콜세지 감독 <휴고>(2011)



미래 묵시록


메리 셸리 [라스트 맨](1826)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미래소년 코난>(1978)

야마가 히로유키 감독 <왕립우주군 - 오네아미스의 날개>(1987)

가이낙스社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1990)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붉은 돼지>(1992)

S.M.스털링 [페쇼워 랜서](2002)

포커스社 <나인(9)>(2009)

봉준호 감독 <설국열차>(2013)



대범한 가상역사


이마가와 야스히로 감독 <자이언트 로보>(1991)

장 피에르 주네, 마크 카로 감독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1995)

월트 디즈니社 <보물성>(2002)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헬보이 2: 골든 아미>(2008)

크리스티앙 데마르, 프랭크 에킨시 감독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2015)




이처럼 스팀펑크 작품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또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요?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를 중심으로 스팀펑크의 특징을 2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스팀펑크의 매력 포인트


첫째, 인간을 위로하는 따뜻한 디스토피아


미래는 밝거나 어둡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예술가들은 어두운 미래에 더 경도됩니다. 밝은 미래에선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나오기 쉽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먼저 자리잡은 사이버펑크의 세계는 시종일관 어두운 경우가 많습니다. 분위기도 차갑고 사람들은 외롭습니다. 스팀펑크는 꼭 그래야 하냐고 되묻습니다. 그래서 같은 디스토피아라고 하더라도 좀더 밝고 따뜻하게 표현하려 합니다.


미국의 스팀펑크 아티스트인 아트 도노반은 스팀펑크의 인기 비결에 대해 "청결하고 현대적이며 기술적으로 살균된 문화 속에 사는 우리의 불안을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한 적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SF영화에서 보는 디자인은 블랙 앤 화이트 색상의,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애플 스타일의 매끄러운 우주선입니다. 이런 디자인은 세련되긴 하지만 인간적으로 보이지는 않죠. 말붙이기 힘든 새침한 완벽주의자 같은 느낌이랄까요.


<미래소년 코난>


이에 반해 스팀펑크는 비슷한 디스토피아의 회색을 배경으로 하더라도 그 속에 사는 사람들 만큼은 인간적으로 그립니다. <미래소년 코난>을 떠올려 보세요. 세상은 뭔가 불길하지만 어쨌든 하늘은 푸르고 그 위에 고철로 이어 붙인 우주선과 증기를 뿜는 비행선이 떠다닙니다. 이 기계들은 매끄럽다기보다는 투박합니다. 그래서 인간적입니다. 그 속에서 코난은 용기를 갖고 이것저것 해냅니다.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의 파리는 마치 테마파크처럼 보입니다. 대관람차가 운항하고 에펠탑엔 케이블카가 있고, 하늘엔 커다란 기구가 떠 있고, 센느강엔 집이 잠수하며 돌아다닙니다. 공기는 오염됐어도 결코 어둡지만은 않은 세계입니다. 아브릴 역시 포기하지 않고 부모를 찾아 떠납니다. 이런 디스토피아라면 무작정 배척하지 않고 한 번쯤 살아볼 만도 하지 않나요?



둘째, 무분별하게 커져가는 과학의 힘에 경종


빅토리아 시대는 1차 산업혁명이 끝나고 2차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전입니다. 1차 산업혁명의 성과는 증기기관, 석탄, 방적기술, 공장 분업화 등이고, 2차 산업혁명은 전기, 광학, 화학 등의 발명으로 이어지죠.


이 시기의 사람들은 세상이 갑자기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 인류는 수천년 간 농업시대를 살고 있었지요. 노동력의 결과물을 저장할 수 없었고, 노동력의 크기를 도구를 이용해 증폭시킬 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더 빠르게, 더 많이 세상은 변해갔습니다. 인구가 급증하고, 도시화가 진행되고, 노동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노동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도 늘어나고, 사상과 문화가 발전하고, 정치적으로는 유럽대륙의 식민지 경쟁이 절정에 치닫고, 대규모 전쟁은 점점 줄어들던 시기가 바로 이 때입니다. 즉, 과학의 순기능과 부작용이 한눈에 들여다보이면서도 희망이 꿈틀대던 시기였죠.



21세기인 지금은 2차 산업혁명을 넘어 3차 산업혁명인 정보화혁명, 최근에는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4차 산업혁명까지 거론되고 있는데요. 과학기술은 더 날렵하게 발전해왔지만 한편으로는 무분별한 경쟁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더 많은 인간을 파괴하고,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키고, 심지어 전쟁 위기를 촉발하기도 하니까요. 또 복제인간은 인간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하면서 수많은 논란을 키우고 있고요.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인류가 자멸하고 새로운 종이 인간을 대체할 거라는 전망까지 나옵니다.


이런 시점에 스팀펑크는 19세기를 돌아봅니다. 현대 과학기술과 에너지원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증기기관과 석탄이 희망을 상징하던 시대를 다시 상정합니다. 그 시대는 기계의 모습이 디자인 속으로 숨지 않고, 기술이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던 시대입니다. 스팀펑크는 그 시절로 돌아가거나 혹은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그럼으로써 지금 우리 시대 과학기술의 위험성에 대해 경종을 울립니다.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에는 말하는 고양이와 영생을 주는 신약이 등장합니다. 둘다 요즘 구현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과학기술과 닮았습니다. 말하는 고양이는 인공지능, 불사의 신약은 바이오 기술을 상징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또, 지하세계에선 도마뱀이 인간보다 뛰어난 과학문명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곳은 지상의 인간세계보다 훨씬 밝고 선명한 색감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도마뱀이 지능을 갖게 된 것은 과학자들의 단순한 실수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도 깨닫지 못한 작은 실수가 70년 후 도마뱀이 인간을 지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 것이죠. 이는 현재 인간이 연구하고 있는 인공지능이 머지않아 도마뱀처럼 희한한 생명체로 진화할 수도 있다는 경고의 의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처럼 스팀펑크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전혀 동떨어진 세상을 그리는 장르가 아닙니다. 가상의 역사로 멀리 가버린 것 같지만 사실 지금 이곳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장르입니다. 과거로 돌아가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돌아보게 하는 반성의 힘을 가진 장르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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