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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MI5와 MI6 소속 첩보원 출신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 추리소설의 대가에 오른 존 르 카레는 냉전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존 르 카레라는 이름에는 아주 오래 전 사람이라는 뉘앙스가 남아 있지만 사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이 일찍 저 세상으로 간 뒤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현역 작가입니다. <모스트 원티드 맨>은 존 르 카레가 2008년에 발표한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스마일리의 사람들] 등 르 카레가 1960~70년대 냉전 시대에 쓴 소설은 진짜 스파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르 카레의 주인공들은 이안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처럼 천하무적이 아니고 톰 클랜시의 잭 라이언처럼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서류에 파묻혀 있거나 시종일관 기다리거나 혹은 아무도 믿지 못하는 직업병 때문에 가정에서도 버림받습니다. 그들은 서로 의심하거나 혹은 조직에 배신당합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체제의 비극이 만들어낸 희생양을 다루고 있는 아주 차가운 소설이 바로 르 카레가 그리는 첩보의 세계입니다.


냉전 시대가 끝나서인지 르 카레의 소설도 조금 바뀌었습니다. 건조한 분위기는 그대로입니다만 동유럽과 서유럽의 이분법적 첩보전에서 벗어나 이슬람과 체첸 테러리스트가 등장하는 현대 사회를 그립니다. 그 과정에서 첩보원인 주인공은 또다시 누구를 믿어야 할 지 모르는 혼돈에 빠집니다.



<모스트 원티드 맨>에서 모두가 쫓고 있던 그 남자는 러시아인 갱두목 아버지와 체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무슬림 청년 이사(그리고리 도브리긴)입니다. 그는 러시아에서 고문 당하고 터키에서 수감된 뒤 독일로 넘어와 함부르크에서 불법 체류하고 있습니다. 함부르크는 독일에서도 특히 불법체류자들이 몰려 사는 지역인데 독일 경찰은 새벽에 함부르크 기차역에 잠입해 불법체류자들을 청소해버린다고 합니다.


이사를 쫓고 있는 네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독일 정보부 소속 비밀조직을 운영하는 군터(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입니다. 마치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 헌트처럼 소수정예 팀을 꾸리고 있는 그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이사에게 뭔가 있음을 직감하고 그의 주변 사람들을 추적합니다. 두 번째는 인권단체 소속 변호사 애너벨(레이첼 맥아담스)입니다. 판사의 딸이기도 한 그녀는 자신의 신념대로 사는 강한 여자입니다. 그녀는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이사를 도우려 합니다. 세 번째는 독일 내무부 소속 요원으로 그는 군터와 이사를 동시에 감시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는 미국 CIA 요원 마사(로빈 라이트)입니다. CIA는 군터와 거래를 하며 그를 돕는 척하다가 마지막에 그를 배신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사, 군터와 애너벨 사이에서 이사가 상속받은 막대한 자금을 관리하고 있는 은행가 토미(윌렘 데포)가 있습니다. 윌렘 데포의 인상 때문인지 더 주목하게 되는데 사실 이 배역은 일종의 맥거핀입니다.



영화는 르 카레의 소설 만큼이나 건조한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보신 분이라면 어떤 느낌인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안톤 코르빈 감독은 본래 뮤직 비디오에서 U2, R.E.M, 너바나 등과 작업하며 업적을 남긴 감독인데 이 영화에서는 화려하지 않고 차분하게 인물 간의 관계를 묘사하면서 긴장감을 쌓아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싶어하는 군터에 비해 독일 당국과 미국의 첩보기관은 테러리스트를 잡아들이지 않고 교화하겠다는 군터의 발상을 이상주의자의 메타포라며 비난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세계를 안전한 곳으로 만들겠다는 군터의 이상이 실현되기에 국가와 조직간 이해관계는 너무나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습니다.


차분하게 캐릭터를 만들고 흩어진 스토리를 꿰맞춰 가던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테러리스트의 자금줄을 놓고 뜻밖의 반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반전이라는 것이 결국엔 과잉진압, 인권탄압으로 더 위험해진 현대사회의 보이지 않는 첩보전을 상징하는 것이어서 허탈함을 남깁니다. 올해 83세인 르 카레는 이 영화에 원작자이자 투자자로 참여했습니다. 그가 그린 여성 캐릭터인 애너벨과 마사 캐릭터는 고리타분하게 느껴지지만, 전체적인 플롯이나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엔딩은 왜 그가 여전히 최고의 작가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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