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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이 시대 가장 위대한 혁신가. 차고에서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어 새 시대를 연 창조자. 자기가 만든 회사에서 쫓겨났지만 드라마틱하게 돌아와 세상을 바꾼 영웅. 우리가 쇼핑하고 음악 듣고 영화 보고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을 바꾼 게임체인저.


하지만 영화는 잡스의 이런 모습에는 관심이 없다. 영화 <스티브 잡스>는 무대 위의 잡스가 아닌 무대 뒤의 잡스에 주목한다. 우리는 스크린에서 위대한 다 빈치가 아닌 남의 말 듣지 않는 고집불통의 사내, 친구의 부탁을 끝까지 거절하는 냉혈한, 딸의 존재를 부정하고 상처 주는 아빠, 딸의 엄마에게 양육비 지급을 거부하는 전 남자친구, 사소한 이유로 이미지 시안을 36번이나 퇴짜 놓으며 직원 괴롭히는 보스를 보게 된다.



현실왜곡장에 갇힌 돈키호테


잡스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컴퓨터를 만들 때처럼 타협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윽박질렀고, 상대가 읍소하면 뛰어난 두뇌로 반박했다. 그는 감히 그에게 대드는 사람을 가차없이 비판하면서도 자신에게 대드는 사람만 신뢰했다.


영화의 원작이 된 월터 아이작슨의 전기 [스티브 잡스]에는 맹렬한 추진력으로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는 잡스의 열정을 ‘현실왜곡장’이라는 단어로 묘사하는 부분이 한 챕터에 걸쳐 나온다. 돈키호테가 자신이 믿는 세계에 확신을 갖고 사람들을 설득하듯 잡스 역시 마술과 같은 신비로운 설득력으로 자신의 현실감각을 상대방이 믿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영화는 현실왜곡장에 갇힌 잡스를 보여준다. 그는 대중을 속여 더 나은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 다른 사람의 공을 인정하기를 싫어했고 모든 것을 자신이 관장해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완벽하게 통제된 시스템을 만들고 싶어했다. 영화는 마치 싸이코드라마처럼 잡스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원작을 각색해 시나리오를 쓴 아론 소킨은 오스카 각색상을 수상한 영화 <소셜 네트워크>에서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를 남의 아이디어 가로챈 외톨이로 묘사한 적 있다. 그는 이번엔 모두가 칭송하는 스티브 잡스를 난도질했다. 그런데 그 칼솜씨가 놀랍다. 무려 197페이지에 달하는 시나리오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많은 대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대사들은 액션 영화의 기관총처럼 부딪치고 깨지고 다시 뭉쳐 긴박한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기관총처럼 부딪치는 수많은 대사들


아론 소킨은 시나리오를 3막의 연극 대본처럼 썼다. 보통 위대한 인물을 다룬 전기영화들은 그 인물의 무게감 때문에 주요 업적을 나열하느라 긴장감을 놓치는 실수를 범하곤 하는데 그는 잡스의 다른 업적은 모두 버리고 1984년, 1988년, 1998년 그가 새 컴퓨터를 공개하는 세 번의 프레젠테이션에만 집중했다. 역사적인 프레젠테이션이 이루어지기 전 40분을 세 번 보여주는 게 아론 소킨이 선택한 전략이다. 이 순간 속에 그는 인간 잡스의 굴곡진 삶을 압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연출을 맡은 대니 보일 감독은 자칫 단조로운 연극처럼 보일 수 있었던 이 영화를 긴박감 가득한 스릴러로 만들어냈다. 그는 과감한 클로즈업으로 관객이 인물에 몰입하게 하고 의식의 흐름에 따라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다층적인 스토리의 리듬을 조절했다. 잡스 역을 맡은 마이클 파스벤더는 비록 외모는 잡스와 닮지 않았지만 손짓과 표정은 영락없는 잡스다. 2013년 애쉬튼 커처가 주연한 조슈아 마이클 스턴 감독의 영화 <잡스>가 유아틱한 영웅 칭송으로 잡스를 어떻게 욕먹였는지를 떠올려보면 비슷한 소재로 영화의 완성도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3개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비슷한 공간에서 비슷한 인물들이 잡스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이 과정은 마치 인생이라는 우주에서 잡스라는 항성 주위를 여러 행성들이 맴도는 것과 같다. 그중 마케팅 책임자이자 잡스의 오피스 와이프인 조안나 호프만(케이트 윈슬렛)은 가장 가까운 궤도를 돌면서 잡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는 절대적인 존재다. 그녀가 없었다면 잡스는 아마도 현실에서 더 멀어진 돈키호테에 머물렀을 지도 모른다. 딸 리사(펄라 하니 자딘)는 역설적으로 잡스를 성장시킨 존재다. 초보 아빠 잡스에게 리사는 골칫거리에서 뮤즈로 변신한다.


또 차고에서 애플 컴퓨터를 만든 동업자이자 친구 스티브 워즈니악(세스 로건)은 컴퓨터 설계 방식에 대한 의견 차이로 갈라선 애증 관계이고, 펩시에서 영입한 CEO이자 잡스를 쫓아낸 장본인 존 스컬리(제프 대니얼스)는 의외로 역사적 평가를 두려워하는 소심남이다. 이밖에 전여자친구 크리산 브래넌(캐서린 워터스턴), 매킨토시 개발자 앤디 허츠펠드(마이클 스털버그), 1984년부터 잡스를 취재한 GQ 기자 조엘 포르즈하이머(존 오티즈) 등이 잡스 주위를 계속해서 맴돌며 밀도 높은 이야기를 쌓아간다.



미친 사람이 결국 세상을 바꾼다


물론 이 영화가 보여주는 스티브 잡스의 모습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 그의 인성은 이후 많이 너그러워졌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아는 위대한 잡스가 있기까지 그에겐 자신의 욕망에 갇혀 스스로 투쟁하던 시절이 있었다. 완벽한 컴퓨터를 만들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파괴자. 심지어 그것이 딸이나 친한 친구라도 부수적이라고 여기는 사회부적응자. "미친 사람이 결국 세상을 바꾸고 간결함이 모든 것"이라는 그의 철학은 이런 과정 속에서 나왔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스티브 잡스와 애플 컴퓨터, 그리고 잡스의 주변인들을 잘 알고 있다는 가정 하에 시작하지만 후반부에선 해당 인물과 잡스 사이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을 회상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이 분야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이해하는데 큰 무리는 없다. 오히려 인간 관계에 서툴렀던 한 완벽주의자의 내면을 그린 드라마로 감상하려면 실존인물이라는 선입견 없이 보는 편이 더 낫다. 다만 마지막 장면에서 잡스가 딸과 무리한 화해를 시도한 나머지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이 살짝 깨진다는 점은 아쉽다.



영화는 컴퓨터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예언한 아서 C 클라크의 옛날 흑백 화면으로 시작한다. 이후 컴퓨터가 점점 업그레이드 되어가는 14년의 시간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는 기술적인 부분에서 독특한 시도를 했다. 1984년 매킨토시를 발표하는 1막은 16mm 필름, 1988년 넥스트에서 블랙큐브를 선보이는 2막은 35mm 필름, 1998년 아이맥을 출시하는 3막은 디지털 알렉사 카메라로 촬영해 기술 발전을 화면의 질감으로 느끼게끔 한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진행될수록 더 선명해지고 또렷해지는 잡스를 볼 수 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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