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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 중 하나인 고든 게코는 맨손으로 정상에 오른 자본가다. 정보 없이는 절대 투자하지 않고 돈 되는 정보라면 불법도 마다하지 않는 그는 주식, 부동산, 그림, 권총, 심지어 카페트까지 손 대는 것마다 값이 훌쩍 뛰게 하는 재주를 갖고 있다. 그러나 올리버 스톤 감독은 게코에 대해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영화의 화자인 버드 폭스(찰리 쉰)의 시점에서 그를 묘사하는데 때론 그를 숭배하고, 때론 그의 파렴치함에 분노하며, 때론 좌절하는 그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한다. 아마도 고든 게코라는 인물의 정체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이 신비로운 캐릭터는 그저그런 영화에 출연해오던 늦깎이 배우 마이클 더글라스를 스타덤에 올려놨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까지 선물했다.


월 스트리트에서 증권 브로커로 일하는 버드 폭스의 롤모델은 고든 게코다. "요즘 젊은이들은 돈을 쉽게 벌려고 해"라는 상사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그는 세상을 움직일 만큼 큰 돈을 벌고 싶어한다. 그는 게코를 만나기 위해 그의 사무실에 매일 전화한다. 정성이 통했는지 게코는 그에게 5분의 시간을 허락한다. 한 남자의 인생이 바뀌는데는 5분이면 충분하다.


폭스의 저돌적인 성격이 마음에 든 게코는 그에게 돈을 맡기고 스쿼시를 함께 하며 친해진다. 동료들은 폭스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게코의 투자금액이 늘수록 회사에서 폭스의 위치도 높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게코는 폭스에게 경쟁사의 내부정보를 빼올 것을 요구한다. 불법적인 일인 것을 알지만 폭스는 게코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다. 부자가 되느냐 혹은 이대로 평범한 브로커로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그가 쥔 패는 한 장 뿐이다.


"나는 창조하지 않아. 단지 소유할 뿐이야"


게코가 폭스에게 하는 대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돌고 도는데 자신은 그 사이에서 몫을 챙긴다는 것이다. 영화의 배경인 1985년은 감세와 정부지출 삭감, 규제완화로 대표되는 '레이거노믹스'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때다. 오일쇼크와 물가와 실업률이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미국 경제는 감세를 통해 민간의 저축과 소비를 촉진하고자 했다. 경제성장률이 오르고 (달러 강세와 유가 하락으로) 물가가 안정되는 효과는 있었지만 레이거노믹스의 부작용은 미국 경제에 큰 짐으로 남았다.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라는 '쌍둥이 적자'가 가중되기 시작했고, 자산양극화는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애초 기대했던 것은 부자들이 소비를 늘리면 서민도 잘 살게 된다는 '트리클다운' 효과였으나 부자들은 더 부유해져 슈퍼 부자로 거듭났고, 복지예산 삭감으로 중산층은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미국이 자랑하던 제조업은 당시 신흥국인 일본에게 밀려 위기에 처했고, 월가는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돈을 집어삼켜 자산가격이 급등하고 돈이 돈을 버는 새로운 금융기법이 속속 개발되고 있었다.


영화 <월 스트리트>의 폭스와 게코는 당시 정크본드 내부거래 스캔들로 구속된 '정크본드의 황제' 마이클 밀켄과 그의 동업자인 '월가의 기업사냥꾼' 이반 보스키를 모델로 했다. 1986년 <플래툰>으로 연출력을 인정 받은 올리버 스톤 감독은 증권 브로커였던 부친의 도움을 받아 각본가인 스탠리 와이저와 함께 창작 시나리오를 썼다.


폭스의 모델이 된 마이클 밀켄은 1980년대 월가에서 정크본드 시장을 개척한 인물이다. 스스로를 '타락천사'라고 부른 그는 자신이 근무하던 드랙셀 번햄 램버트 증권사를 5대 증권사에 올려놓을 정도로 수완이 좋았다. 정크본드로 명성을 얻은 그는 LBO(Leverage Buyout, 차입매수)에 손을 댔는데 LBO란 자금이 부족한 기업이 매수 대상 기업의 자산과 수익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해 인수 합병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밀켄은 보스키와 손을 잡았지만 보스키는 밀켄의 내부자 정보를 이용해 먼저 치고 빠지는 수법으로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1984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기업 내부정보를 이용해 시세차익을 올린 부당거래 혐의로 보스키를 기소했다. 보스키가 구속된 1986년 11월 14일 한동안 뉴욕증시가 폭락하고 M&A 시장과 정크본드 시장이 급속하게 얼어붙을 정도로 월가에 그의 영향력은 컸다. 이 사건의 담당검사는 1994년 공화당 소속으로 뉴욕시장이 되는 루돌프 줄리아니였는데 그는 '워터게이트'에 빗대 '월게이트'라고 불린 이 수사 과정에서 '월가의 저승사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보스키는 감형을 받기 위해 밀켄과의 거래정보를 검찰에 넘겼는데 영화 속에는 이 과정이 폭스가 게코와의 비밀 녹음을 검찰에 넘기는 형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1988년 보스키는 징역 2년에 벌금 1억달러를 선고받았고, 밀켄은 징역 10년에 6억달러의 벌금을 내야 했다. 드렉셀 번햄 램버트는 6억5천만 달러의 벌금을 선고받고 파산했다.



"탐욕은 좋은 것입니다. 탐욕은 옳고 통합니다. 탐욕은 진화하는 정신의 본질을 붙잡아 명확하게 해줍니다. 삶, 재물, 사랑, 지식에 대한 탐욕은 인류를 윤택하게 하고 고장난 미국 기업들을 살릴 것입니다."

게코가 자신이 인수한 제지회사의 주주총회에서 하는 연설의 일부다. 이 대사는 실제 보스키가 대학 강연에서 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 게코는 경영진의 과다한 보수를 언급하며 그들의 방만한 경영이 회사를 위기에 처하게 했으니 이제 그들을 갈아치우자고 호소한다. 신자유주의의 수혜자가 미국 사회에 팽배한 과소비, 탐욕, 물질만능주의를 역으로 이용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만든 것이다.

그러나 게코의 노림수는 따로 있었다. 게코는 애초에 회사 경영에는 관심이 없었다. 위기에 처한 기업을 인수해 자산을 팔아 돈을 챙기는 것이 그가 지금까지 돈을 벌어온 수법이었다. 그러나 폭스는 게코의 연설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이는 둘 사이를 갈라놓는 불신으로 이어진다.

두 사람은 항공사, 철강회사, 제지회사에 투자해 큰 돈을 번다. 대학 등록금 대출도 못 갚아 아버지에게 손 벌리던 폭스는 이제 부자가 되어 웨스트사이드의 넓은 아파트로 이사한다.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데이지와 톰이 사는 웨스트에그는 전통적인 부촌의 상징이었다. 데이지를 흠모하던 개츠비처럼 폭스 역시 아름다운 여자친구 대리언 테일러(대릴 한나)와 함께 살기 시작한다. 데이지처럼 데리언 역시 돈 없는 남자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속물이다. 폭스는 회사에서도 승진해 자신만의 방을 갖게 된다. 그가 꿈꾸던 성공에 근접하게 다가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욕심은 언제나 화를 부른다. 태양에 닿으려던 이카루스는 너무 가까이 간 나머지 날개를 잃고 추락했었다. 폭스는 아버지가 노동조합장으로 있는 항공사가 경영위기에 처하자 이를 인수할 것을 게코에게 제안한다. 아버지는 게코의 노림수를 알아보고 인수 제안을 거절하지만 폭스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사이가 멀어진다.

폭스는 항공사의 사장으로 취임하지만 그는 게코가 세운 바지사장에 불과했다. 게코가 자신 몰래 이사회를 소집해 항공사를 잘개 쪼개 매각하려는 것을 보고 배신감을 느낀 폭스는 그와 결별하기로 결심한다. 한때 롤모델에서 이제는 맞서야할 적으로 갈라서게 된 것이다. 폭스는 게코에게 배운 수법을 역이용해 멋지게 한 방 먹이지만 이내 역습을 당해 두 사람은 함께 감옥으로 가게 된다. 영화는 승자도 패자도 없이 법원에 들어서는 폭스를 부감 쇼트로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월 스트리트>의 스토리 구조는 이후 많은 금융 관련 소설과 영화의 모델이 됐다. 성공에 눈먼 주인공이 대가를 만나 성공을 이루지만 곧 허무함을 깨닫는다. 그 과정에는 정직을 신념으로 살아온 가족과의 갈등이 있다. 정상에 근접해 결국 배신당해 파멸하는 주인공은 뒤늦게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 스토리 구조 역시 과거 신화의 원형을 모티프로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영웅서사를 도시를 배경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예컨대,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는 착한마녀 글린다의 도움과 마법사 오즈가 내린 임무를 통해 모험을 계속하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스타워즈>의 루크 스카이워커는 요다의 수업으로 제다이 기사가 된 뒤 다스베이더와 운명적으로 마주쳤다.

<스미스씨 워싱턴 가다>에서 제퍼슨 스미스는 자신의 롤모델인 상원의원이 다른 의원과 마찬가지로 부정직하고 비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설득했고, <아이거 빙벽>에서 첩보기관 스파이인 조나단 헴록 박사는 자비로운 정신적 스승이었던 벤 보우만에게 살해위협을 받았다. 북유럽 신화에서 난쟁이 레긴은 처음에 용 살육자 시구아르트에게 부러진 칼을 다시 주조해줄 정도로 도움을 주는 정신적 스승이었으나 용을 죽인 후 시구아르트를 살해하고 보물을 혼자 차지할 음모를 꾸민다. <월 스트리트>에서 난쟁이 레긴은 돈의 화신 게코로 재탄생했다.


<월 스트리트>는 게코와 폭스를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게코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물이자 우리 내면 속의 탐욕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한니발 렉터가 인육을 먹는 악행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마력으로 관객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처럼 돈만을 숭배하는 게코는 자신이 이룩한 화려한 성과를 화면 속에 전시하며 관객을 향해 묻는다. 자신처럼 되고 싶지 않느냐고. 자신을 배신하는 폭스가 어리석지 않느냐고. <월 스트리트>의 이 전시효과를 극단으로 밀어부친 영화가 바로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다. 이 영화에서 마틴 스코세이지는 돈으로 맛볼 수 있는 쾌락의 끝을 보여준다.

1920년대 '위대한 개츠비'는 거부가 됐어도 마음 한 구석에는 여인을 향한 순정을 갖고 있었다. 게코에게 순정이 있다면 그것은 맨손에서 시작한 자신과 비슷한 야심을 가진 폭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키우고 싶은 연민일 것이다. 그 연민은 탐욕에 기반해 있는데 이것이 탐욕인 이유는 그의 후계자 수업이 자신을 동경하는 폭스에게 자신이 이룩한 것을 자랑하면서 따라올테면 따라와 보라고 말하는 조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이 게코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온갖 불법으로 돈을 굴려온 그가 자신이 파트너라고 믿었던 제자한테 배신당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땀 흘린 돈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찰리 쉰의 실제 아버지인 마틴 쉰이 연기한 폭스의 아버지는 뒤늦게 삶의 소중한 부분을 깨달은 아들을 보듬어 안는다. 폭스와 게코는 감옥에 가고 항공사는 산산분해될 위기를 벗어난다. 그러나 "게코가 아니어도 다른 누군가가 똑같이 했을 거야" 라는 대리언의 대사처럼 자본의 고삐풀린 탐욕은 누구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니다.


영화가 만들어진 지 27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당시 레이거노믹스가 뿌려놓은 신자유주의의 그물망 속에 살고 있다. 몇 번의 금융위기를 거쳤지만 잠들지 않는 자본의 속성은 인간의 탐욕을 자양분 삼아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월 스트리트의 한니발 렉터는 감옥으로 갔지만 그 후예들은 여전히 잠들지 않는 돈을 깨우고 있다.


<월 스트리트>는 1500만 달러로 제작돼 미국 내에서 4300만 달러의 흥행 수입을 기록했다. 1987년 4월부터 7월까지 뉴욕에서 촬영했으니 그해 10월 19일 '블랙 먼데이'를 영화 속에 담지는 못했지만 11월 개봉할 당시에는 월가에 대한 비판과 자성모드가 영화의 흥행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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