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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제임스 극장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봅시다. 개인적으로 브로드웨이 44번가에 있는 이 극장에서 공연을 본 적 있습니다. 그때 팜플렛을 통해 이 극장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됐는데 다시 찾아보니 1927년, 무려 88년 전에 세워진 극장입니다. 아브라함 엘란저, 슈베르트 극단, 윌리암 맥나이트 등 주인이 여러 번 바뀐 뒤 현재는 맥나이트의 딸이 운영하고 있는데 [오클라호마] [왕과 나] [시크릿 가든] [프로듀서] [헤어] [브로드웨이로 날아간 총알] 등 이 극장을 거쳐간 쇼의 면면도 화려합니다. 책자에는 1710석 규모라고 나와 있는데 흠, 그 정도로 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아무튼 꽤 유서가 깊은 곳이고 뉴욕의 자부심 같은 곳입니다. 이곳에서 생애 첫 연극을 올리려는 한물간 할리우드 배우가 이 영화의 주인공입니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2013년 4~5월 사이 한 달 동안 극장을 빌려 <버드맨>을 촬영했습니다. 영화 속에는 극장 내부, 옥상, 백스테이지, 프리뷰, 오프닝 공연 등 극장이 배경의 95% 이상을 차지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영화는 러닝타임 119분 중 거의 110분 가량을 원테이크로 촬영했습니다. 원테이크! 카메라가 끊기지 않고 계속 이곳저곳을 돌아다닙니다. (물론 모든 걸 한 번에 찍은 것은 아니고 나중에 원테이크처럼 보이도록 이어붙였습니다만) 이걸 해낸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돌아다니기만 한다면야 쉽죠. 하지만 그 동선에 맞춰 이야기가 진행되고 갈등 상황이 발생하고 인물들의 감정이 고조됩니다. 세상에 카메라 아직도 안 끊겼어, 처음엔 이렇게 놀라지만 나중엔 카메라에 맞춰 인물을 따라가게 됩니다. 사실 이런 느낌이 원커트 영화의 단점일 수도 있는데요. 카메라에 신경쓰느라 정작 이야기에 집중하는 시간을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지만 영화의 묵직한 주제의식이 이런 트릭을 어느정도 덮어줍니다.



<버드맨>의 줄거리는 1992년까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버드맨> 1,2,3편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스타가 이후 히트작을 내지 못하고 잊혀졌는데 나이 60이 되어서 브로드웨이 연극으로 재기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아, 물론 버드맨은 배트맨의 메타포이고 마이클 키튼 외에 이 역할을 맡을 배우는 없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초능력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곳곳에 암시되는 그 능력은 그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힘입니다. 예술가들에게 자신이 훌륭한 작품을 하고 있다는 자기 최면이 없다면 그는 그저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사로잡힌 애송이일 뿐이겠죠.


연극을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배우들과의 갈등, 경제적 궁핍, 평론가들의 편견, 가족과의 불화 등 그가 상대해야 할 적들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첫 장면부터 팬티 바람으로 등장한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은 후반부에도 팬티 차림으로 타임스스퀘어를 활보하며 그동안 슈퍼히어로로서 갖고 있던 이미지를 모두 버리고 '먹고사니즘'의 고통에 찌든 남자를 보여주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화면에 가득 잡힌 그의 얼굴엔 주름살과 지친 모습이 역력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팬티 차림의 모습이 SNS로 공유되며 홍보효과를 발휘해 그의 연극이 매진된다는 것입니다. 실력이 아니라 한 번의 누드쇼가 성공으로 가는 티켓이었다는 이 지독한 아이러니!


리건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을 각색해 무대에 올리려 합니다. 레이먼드 카버는 도시인의 일상 속에서 삶의 정수를 찾아내는 단편을 써왔죠. 어쩌면 왕년의 슈퍼히어로와 레이먼드 카버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결합입니다만 그 부조화 속에서, 부딪히고 짜증 섞인 준비과정 속에서 영화는 예술이란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할리우드를 비하하고 브로드웨이를 진정한 예술가들의 무대라고 언급하는 대사가 리건과 평론가 디킨슨의 대화에 등장하는데 아마도 미국인들은 그런 비슷한 생각을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가끔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라 연기력을 검증받으려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겠죠.


영화는 재기를 노리는 한 중년 남자의 분투기라는 점에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려는 중년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우디 앨런과는 또다른 방식으로) 젠 척하는 영화의 분위기는 어떤 이들에겐 거슬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건 이냐리투 감독 특유의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죠. <21그램> <바벨> <비우티풀> 등 그의 작품들은 대중적인 소재를 철학적인 경지로 끌어올리려는 야심 가득한 기획이었습니다. 여기에 스타일과 연기력 등 어느 한 가지도 놓지 않고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왔습니다. <버드맨>은 한 발 더 나아갔습니다. 에드워드 노튼, 나오미 와츠, 엠마 스톤 등 최고 배우들의 고갈되지 않는 연기는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믿기지 않는 기술적 완성도까지 갖췄습니다. 단,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할리우드의 자아비판과 그것마저도 소재로 써먹는 영화가 조금은 낯간지럽게 느껴진다는 점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에게 <버드맨>은 충분히 가슴 속에 오래 간직할 영화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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