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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진을 한 달 앞둔 강남경찰서 최창식 반장(손현주)은 회식 후 택시를 탔다가 납치당한다. 택시기사로 위장한 청부살해업자는 산 속에 차를 세운 뒤 흉기로 위협하지만 최반장은 격투 끝에 택시기사를 죽이고 만다. 경찰에 신고하려던 최반장은 그날 낮 경찰서장과의 대화를 떠올린다. “사고치지 말고 한 달만 참으면 우리 세상이다.”


결국 그는 살인현장에서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도망친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다. 최반장은 다음날 출근했다가 깜짝 놀란다. 누군가 자신이 죽인 그 시체를 강남경찰서 앞 고층건물의 크레인에 매달아 전시해둔 것. 이제 이 사건은 엽기적인 범행이 되어 전국민의 관심사로 떠오른다.


14일 개봉한 <악의 연대기>의 초반 줄거리다. 영화는 이후 범인을 쫓는 형사들과 겉으로는 이들을 지휘하지만 뒤로는 진짜 범인을 쫓는 최반장을 통해 긴장감을 조성하며 롤러코스터를 탄다.


영화는 범행을 저지른 경찰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끝까지 간다> <추격자> 등을 떠오르게 한다. 마침 장원석 프로듀서 등 <끝까지 간다>의 제작진이 영화에 참여했고 영화는 이를 홍보수단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몇년 새 <더 테러 라이브> <끝까지 간다> 등 웰메이드 스릴러의 등장으로 관객의 눈높이는 꽤 높아졌다. 이런 영화들에 비하면 <악의 연대기>의 완성도는 아쉽다. 비난받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정교하지 못해 관객을 충분히 설득해내지 못한다.



<악의 연대기>는 <쉬리>(1999)에 각색으로 참여한 뒤 지하철 스릴러 <튜브>(2003)로 데뷔한 백운학 감독이 12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끝까지 간다>로 김성훈 감독이 8년 만에 재기한 것처럼 그 역시 12년 만에 복귀했다. 그 과정에서 감독과 제작자 장원석 대표, 배우 손현주가 모두 중앙대 연극영화과 출신이라 개봉 전 동창회 영화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백운학 감독은 권토중래를 노리는 창작자들이 일반적으로 저지르는 실수를 똑같이 되풀이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과유불급’이다. 조급한 마음에 이것저것 집어넣으려다 결국 중심 선로에서 이탈한 것이다.


<끝까지 간다>와 <더 테러 라이브>가 웰메이드 영화로 성공한 비결은 한눈 팔지 않고 한길로 내달렸다는 것이다. 속도감을 유지하면서 짜임새 있는 각본으로 관객들의 심장을 조여들게 했다. 하지만 <악의 연대기>는 직진해야 할 길에서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그래서 속도가 나지 않자 후반부에선 안절부절한다. ‘연대기’라는 이름의 그럴 듯한 서사를 만들었지만 설득이 되지 않아 장황해졌고, 장애인에 동성애 코드까지 집어넣는 욕심에 중심 서사의 초점이 흐려졌으며, 마지막 장면에선 반전이라는 명목 하에 관객의 뒤통수를 치려 했지만 복선이 정교하지 못했다.


한때 반전 서사는 영화 흥행의 주요 무기였다. 반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반전의 강도가 세질수록 관객들은 오히려 ‘반전 피로증’을 호소해왔다. 그래서 최근 영화들은 반전이라는 커브볼보다는 서스펜스라는 직구로 정면승부하고 그게 더 잘 먹힌다. 할리우드의 스토리 컨설턴트 리사 크론은 “반전이라는 장치가 효과적이려면 그 반전을 통해 앞의 이야기들이 더욱 더 그럴듯해져야 한다”고 했다. 되돌아봤을 때 앞에서 보여줬던 것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와야 성공적인 반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악의 연대기>의 반전은 극적 재미를 위한 반전 이상의 의미를 주지는 못한다. 진짜 이야기가 아니라 가짜 이야기를 본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만족할 관객이 얼마나 될까.


영화를 보고 나면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강남경찰서 앞 건물의 크레인에 대롱대롱 시신이 매달려 있는 장면이다. 지금까지 어떤 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영상이고 더구나 그곳이 강남이라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상징성을 단 1분의 이미지로만 소비할 뿐 이후 서사에 전혀 활용하지 못한다.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데도 기존의 답답한 반전 스릴러에 머문 것이다.



그나마 <악의 연대기>를 봐야할 이유는 배우들의 연기에서 찾을 수 있다. 모두 남자들만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손현주, 마동석, 최다니엘, 박서준의 연기는 영화를 끌고가는 힘이다. 기존의 이미지를 자기복제한 손현주와 마동석보다는 용의자 김진규 역의 최다니엘과 막내 형사 차동재 역의 박서준이 돋보인다. 그동안 로맨틱코미디와 스릴러에서 선악을 오가는 연기를 해왔던 최다니엘은 이 영화에선 퇴폐적인 이미지로 연기 변신을 했는데 분량이 적은 것이 아쉬울 정도로 매력적이다. 박서준은 꽃미남 스타로만 알았는데 하얀 도화지 같은 얼굴에 다양한 색깔을 담을 수 있는 연기력까지 갖췄다는 것을 증명했다. 훗날 <악의 연대기>가 남긴 최고 수확으로 박서준이 거론되지 않을까 싶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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