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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다 보면 매주 보게 되는 익숙한 얼굴들이 있다. 나는 그들을 바로 알아볼 수 있고, 아마 그들도 내 얼굴을 알아볼 것이다. 하지만 진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들에게 보일까?” (16쪽)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장치 중 '믿을 수 없는 주인공'이라는 트릭이 있습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독자는 소설(혹은 영화)의 화자를 따라가게 마련인데, 만약 주인공이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독자들은 뭐가 진실인지 알지 못하는 긴장 속에 이야기의 실체에 다가가지 못하고 헤맬 것입니다.


여기서 믿을 수 없는 사람이란, 어린 아이, 범죄자, 정신이상자, 거짓말쟁이 등입니다. 이들은 사건의 실체를 잘 모르거나 혹은 자신의 방식으로 왜곡하기 때문에 답답하고 불안해진 독자들은 화자를 벗어나 더 객관적인 정보, 더 많은 정보를 찾아 헤매게 됩니다.


화자가 알려주는 정보와 실제 사건과의 괴리감이 클수록 서스펜스는 배가 됩니다. "쯧쯧, 아직도 자신의 운명을 모르고 있다니." 이런 반응을 이끌어내며 동정심을 유발합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서스펜스는 감정적인 프로세스"라서 독자(혹은 관객)가 알고 있는 정보를 주인공만 모를 때 감정이 극대화된다고 했습니다. 예측의 불확실성, 놀라움과 불안이 아드레날린을 양산한다는 것이죠.


영국인 작가 폴라 호킨스의 소설 [걸 온 더 트레인]은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처럼 미스터리한 사건을 믿을 수 없는 화자를 통해 전달하는 소설입니다. 경제위기로 몰락한 중산층 가정에서 누구도 믿지 못하는 가운데 반전을 거듭하는 것이 최신 소설의 트렌드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다만, [걸 온 더 트레인]이 차별화되는 지점은 히치콕적인 서스펜스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400페이지가 넘는 꽤 두꺼운 책이지만 단숨에 읽을 수 있습니다. 레이첼이라는 여자를 중심으로 그녀가 목격한 실종사건의 실체를 파헤쳐 가는 구성인데 초반부엔 화자인 레이첼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읽게 되지만 나중엔 점점 주인공을 의심하며 도대체 범인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듭니다.


단, 히치콕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히치콕은 주관적 시점을 오직 한 사람에게만 사용했지만, 이 소설은 레이첼, 메간, 애나 등 세 여자의 주관적 시점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시간 혹은 같은 시간에 일어난 세 사람의 이야기를 동시에 읽음으로써 독자는 레이첼에게 부족하거나 의심스러웠던 정보의 상당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걸 온 더 트레인]은 지난 1월 출간된 이래 '6초마다 팔린 책'으로 알려질만큼 잘 팔린 책입니다. 19주동안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올랐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판권을 구입해 에밀리 블런트 주연으로 영화화가 계획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소설을 읽고 느낀 뚜렷한 장점을 몇 가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1. 단문으로 읽기 쉽다.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 문장이다. 전개가 빠르다.


2. 사건을 서술할 때뿐만 아니라 인물의 감정묘사도 구체적이어서 이해가 쉽다. 주인공의 비참함, 창피함, 공포 등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3. 수수께끼의 금발여성, <이창>의 훔쳐보는 사람, 열차 위의 이방인 등 히치콕적 소재가 쓰였다.


4. 관음증을 자극한다. 독자는 레이첼을 통해 한 가정을 엿본다. 멀리서볼 땐 아름다워 보였던 커플에 현미경을 들이대니 그곳에 공포가 있더라는 설정은 흔하긴 하지만 언제나 흥미로운 주제다.


5. 여성의 이야기다. 사건을 해결하는 주체도 여성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은 대상일 뿐이다. 여성이 느끼는 심리를 엿보는 재미가 있다.


6. 끊임없이 궁금하게 만든다. 주인공마저 범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만큼 구성이 치밀하고 전개가 설득력 있다.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점도 보입니다. 예컨대, 문장이 빠른만큼 깊이감은 약합니다. 다 읽고 나서도 밑줄 친 문장이 거의 없었습니다. 또 현재형 문장과 과거형 문장을 혼합해서 써서 일관성이 없습니다. 레이첼의 중심에서 이야기를 보지 않고 톰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재구성해보면, 그가 왜 수동적으로 머물러 있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급한 단점은 이 소설의 놀라운 흡입력을 생각하면 용서되는 수준입니다. 빠르고 강렬한 소설 한 권을 원한다면 당장 [걸 온 더 트레인]을 집어들기를 추천합니다. 누군가 서평에서 언급한대로, 앞으로 기차를 탈 때 창문 밖에 보이는 집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일 것 같습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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