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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언 맥큐언의 [속죄]를 집어들었을 때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제게 이런 소설은 진입장벽이 있는 책입니다. 책이 꽤 두꺼운 데다 내러티브보다는 한 여자아이의 심리묘사에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고 영국 어느 저택이라는 배경도 피부에 와닿지 않아서 몇 번을 내려놓고 다시 읽기를 반복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라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겨우 이야기에 빨려들어갈 수 있었는데 다행히 후반부는 왜 이 책이 고전 반열에 오를 만큼 칭송받는지 증명할 만큼 충격적이었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영화는 독서의 중간에 보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어서 영화를 먼저 보기로 한 것이죠. 확실히 영화가 책의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영화와 책을 다 보고 나니 책의 단점과 함께 영화의 단점도 고스란히 보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책의 1장이 쌀쌀맞고 불친절한데 반해 영화의 초반부는 지나치게 친절합니다. 책의 1장이 고집스럽게 아이의 시점에서 사건을 서술하려 애쓰고 있는 데 반해 영화는 시점을 다양화해 어느 한 사람에게 감정이입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저는 이 부분은 분명히 영화의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속죄'에 관한 영화이니만큼 세실리아와 로비의 가슴 아픈 사랑보다는 브리오니의 죄책감에 더 초점을 맞추었어야 했습니다. <위험한 관계> <토탈 이클립스> <비밀요원> 등 고풍스런 테마를 가진 영화들의 스크립트를 써온 크리스토퍼 햄튼은 이 영화의 플롯을 브리오니의 성장에 맞춰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했으면서도 시점을 유지하기를 포기해버립니다. 그대신 벌어진 사건을 보여주고 해설을 덧붙이는 식의 단순한 구성으로 일관합니다. 그러나 초반부를 제외하면 영화는 소설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편입니다. 소설 속 활자의 느낌이 훨씬 강력하긴 하지만 꼼꼼한 고증으로 풀어낸 영화의 연출력도 나쁘지 않습니다.



자신이 믿는 것을 실제로 보았다고 착각하는 한 소녀가 있습니다. 그녀는 희곡을 쓰는 취미를 가진 13세 브리오니(시얼사 로넌)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짝사랑하는 로비(제임스 맥어보이)가 언니 세실리아(키이라 나이틀리)와 데면데면해진 것을 알게 됩니다. 어느날 창문 사이로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두 사람을 엿보게 되고 세실리아가 한참을 물 속에 들어갔다가 빠져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로비가 언니에게 쓴 편지를 전달받게 되는데 그 편지 안에는 저속하고 음란한 단어가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그녀는 로비가 섹스중독자라고 확신합니다. 편지를 전해준 며칠 뒤 서재에서 로비가 세실리아와 섹스하는 장면을 보게 되는데 브리오니는 그것이 로비가 언니를 겁탈하는 장면이라고 믿어버립니다.


브리오니의 이런 착각은 그녀가 짝사랑하는 로비 때문에 언니를 질투해서일 수도 있고 혹은 정말로 그 행위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일 수도 있습니다. 로비는 브리오니가 사랑했던 유일한 남자였거든요. 물에 빠진 자신을 구해줄 거라고 믿고 목숨을 걸었던 남자였기에 그가 언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는 몇 개의 우연이 겹친 로비의 행동을 잘못 판단했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친구 롤라(주노 템플)가 저택의 외진 곳에서 강간당했을 때 강간범이 로비라고 진술해버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로비의 행동으로 봤을 때 그는 섹스중독자임에 틀림없고, 언니를 겁탈한 전력도 있기에 롤라를 강간한 것도 로비라고 믿게 됐고, 믿은 것을 실제로 보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사고의 흐름이 영화에서는 미성숙한 13세 소녀의 착각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사실 인간이 흔하게 저지르는 실수이기도 합니다. 기억을 더듬어 분명히 A는 B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던 기억을 다들 한 번씩은 갖고 있을 것입니다. 역사속에서 착각이 끔찍한 비극으로 이어진 경우도 많죠. 중세시대에 전염병, 기근, 초자연적 현상 등 모든 문제의 원인을 마을의 여자에게 뒤집어씌워 마녀사냥이 횡행했고, 히틀러는 게르만족만이 순결하다고 믿었기에 유태인을 학살했습니다. 최근엔 조지 부시가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 무기를 가진 걸로 굳게 믿고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자기만의 환상에 빠진 한 사람의 맹목적인 믿음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만들고 나면, 이미 벌어진 비극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18세가 되어 자신이 저지른 일의 실체를 알게 된 브리오니(로몰라 가레이)는 간호사가 되어 속죄하려 하지만 감옥으로 간 로비는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가버리고 없습니다. 자신을 떠나 홀로 살고 있는 언니는 자신의 편지에 답장이 없고요. 시간이 흘러 20권의 소설을 쓴 작가가 된 브리오니(바네사 레드그레이브)는 마지막 책으로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속죄]를 출간합니다. 책을 통해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서 세실리아와 로비, 두 사람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충격적인 반전은, 그녀는 여전히 착각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된 그녀는 13세 시절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보았다고 썼습니다. 그게 진술의 형식이든 소설의 형식이든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어릴적 희곡을 쓸 때 엄마에게 받았던 칭찬을 이젠 독자들에게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합리화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후반부에는 징집된 로비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장면이 길게 묘사됩니다. 프랑스의 던커크 해안에 영국군이 모여서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장면이 5분에 걸친 롱테이크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2차 세계대전을 발생시킨 이데올로기 역시 집단적 착각의 결과물입니다. 엥겔스는 친구인 메링에게 보낸 편지에 "이데올로기는 소위 사상가라는 사람들이 잘못된 의식을 수행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사상가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그 사상가 자신에게도 알려지지 않는다"라고 썼습니다. 즉, 이안 매큐언의 소설과 조 라이트의 영화 속에서 길게 전쟁을 보여주는 이유 역시 누군가의 착각이 이런 비극을 만들어냈고 속죄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돌아와,나에게 돌아와."

"당신을 찾을 거야. 결혼해서 치욕 없이 살 거야."


세실리아와 로비의 외침은 구천을 떠돌고 있습니다. 유려한 화면 속에 그리워하는 연인의 속삭임이 울분이 되어 메아리칩니다. 그러나 이 처절하게 아름다운 장면 역시 브리오니의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모든 착각은 욕망의 투영입니다. 로비가 자기만을 사랑할 거라는 13세 소녀의 욕망이 결국 비극을 잉태했습니다. 착각으로 끌어오른 욕망은 이성을 제어하지 못하고 결국 죽기 전까지 그녀를 괴롭힙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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