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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지대>(원제 Westworld)는 <쥬라기공원>의 원작자와 TV시리즈 <ER>의 창조자로 유명한 마이클 크라이튼의 1973년 영화감독 데뷔작입니다. 그는 2006년 암으로 사망하기까지 작가, 감독, 제작자, 의사 등 다양한 직업이 있었지만 가장 큰 재능은 아무래도 소설가로서의 상상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쥬라기공원] [스피어] [타임라인] [떠오르는 태양] [콩고] 등 과학을 소설에 접목한 대중적 상상력에서 그는 독보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법 괜찮은 영화를 만든 영화감독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만든 7편의 영화들이 걸작은 아닐지라도 꽤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거든요. 의사로서 전문지식을 스릴러로 풀어낸 <죽음의 가스>와 <미인계>, 에드윈 S. 포터의 고전에 오마주를 바쳐 보안이 철저한 열차를 습격하는 <대열차 강도>, <다이하드>의 존 맥티어난과 공동연출한 괴물을 무찌르는 판타지 <13번째 전사>, <로보캅> 이전 로봇 탐정 이야기 <로보 런어웨이> 등 소재도 다양합니다. 이렇게 살짝 나열해봐도 그의 작품세계는 인류의 과학의존성을 경고하거나 장르에 천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의 데뷔작은 어땠을까요? 소문만 들어오던 <이색지대>를 이번에 감상하게 됐는데 만듦새는 투박하지만 이야기 진행은 꽤 흥미로운 88분이었습니다. 충분히 고전으로 추앙받을 만한데 영화사적으로 홀대받고 있는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이 영화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로봇이 등장하는 <쥬라기공원>입니다. 주인공은 공룡이 살고 있는 섬이 아닌 로봇 테마파크로 놀러갔다가 참변을 당합니다. 다른 영화로 표현하자면 <트루먼 쇼>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짐 캐리의 주위 사람들을 로봇이 연기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만큼 실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기 힘든 또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장 보드리야르의 획기적인 저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1981)이 출간되기도 전에 만들어진 영화라는 점에서 재조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영화는 뉴스릴로 시작합니다. 리포터가 '델로스(Delos)' 테마파크에 다녀온 사람들을 인터뷰하는데 그들은 모두 들떠 있는 표정입니다. 피터 마틴(리차드 벤자민)과 존 블레인(제임스 브롤린) 역시 기차 안에서 흥분에 가득 차 있습니다. 테마파크로 가는 그 기차 안의 모니터는 델로스에 세 가지 세계가 있다고 소개합니다. 웨스트월드는 서부시대를 재현해 놓은 곳이고, 중세월드는 중세 유럽의 성을 옮겨 놓았으며, 로마월드는 고대 로마의 황제처럼 지낼 수 있는 곳입니다. 두 사람은 총잡이가 되어보고 싶어 웨스트월드로 가는 트램에 올라탑니다.


1880년대를 똑같이 재연해 놓은 한 마을에 카우보이 복장을 한 두 주인공이 도착합니다. 마치 시간이동을 한 듯 완벽한 세트에는 주민들이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 번 와본 적 있던 존은 어리둥절한 피터에게 로봇은 손바닥 모양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손바닥은 인간과 구별할 수 있도록 똑같게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죠. 술집에 들어간 피터는 한 남자와 시비가 붙습니다. 당시 카우보이의 거친 세계가 익숙하지 않은 피터는 잠자코 있으려 하지만 그 남자는 피터에게 겁장이라며 자꾸만 시비를 걸어옵니다. 존은 피터에게 저 자를 쏴 죽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피터는 걱정이 앞섭니다. 만약 진짜 사람을 로봇으로 오인해서 쏘게 된다면 큰일이니까요. 여기는 서부시대인 척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로부터 한 세기 뒤의 문명사회인 것을 피터는 알고 있으니까요. 망설이던 피터는 남자가 총을 뽑자 얼떨결에 총을 꺼내 쏩니다. 남자는 피를 흘리며 쓰러집니다. 남자의 총에서는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신체의 열이 탐지되면 총알이 발사되지 않도록 안전장치가 걸려 있는 것이죠. 그는 로봇이었던 것입니다.


'언캐니 밸리'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1970년 일본의 로봇과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소개한 용어인데, 인간은 인간의 피조물인 로봇이 인간을 닮아갈수록 호감을 갖다가 어느 순간 너무 닮았다고 느끼게 되면 오히려 거부감과 두려움이 커지는 감정의 급격한 변화를 경험한다는 이론입니다. 이러한 감정의 변화 곡선이 일어나는 골짜기에서 인간과 닮았지만 어딘가 이상한 로봇이나 좀비, 뱀파이어 등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로봇이 결국 인간과 완전히 똑같아지면 급격하게 하락한 곡선은 다시 빠르게 원래 자리로 돌아와 완벽한 호감형이 됩니다.


"이 모든 걸 믿을 뻔했어."

"믿지 않을 건 또 뭐야? 이렇게 실감나는데."


테마파크에서 처음 총을 쏴본 피터가 친구 존과 나누는 대사입니다. 로봇에 열광하던 두 주인공은 영화 후반부에서 '언캐니 밸리'에 직면하게 됩니다. 인간과 똑같지만 어딘가 이상한 로봇이 그들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색지대>의 델로스 테마파크의 뒤편에는 고객들이 로봇과 대화하고, 죽이고, 섹스하며 신나게 놀 수 있도록 조종해주는 조종실이 있습니다. 고객의 성향에 맞게 로봇을 프로그래밍하고 고장난 로봇을 수리하는 일도 이곳에서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로봇의 고장률이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이때 조종실 관리자들의 대화가 재미있습니다. 로봇을 만든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컴퓨터가 한 일이라서 인간도 그 원리를 잘 모른다는 것이죠. 그들은 갑자기 로봇의 고장률이 높아지는 것이 로봇 사이에 전염병이 돌고 있는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래서 고객의 안전을 위해 테마파크를 폐쇄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총책임자는 그렇게 되면 외부에 테마파크에 대한 불신이 높아질 수 있다면서 운영을 계속하라고 말합니다. 관광객을 더 받기 위해 위험요인을 알면서도 문을 닫지 않는 테마파크라는 설정이라니 <쥬라기공원>과 꼭 닮았죠?


문제는 점점 심각해집니다. 어느 순간부터 로봇은 조종실의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죠. 전원을 꺼도 이미 충전된 배터리로 움직입니다. 맨 처음에 술집에서 피터에게 시비를 걸었던 총잡이 로봇(율 브리너)은 피터를 죽이러 돌아옵니다. 영문을 모르는 존이 자신이 상대하겠다며 로봇에게 먼저 총을 뽑으라고 하는데 이번에는 진짜 총알이 나갑니다. 얼떨결에 죽어버린 존을 본 피터는 총잡이 로봇을 피해 도망다니기 시작합니다. 완벽하게 통제된 가짜세계였던 테마파크는 이제 실제와 가짜가 뒤섞인 무질서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한참을 도망간 피터는 중세시대와 로마시대의 세트로 가게 되지만 그곳에는 이미 로봇에게 제압당해 죽어버린 관광객들의 시신만 남아 있습니다. 총잡이 로봇 역시 로마시대까지 그를 쫓아옵니다. 분리된 줄 알았던 여러 시대가 합쳐지고 가짜인줄 알았던 이야기가 진짜가 되어버렸습니다. 시대를 거슬러 쫓아오는 터미네이터 로봇 앞에서 테마파크에 놀러온 관광객일 뿐이었던 피터는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


영화 속 안드로이드 로봇처럼 인간과 구분하기 쉽지 않은 로봇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상현실은 그 이후 계속해서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죠. 최근엔 일본의 소프트뱅크가 인간의 감정을 인식하는 로봇 '페퍼'를 내놓고 퍼스널 로봇 시대를 예고하기도 했는데요. 진짜가 사라지고 가짜가 진짜를 대체하는 시뮬라크르의 시대, 41년 전에 만들어진 이 영화를 보고 있으려니 그때나 지금이나 로봇 윤리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PS 1) 인간처럼 정교한 로봇의 약점은 시각입니다. 영화에 총잡이 로봇의 시점샷이 나오는데 화면이 큼직한 픽셀로 이루어져 있어 흐릿하게 보입니다. 당시 PC가 나오기도 전인 시대인 것을 감안하면 컴퓨터의 시각이 이렇게 약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겠지요. 이 장면은 영화 역사상 디지털 이미지 프로세싱을 거친 최초의 시도라고 하는군요.


PS 2) 총잡이 로봇 역할의 율 브리너는 단연 이 영화의 최고스타였습니다. 그는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렌즈를 끼고 등장하는데 배가 좀 튀어나온 것을 제외하면 정말 로봇 같은 걸음걸이와 몸짓을 보여줍니다. 특히 피터가 뿌린 염산에 얼굴이 뭉개져 얼굴 단면이 뜯겨나간 뒤에도 피터를 공격하는 장면은 이후 <터미네이터> 같은 로봇 추격 영화에서 차용한 것 같습니다.


PS 3) 1976년에 <퓨처월드>라는 속편이 만들어졌습니다. 피터 폰다, 아서 힐, 블라이드 대너가 주연했고 율 브리너도 카메오 출연했습니다.


PS 4) 컴퓨터 사이의 전염병이라는 대사는 영화 역사상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첫 언급이었다고 합니다.


PS 5) <이색지대>는 2007년 타셈 싱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가 발표되었지만 무산됐습니다. 이후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제안이 갔지만 그 역시 거절했습니다. 워너 브라더스는 여전히 리메이크 계획은 살아있다고 밝히고 있네요.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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