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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영화는 이런 자막으로 끝난다. 그 아래 다소 장황해보이는 문구는 사족처럼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망치지는 않는다. 자막 한두 줄로 망치기엔 영화가 매우 거룩하다.


개인적으로 1979년작 <매드맥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스토리는 없고 겁탈과 질주와 복수만 있는 단순한 영화에 그리 끌리지 않았다. ‘남들은 좋다는데 나는 별로인’ 그런 영화의 시초가 <매드맥스>였다. 2,3편은 당연히 보지 않았다.


그래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제작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더구나 감독이 70세의 조지 밀러라니. 얼마나 새로운 게 나올까 싶었다.


개봉 후 여기저기서 찬사가 쏟아졌다. 미친 영화라는 표현이 미사여구가 아니라 칭찬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칭찬 릴레이에는 관객들 뿐만 아니라 평론가들과 영화인들까지 가세했다. 액션 하나만큼은 엄지 척! 이라며 세 번 봤다는 평론가도 있었다.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나도 극장을 찾았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의 반응을 리액션 비디오처럼 묘사해보면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영화 초반부엔 “이 정도 가지고 호들갑은...” 하며 시큰둥했다. 맥스가 노예처럼 나올 땐 “저러다가 쇠사슬 풀고 영웅으로 등극하겠지” 라고 생각했다.


중반부엔 슬슬 졸음이 쏟아졌다. (영화를 본 시간은 마침 한낮이었다.) 맥스가 퓨리오사와 여자들을 만나는 장면에서 잠깐 정신이 들었다가 그들이 한 팀이 되고난 뒤 함께 도망갈 땐 잠을 못이기고 살짝 졸았다. 다행히 스토리를 이해하는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후반부엔 액션이 미쳤다는 것에 완벽하게 동의했다. 중반부까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영화는 후반부가 진짜다. 졸음이 확 달아난 장면은 맥스가 퓨리오사 일행을 앞질러 가더니 사막에서 세울 때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쪽으로 160일 동안 가봐야 별 거 없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서 임모탄을 치자. 거기가 약속의 땅이야.” 본격적인 복수의 서사가 시작되는 지점인데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집중하고 영화를 봤다. (마침 잠에서 깨니 상쾌했다.) 이후 1시간 가량은 지금껏 본 적 없는, 손에 땀을 쥐게하는 고공액션의 연속이었다. 마치 서커스처럼 그들은 질주하는 자동차 위를 날아다니면서 때리고 찌르고 잡아당기고 밀었다. 연출과 편집의 리듬도 경쾌해서 손에 땀을 쥐면서 봤다.


영화는 톰 하디가 연기한 맥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 그는 보이지 않는 영웅(unsung hero)이다. 진짜 주인공은 퓨리오사다.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했다. 남아공 출신의, 개인적으로 나와 생일이 같은 이 여자는 한 마디로 멋지다. 두 마디로 정말 멋지다. 세 마디로 정말 완벽한 여전사다.



어릴때 임모탄에게 납치됐지만 계속해서 탈출을 시도해온 퓨리오사는 이번엔 임모탄의 씨받이 여성 다섯 명과 함께 8기통 전투트럭을 몰고 도망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도망치는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소수정예로 임모탄의 허를 찌르며 반격한다.


물론 지금까지 할리우드 영화에서 여전사는 많았다. <에일리언>의 시고니 위버, <터미네이터>의 린다 해밀튼, <지아이제인>의 데미 무어, <툼 레이더>의 안젤리나 졸리, <킬빌>의 우마 써먼, <레지던트 이블>의 밀라 요보비치, <언더월드>의 케이트 베킨세일, <캣 우먼>의 할 베리, <엘렉트라>의 제니퍼 가너 등 꽤 다양했고, 안젤리나 졸리처럼 여러 영화에서 여전사를 연기한 특출난 여배우도 있었다. 그러나 <매드 맥스>의 샤를리즈 테론은 더 특별해 보인다. 그녀는 단순한 여전사에 머무는 게 아니라 임모탄으로 대변되는 독재자를 무너뜨리고 인류의 희망으로 등극한다.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젠 할머니가 되어버린 다른 여전사들과 함께 싸워 쟁취한다.


게다가 남자 주인공인 맥스마저 그녀에게 동조한다. 남자 주인공이 해결사로 나서고 그 위에 숟가락 하나 더 얹어 이뤄내는 승리가 아니라 퓨리오사 스스로 몸으로 부딪히고 칼에 찔린 상태에서도 일어나 싸워 얻어낸 승리다. 그녀는 팀원들 누구 하나 포기하지 않고 위기의 순간에 먼저 행동한다. 아쉬운 점은 영화 초반 임모탄의 폭정에 굶주린 민중이 퓨리오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받던 영웅이 귀향해 폭군을 제압한다는 고대 영웅서사를 여성을 주인공으로 완벽하게 재현했다.



황홀한 액션 장면 뒤에 숨겨진 이 영화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현실이 더러워 피한다고 해서 더러운 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오히려 더 시궁창이 된다. 또 희망을 찾아 도망간다고 멀리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희망은 지금 우리 현실 속에 숨어 있다. 맞서 싸워 꺼내야 한다. 무식하고 질투심 많고 호전적인 남자들은 자격이 없다. 동정심 많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여자들이 희망이다. 스스로 힘을 길러 불합리한 세상을 뒤엎어야 한다.


확실히 70세의 조지 밀러가 만든 영화의 세계관은 그가 36년 전, 그러니까 그가 34세 때 만든 영화의 세계관과는 다르다. 더 묵직하고 더 파괴력이 있다. 1979년작 <매드맥스>가 질주의 본능에 못이긴 젊은 감독의 치기어린 데뷔작이었다면 2015년작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그 질주가 왜 희망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강력한 핵펀치다.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다섯 여인들은 누구?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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