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임권택 감독 앞엔 늘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지만 정작 그의 최근작을 본 관객은 적다. 다들 <만다라>나 <서편제> 같은 그의 대표작을 알고 있지만 <천년학>이나 <달빛 길어올리기> 같은 작품은 알지 못 한다. 그런데 솔직해지자. <천년학>이나 <달빛 길어올리기>가 잊혀져서 아쉽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두 영화는 한국적인 소재라서 가치 있는 콘텐츠지만 거장의 솜씨는 아니다.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영화 <화장>도 마찬가지다. 김훈 작가의 2004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동명의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겼는데 원작의 느낌을 잘 살리지 못 했다. 소설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소재로 통찰을 준다. 한 문장을 읽어도 그 속에 두 얼굴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영화는 이를 고루하게 해석했다. 임권택 특유의 ‘직접적인 보여주기’로 인해 원작을 뛰어넘지 못 했다.


물론 영화는 소설과 달리 영화만의 영역이 있다. 활자를 영상으로 옮긴다는 것은 애초에 시간을 포기하는 일이다. 무슨 말이냐면, 활자를 볼 땐 정지된 사진처럼 독자가 능동적으로 멈춰서 생각할 시간이 충분하게 주어지지만, 영상은 계속해서 흘러가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영화는 소설보다 스토리 자체의 힘이 훨씬 더 중요한 장르다. [화장]처럼 사색적인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임 감독의 성공작들은 대부분 스토리를 쌓아가는 방식의 영화였다. 그는 이 영화에서도 친절하게 모든 것을 드러내려 한다. 영화는 전립선 비대증을 말로 설명해주고, 비아그라 케이스를 직접 보여주며, 오정석(안성기)이 상상하는 추은주(김규리)의 나신을 기어이 뽀샤시한 화면에 드러낸다. 이처럼 다 보여주는 게 미덕일 때도 있지만 <화장>은 그렇게 만들어서는 안되는 영화였다. 결국 상상의 여지를 줄여 관객을 프레임 속에 가두어버리기 때문이다.


영화는 또 피의 상징인 붉은 색 포도주와 날 것의 상징인 횟집을 주요 소품과 장소로 쓰고 있는데 이런 전형적인 기호성은 캐릭터에 감정이입해 여운을 느끼고 싶은 관객을 계속 방해한다. 이미 중의적으로 해석 가능한 ‘화장(化粧/火葬)’이라는 단어에 삶과 죽음이라는 기호가 충분히 녹아 있는 마당에 영화가 차용한 지나친 기호들은 오히려 영화를 가난하게 보이게 만든다. 차라리 포도주 대신 추은주의 화장을 좀 더 구체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시각화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 <화장>의 각본은 의사 출신 영화감독 송윤희가 썼고, 각색은 <방가? 방가!>의 육상효 감독이 맡았다. 의사 출신 감독이 쓴 각본답게 영화 속에는 김호정의 투병 과정이 제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 영화는 투병 과정이 중요한 영화는 아니다. 죽어가는 부인과 파릇한 젊은 여직원 사이에서 고뇌하는 중년 남자의 심정이 더 부각되어야 하는 영화다. 육상효는 뛰어난 시나리오 작가임에 틀림없지만 그의 장기는 기발한 캐릭터에서 재치 있는 웃음과 페이소스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화장>은 이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있는 영화다. 이처럼 핀트가 맞지 않는 작가들이 쓴 시나리오가 이미 명문으로 소문난 원작을 뛰어넘을 수 있기는 애초 무리였는지 모른다.



임권택 감독은 과거에도 문학 작품을 영화로 만든 적이 많았다. 그는 100편이 넘는 자신의 영화들 중 절반은 영화사에서 시키는대로 만든 액션, 에로 영화들이라며 쓰레기라고 불렀는데 그가 스스로 평가하는 자신의 영화는 선우휘 원작의 <깃발 없는 기수>, 심훈의 <상록수>, 이문열의 <안개마을>, 한승원의 <아제아제 바라아제>, 이청준의 <서편제>,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 주로 문예영화들이다.


<화장>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바라봐야 한다. 그는 최근 영화들에 대한 좋지 않은 평가를 의식해 그의 장기인 문예영화로 돌아왔다. 심지어 마지막 장면에서 안성기가 슬리퍼를 신고 방황하는 장면은 임 감독의 대표작 <만다라>에서 안성기가 고무신을 신고 만행에 나서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화장>의 만듦새는 낡았고, 노장의 지혜는 빛나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서 오히려 김훈이 11년 전 쓴 문장이 얼마나 정갈했는지만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