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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석 PD가 KBS에서 tvN으로 옮긴 뒤 한동안 TV에서 볼 수 없던 때가 있었다. 사람들은 쉽게 수근거렸다. “옮기더니 아무 것도 못하고 있네.” “케이블인데 별 수 있겠어?” “결국 원 히트 원더야.”


그로부터 3년 후인 지난 5월 26일 나PD는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무대에 섰다. 청룡영화상 시상식의 조연출을 맡아 우왕좌왕하던 KBS 입사 초기처럼 무대 뒤에 선 것이 아니라 방송부문 대상 수상자로 무대 위에 우뚝 섰다. 백상예술대상 51년 역사상 PD가 대상을 수상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마디로 세상이 바뀌었다. 지난 3년 동안 케이블TV와 종편은 지상파를 위협할 정도로 덩치가 커졌고 그만큼 지상파의 영향력은 줄었다. TV도 모바일로 보는 시대에 방송 전체의 파이가 줄어드는 와중에 생긴 지각변동이다. <미생>, <응답하라> 시리즈, <삼시세끼>, <꽃보다 할배>, <비정상회담> <냉장고를 부탁해> 같은 케이블TV와 종편의 드라마와 예능은 어느새 보지 않으면 대화에 낄 수 없을 정도로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


그 변화의 맨앞줄에서 깃발을 들고 뛰는 사람이 바로 나영석 PD다. 본인은 선도하는 체질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세상에는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버리는 일들이 있다.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PD는 방송이라는 시청률 전쟁터에서 케이블TV와 지상파가 치르는 전투의 최전선에 놓였다. 그가 대상을 받은 것은 케이블TV의 영향력이 그만큼 막강해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동안 움츠러든 것처럼 보였던 나PD가 3년만에 대한민국 예능을 선도하게 된 비결은 뭘까? 지난주 새 시즌을 시작한 <삼시세끼 - 정선편>을 보면 그 비밀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최근 2년 동안 <꽃보다 할배>와 <삼시세끼>를 통해 매주 금요일 저녁은 나영석표 예능이 방송되는 시간대로 자리잡았다. <삼시세끼 - 어촌편>은 시청률 14%로 케이블TV 사상 최고 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했다. KBS는 이런 상승세를 저지하기 위해 ‘어벤져스’급 화려한 캐스팅을 한 드라마 <프로듀사>를 이 시간대에 편성하며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했다. 그야말로 지상파와 케이블TV 대표주자 간의 한 판 대결이었다.


첫 방송의 결과는 한쪽의 KO 승을 기다리던 호사가들의 기대가 무색하게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대결 만큼이나 맥빠지는 시청률 10% 대 8%의 무승부였다. 이 시간대 시청률이 나오지 않아 고전하던 지상파로선 무난하게 출발한 셈이고, <삼시세끼>로선 나영석 예능에 대한 시청자들의 믿음이 굳건함을 확인한 셈이다.


케이블TV로는 꽤 높은 8%대의 꾸준한 시청률로 알 수 있는 것은 나PD의 두터운 팬층이다. 다른 프로그램의 스타 출연자가 부럽지 않을 만큼 충성심도 높다. 금요일 저녁 TV를 켜는 시청자들은 그것이 할아버지와 유럽으로 떠나는 여행이든, 강원도에서 밥을 해먹는 생활이든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소위 ‘나영석 월드’에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다.


나PD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삼시세끼 정선편’ 첫 방송이 나간 뒤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시청자들에 대한 믿음이 있다. 전작에서 이어져오는 스토리가 있으니까 그에 맞게 이야기를 구성했다.” 그날 첫 방송의 도입부는 마치 동물 다큐처럼 염소와 닭만을 보여줬다. 만일 다른 예능이었어도 동물 이야기가 이처럼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영석 월드’에선 가능하다. 일상의 모든 게 예능이 된다.


“겨우내 염소 잭슨이 새끼를 낳았다. 처음 보는 시청자들에게 잭슨은 그저 염소일 뿐이겠지만 전작을 보아온 시청자들에게 잭슨은 <삼시세끼>의 식구다. 이서진과의 로맨스를 포함해 인물들과의 관계가 잭슨이라는 캐릭터에 이미 존재한다. 잭슨이 첫 등장했다면 쌍둥이 새끼를 낳는 게 방송거리가 되지 않았겠지만 이미 잭슨은 단순한 염소는 아니었다. 그래서 ‘삼시세끼 월드’에선 그것이 이벤트가 됐다.”


나PD는 ‘삼시세끼 월드’라는 말을 썼다. <삼시세끼>의 시즌이 반복되면서 그것이 하나의 세계가 됐다는 말일 거다. 이는 필자가 '나영석 월드'라고 부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나영석 월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호스트든 게스트든 꾸미지 않은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데 대부분 착하고 모나지 않아 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화기애애하게 잘 어우러진다. 이에 시청자들은 쉽게 동질감을 느낀다. 즐겁게 놀고 있는 무리에 끼어들고 싶은 것과 같은 심리다. 그러나 실제로는 끼어들 수 없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시청자들과 같은 편에서 대리만족의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덕분에 캐릭터들은 일관성을 얻었다. 할배의 짐꾼이던 이서진이 다음주 농촌에서 밥을 해먹어도 시청자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서진은 '나영석 월드'에서 원래 그런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영석 월드’가 다른 예능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캐릭터가 튀지 않으니 나영석 월드에선 나PD 본인이 스타가 될 수밖에 없다. 캐릭터들의 행동을 끌어내기 위해 화면 속에 계속 등장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캐릭터의 일관성과 설정의 힘으로 나영석 월드는 확장된다. 속편이 만들어지고, 배경과 주인공이 달라진 스핀오프가 탄생한다. 이는 <어벤져스>처럼 캐릭터가 하나의 독립된 영화로 탄생하는 할리우드 프랜차이즈 전략과는 다르다.


앞으로 '나영석 월드'는 어디까지 넓어질까? 나영석 월드는 본인이 의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 정도의 팬덤은 결코 전략으로 만들 수 없다. 제작진과 시청자가 오랫동안 함께 소통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나영석 월드의 확장은 제작진의 의지와 시청자의 반응에 달려 있다. 둘 사이의 '케미'를 계속 지켜볼 일이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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