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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영화를 봤을 뿐인데 보고 나서 한 달은 늙어버린 듯한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행위는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수동적인 행위인데 어떤 영화는 감정이 격해지고 아드레날린이 치솟아 러닝타임이 흐르는 내내 능동적인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제겐 최양일 감독의 <피와 뼈>가 그런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지켜보기 힘들어 나중엔 극중 기타노 다케시 만큼이나 늙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또 한국에선 김기덕 감독의 <섬>을 볼 때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주로 주인공의 감정이 과잉돼 지나치게 폭력적일 때 그 주인공을 지켜보는 것이 심하게 괴롭습니다. 나가시마 테츠야 감독의 <갈증> 역시 바로 그런 종류의 영화입니다.


"어떤 시대가 혼란스러워 보이는 건 보고 있는 자의 정신이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 장 콕토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장 콕토의 말은 앞으로 그리게 될 장면들에 대한 일종의 면죄부입니다. 정신이 혼란스러운 전직 형사 아키카주가 등장하고 이 남자가 실종된 딸을 추적합니다. 그러나 딸의 과거를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남자는 그녀가 온갖 악의 근원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딸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남자는 울부짖습니다. 그러면서 더욱 폭력적이 되어 갑니다. 그동안 일본영화의 주인공들은 대개 악인이어도 소심한 성격의 지능범인 경우가 많았는데 <갈증>의 주인공은 보기 드물게 강렬하고 거친 남자입니다. 이런 역할을 안성기에 비교되는 일본의 국민배우 야쿠쇼 코지가 맡았으니 그 충격은 몇 배 더 강렬합니다.



"사랑해"

"죽여버리겠어"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딸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의 비밀은 후반부에 풀립니다. 딸 카나코는 겉보기에 아름다운 여중생입니다. 수지를 닮은 고마츠 나나가 연기했는데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로 남자들을 설레게 만듭니다. 영화는 그녀에게서 삶의 희망을 찾은 왕따 남학생의 시점으로 카나코를 대상화합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라며 그녀를 숭배하는 남학생의 시점에서 햇살 같은 외모가 강조되느라 정작 그녀의 심리는 영화 속에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대신 카나코의 친구가 증언하는 이런 멘트가 반복됩니다.


"걘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상대가 가장 원하는 말을 해서 맘을 사로잡지만... 잔혹하고, 모든 걸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카나코는 자신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비유합니다. 자꾸만 끝없는 구멍 속으로 추락중이라는 겁니다. 사랑하던 남자친구 오가타가 살해당한 후 그의 복수를 하기 위해 친구들을 마약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고, 변태남들에게 원조교제를 주선합니다. 또 그녀에게 순정을 바친 남자들은 야쿠자를 끌어들여 피로 물들입니다. 한마디로 그녀는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악마였고 아버지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추잡한 악인이자 딸에겐 조금의 관심도 없는 남자였습니다.


<갈증>은 후카마치 아키오의 동명의 소설을 <불량소녀 모모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고백> 등 미장센과 감각적 영상의 영화를 만들어온 나가시마 테츠야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보통 아이디어가 기발하거나 도입부가 강렬한 영화들은 끝까지 밀고나가는 힘이 약해 후반부로 가면서 용두사미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나가시마 테츠야는 그런 면에서 배짱이 두둑합니다. <갈증>은 눈밭에서 시작해 눈밭으로 끝나는데 아버지와 딸의 넘지 말아야 할 선에 관한 스릴러라는 점에서 일본판 <올드보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영화의 전개는 하드보일드 만화를 닮았습니다. 주인공 전직 형사는 추락한 탐정으로 그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남자입니다. 중간중간 <씬시티>처럼 만화를 연상케하는 장면들을 일부러 집어넣었고 또 미국 올드팝을 배경음악으로 깔아 폭력적인 장면도 경쾌하고 리드미컬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빠른 커팅으로 넘어가는 장면들은 만화에서 속도감을 내느라 칸을 분절시키는 기법을 연상케 합니다. 이처럼 하드보일드 만화를 닮은 구성을 택한 이유는 이 영화의 목표가 현대 일본의 세대간 소통 단절이 마치 하드보일드의 세계처럼 냉혹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세계를 구하기는커녕 자신의 가정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스스로 악의 근원이 되어 버립니다. 그는 어디엔가 딸이 살아 있을 거라고 믿으며 실종되기 전 관심도 없던 딸을 찾아 헤맵니다. 이 과정에서 영화 제목인 '갈증'은 아버지라는 악마에서 딸이라는 악마로 유전된 세대간 소통에 대한 갈증일 것입니다.


나가시마 테츠야는 소노 시온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신선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입니다. 그의 영화엔 개인과 사회, 윤리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소노 시온과 달리 과작으로 장면마다 정교하게 세공된 화면을 구성하는데 그의 명성 덕분인지 <갈증>의 캐스팅도 화려합니다. 신인 오디션으로 선발된 카나코 역의 고마츠 나나가 신데렐라처럼 데뷔했고, <지옥이 뭐가 나빠>의 히로인 나카이도 후미가 카나코의 친구로 출연합니다. 또 오다기리 조, <동경가족>의 츠마부키 사토시, <전차남>의 나카타미 미키,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의 하시모토 아이 등 일본 유명 배우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습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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