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영화 중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를 꼽으라면 <도쿄 트라이브>다. 이 기묘한 영화의 장르를 굳이 말하자면 랩 배틀-야쿠자-힙합-SF-마샬 아츠-액션-뮤지컬. 응? 도대체 그게 뭐냐고? 미래 도쿄를 배경으로 다섯 구역을 지배하는 야쿠자들이 힙합 비트에 맞춰 랩 배틀을 벌이는데 막상 이야기는 이들이 아니라 이들을 뒤에서 교묘히 지배하는 잔혹한 부파 패밀리과 신분을 위장하고 도쿄로 온 악의 제사장의 딸 순미가 야쿠자를 규합하는 과정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성 희화화, 여성 상품화, 정치인 몰살, 격식 파괴, 등장인물이 거의 다 죽어버리는 대학살 등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는데 팔짱 끼고 심각하게 보면 절대 안되고 마음을 무장해제하고 감각적인 화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경쾌하고 발랄한 템포에 어깨를 들썩이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선 사무라이 검을 든 부파의 아들과 야쿠자 대표 사이에 <스트리트 파이터> 같은 한판 대결이 벌어지는데 그 이유가 다름아닌 사우나에서 우연히 본 성기 크기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이다. 두목 아들은 칼을 빼들며 이렇게 말한다. "싸우는데 이유가 뭐가 필요해? 전쟁하면서 제대로 이유대는 곳 봤어?"


뭐 이런 영화가 다 있나 싶다가도 가끔 통렬한 대사도 날려주는데 전체적으로는 영화 속에 응집된 에너지가 강력해서 장면마다 힘이 넘쳐 흐른다. 객석 호응도 좋아서 과거 1970년대 미국에서 한밤중에 소수의 팬들만 모아놓고 상영했던 <록키 호러 픽쳐 쇼> 같은 컬트영화가 딱 이렇지 않았을까 상상했을 정도다.



<도쿄 트라이브>를 만든 감독은 일본의 괴짜 소노 시온(53)이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논쟁거리를 만드는 그는 국내에도 골수 팬을 확보하고 있는데 그의 영화를 본 사람들은 돈키호테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상력과 그 뒤에 감춘 섬뜩한 아이디어를 칭송하거나 혹은 잔인하고 변태 같은 취향을 거부하는 것으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적어도 소노 시온 영화에 '대충'이나 '그럭저럭' 같은 반응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2006년 <기묘한 서커스>를 시작으로 국내에 몇 편 개봉하기도 했으나 흥행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부산국제영화제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선 만드는 영화마다 초청받고 관객상을 받아간다.


지하철에서 54명의 여고생이 집단자살하는 <자살클럽>, 아버지가 딸을 첼로 가방에 집어 넣고 성교 장면을 훔쳐보도록 강요하는 <기묘한 서커스>, 무예하듯 몸을 날리며 여자 치마 속을 촬영하는 변태 이야기 <러브 익스포져>, 대형 물고기 가게를 운영하는 싸이코패스 살인마가 등장하는 <차가운 열대어> 등 하나같이 마음을 굳게 먹지 않으면 두 눈 뜨고 똑똑히 보기 힘든 영화들이다. 그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참사가 터지자 이를 배경으로 <두더지>와 <희망의 나라>를 만들기도 했는데 <두더지>는 원래 평화롭지 않던 가정에서 대지진이 터지자 정신적으로마저 붕괴된 소년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야기고, 노부부와 아들 가족이 등장하는 <희망의 나라>는 밝은 뉘앙스의 제목과 달리 영화 속에서 '희망'을 갖는 자는 안전지역으로 이주한 아들 가족이 아니라 고립된 지역에서 치매에 걸려 살아가게 된 노부부라며 참사 이후 일본의 사회상을 역설적으로 제시한다.


소노 시온은 '자극적 소재'와 '욕망 가득한 캐릭터'를 내세운다는 측면에서 한국의 김기덕 감독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지만 김기덕 영화가 주제의식을 강조하는데 반해 소노 시온은 주제를 드러내지 않고 최대한 감춘다. 상영시간 내내 긴장하며 보다 보면 씁쓸한 현실을 돌아보게 되는 그런 영화들이다.



<도쿄 트라이브>가 올해 부산에서 눈길을 끈 영화였다면 그의 전작 <지옥이 뭐가 나빠>는 작년 부산에서 열광적 반응을 이끌어낸 화제작이었다. 내달 13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 이 영화를 먼저 봤다. <도쿄 트라이브> 만큼이나 미친 상상력이 극에 달한 하드코어-야쿠자-코미디-뮤지컬 영화로 <도쿄 트라이브>가 갑자기 튀어 나온 작품이 아님을 보여준다. 소노 시온의 영화들을 연대기순으로 보다보면 그의 재능은 점점 더 세련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50대에 접어든 감독임에도 나이가 들수록 상상력은 더 풍부해지고 작품 완성도도 높아진다는 것은 축복 아닐까.


영화에 미친 한 청년이 있다. 그는 자신과 비슷하게 영화에 미친 세 친구와 영화클럽 'Fuck Bombers'를 결성한다. 이들의 모토는 죽기 전에 세상을 바꿀 위대한 작품을 남기는 것으로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종횡무진한다. 한편 감옥에 가 있는 부인을 기다리는 야쿠자 무토파 두목이 있다. 10년 후 출소를 앞둔 부인의 소원은 어릴 때 광고 모델이었던 딸 미츠코가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무토는 조직에 충성을 다한 부인을 위해 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찍을 것을 결심한다. 이 과정에서 10년 동안 영화에 미쳐 있던 청년이 서른살이 되어 드디어 감독을 맡게 되는데 그는 무토파와 기타가와파의 실제 살육전을 영화 속에 담기로 한다.


그 다음 장면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두 야쿠자는 총이 아닌 검을 쓰기로 약속하고 감독이 "레디, 액션"을 외치자 <킬빌>의 액션을 능가하는 살육전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주목할 것은 영화가 이것이 실제상황임을 강조함으로서 더 리얼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선혈이 낭자하고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야쿠자들의 전쟁터에서 감독은 카메라와 사운드를 체크하며 만족해하는 웃음을 터뜨리는데 이 지점이 감독이 숨겨 왔던 메시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광기를 통해 인간들의 서로 다른 뒤틀린 욕망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니카이도 후미


영화의 영어 제목인 "지옥에서도 연기하지 그래?(Why don't you play in hell?)"는 어디에서나 카메라를 들이대며 '리얼리티'에 집착하는 요즘 현실을 꼬집는 말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야쿠자 두목 기타가와는 진짜 싸움을 영화로 찍겠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리얼리즘, 놈들은 판타스틱이라 우리가 불리해" 라고 말하는데 이는 영화의 탄생부터 나뉜 두 축인 리얼리즘과 판타지의 대립에 대한 교묘한 은유다. 영화 속 영화라는 설정을 통해 판타지 안에 리얼리티를 욱여넣으려는 시도가 얼마나 허무한지를 각인시켜주는 것이다. 007 주제곡을 패러디한 음악으로 시작해 이소룡, <시네마천국> <샤이닝> <킬빌> 등 여러 영화들을 변형한 장면들을 볼 수 있는 <지옥이 뭐가 나빠>는 한마디로 영화광들을 위한 '핏빛 시네마천국'이다.


<도쿄 트라이브>는 한국 개봉이 요원할테니 차치하고 내달 13일 개봉할 <지옥이 뭐가 나빠>는 섣불리 모든 사람에게 추천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다만 극단적 돈키호테식 자극을 원하는 분이라면 소노 시온 영화를 한 번쯤 경험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