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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얘기를 하자면 이렇다네, 난 밤거리를 휘젓고 다니며 담벼락 아래서 신음하는 병자들을 죽였다네. 때에 따라서는 우물에 독약을 풀기도 했지. 기독교도 도둑놈들을 키워내는 데는 돈 몇 푼 쓰는 것도 아깝지 않았어. 저들이 나의 본을 따르는 것을 보고 낙으로 삼았다네. 소싯적 나는 독약을 만드는 법을 배워서 이탈리아 놈들에게 제일 먼저 시험해 보았지. 그곳에서 나는 수많은 시체들로 신부와 장의사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었고 장례식의 종소리를 울리는 일과 무덤 파는 일로 묘지기의 손을 바쁘게 했다네. 그 다음에 나는 책략가였어.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 동안 나는 찰스 5세를 돕는다는 명분아래 나의 묘수를 써서 동지나 적을 가리지 않고 죽였다네. 그 다음에 나는 고리대금업자였어. 속임수와 중개업의 비의를 동원하여 갈취하고 압류했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난 파산자들로 감옥을 채웠고, 부모 잃은 아이들로 고아원을 채웠고, 보름달이 뜰 때마다 몇 놈을 미치게 만들었지. 가끔가다 어떤 이는 불운을 이기지 못해 목을 매달기도 했어. 그들의 가슴에 나의 저주를 파묻고는 ‘아 놈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했지. 하지만 내가 저들을 괴롭히고 얻은 축복을 보게나. 내겐 마을 하나는 통째로 살 수 있는 돈이 있다네. 자, 이보게, 자네는 자네의 인생을 어떻게 써먹었는가?"

- 크리스토퍼 말로우 [몰타의 유대인(The Jew of Malta)]



<미드나잇 인 파리> 만큼이나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배경 지식 없이는 보기 힘든 영화다. 모로코 탕헤르와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살아가는 뱀파이어 커플을 그린 이 영화는 문학, 음악, 과학에 걸쳐 수많은 명사들을 언급한다. 500년 동안 살아온 여자는 문학과 언어에 통달해 있고, 3000년을 살아온 남자는 음악과 과학에 조예가 깊다. 심지어 두 커플의 이름은 '창세기'에서 따온 아담(톰 히들스턴)과 이브(틸다 스윈튼)인데 그들은 인간을 좀비라고 부르며 자신을 흉내내거나 재능을 빼앗아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고 묘사한다.


이브는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셸리와 바이런에 빠져 있고, 손의 감각이 남달라 물건을 만지면 언제 만들어졌는지 한 번에 알아낸다. 아담은 슈베르트에게 현악 5중주의 아다지오를 주었을 만큼 작곡에 능통하고, 최초의 페미니스트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사귄 적 있다고 말한다. 재미있는 것은 울스턴크래프트는 시인 퍼시 비시 셸리의 부인이자 [프랑켄슈타인]으로 유명한 메리 셸리의 엄마인데 만약 아담이 울스턴크래프트와 결혼했다면 프랑켄슈타인의 직계가 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담은 1960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록큰롤 선구자 에디 코크런, 디트로이트 출신 화이트 스트라입스의 기타리스트 잭 화이트를 언급하기도 하고, 그동안 쌓아온 과학적 지식으로 직접 발전기 같은 기계를 만들기도 한다. 그가 과학에 쏟는 애정은 동정심 같은 것인데 그는 좀비들(인간)이 과학자들을 무시해 피타고라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튼, 다윈, 테슬라 등은 끝내 말년이 좋지 않았다고 한탄한다.



아담을 보면서 김영하의 [흡혈귀]라는 단편이 떠올랐다. 그 책에는 16세기부터 한국땅에 살고 있는 흡혈귀가 현대에 시인, 시나리오 작가이자 문학평론가로 살고 있어 화자인 소설가가 무척 부러워하는 묘사가 나오는데, 그가 부러워한 이유는 흡혈귀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을 읽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음악에 빠져 있으면서 본인이 록밴드 멤버로 활동하고 있기도 한 짐 자무쉬 역시 아담이라는 인물을 통해 본인의 열등감을 표현하려 한 게 아닐까 싶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예술과 지식에 호기심이 많은 작가들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뱀파이어는 매력적인 소재일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을 연결하는 존재는 크리스토퍼 말로우(존 허트)다. 16세기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 극작가였던 말로우는 그간 30세에 술집에서 말다툼 끝에 단검에 찔려 죽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말로우 작품과 너무 비슷해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어 왔다. 얼굴에 상처를 입은 말로우가 30세 이후 은둔하며 셰익스피어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그 가설을 기정사실화하며 [햄릿]의 대사를 곧잘 인용한다. (아담은 마치 햄릿이 된 것처럼 영화 속에서 우유부단하게 죽지 못함을 한탄한다. 대체 어렵게 구한 총알은 왜 안 쏜단 말인가.)



지금까지 영화 속 뱀파이어들에게 가장 큰 고민은 식사문제였다. 빨간 피만 보면 돌아버리는 통에 인간들과 갈등을 빚어왔다. 아담과 이브에게도 식사는 영원히 계속되는 삶의 활력소이자 고민거리다. 아담은 '파우스트 박사' 명찰을 달고 야간 병원에서 RH-O형 피를 사들인다. (파우스트 박사는 말로우 대표작의 주인공 이름이다.) 아담과 이브는 피를 와인 잔에 따라 마시기도 하고, 아이스바로 얼려 먹기도 한다. 어느 날 이브의 여동생 에바(미아 바시코프스카)가 찾아오고 활달한 그녀로 인해 문제가 생긴다. 아담에게 희귀 기타와 나무 총알을 구해주던 이안(안톤 옐친)이 귀엽다며 그를 먹어버린(!) 것이다. 할 수 없이 아담은 이브와 함께 디트로이트를 떠나 탕헤르로 향하게 된다.



별다른 내러티브가 없는 이 영화에서 배경으로 등장하는 두 도시도 흥미롭다. 한때 세계의 공장이자 음악의 도시였던 디트로이트는 이제 황량해져 인적이 드물어진 죽어버린 도시다. 아담은 이곳에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으로 얼굴을 공개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 그가 작곡하는 장례식 음악 같은 전기기타 음악만이 아담과 인간 세상을 연결해주는 끈이다. 아담은 밤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이브와 함께 한밤중에 시내 드라이브를 하는데 잘 나가던 시절의 영화를 보여주는 미시건 극장은 지붕만 남아 현재 주차장으로 사용 중이다.


디트로이트와 탕헤르는 한때 화려했지만 지금은 몰락한 도시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탕헤르는 아담이 살고 있었을 기원전부터 유럽과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페니키아의 항구도시로 로마제국에 속해 번영을 누렸다. 15세기 제국시대에는 스페인, 영국, 포르투갈 등이 전략적 요충지인 탕헤르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모로코가 독립하기 전에 이곳은 유럽 열강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모로코가 독립한 이후에 무역항으로서 지위가 쇠퇴했다. 끊임없이 시간을 늘어뜨려 과거 속에 살아가는 뱀파이어들에게 죽어버린 두 도시는 숨기 좋고 한없이 늘어지기 좋은 장소일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아인슈타인의 '원거리 유령작용(spooky action-at-a-distance)'을 언급한다. 분자가 두 개로 분리돼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심지어 우주 반대편에 있어도 통한다는 이론으로 한쪽에 영향이 생기면 다른 쪽도 그 영향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존의 과학자들이 우주의 한 곳을 교란시키면 그곳을 중심으로 영향력이 퍼져나간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아인슈타인은 한 곳이 다른 곳에 즉각 영향을 미친다고 봤다. 양자역학과 다른 이 소신은 그러나 이후 빛보다 빠른 물질이 확인됨으로서 무너지고 말았다. 아인슈타인이 생각할 수 없었던 빛보다 빠른 물질은 공간이동 장치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1993년 물리학자들은 이론적인 장치를 고안해냈고, 1997년 광자 하나를 책상 너머로 이동시키는데 성공했으며, 2003년 제네바에서 광케이블을 이용해 광자를 2km 거리까지 공간이동시키기도 했다.


1997년 실험 팀의 일원이던 웨일스 대학의 사무엘 브라운스타인은 양자적으로 얽힌 관계에 있는 입자들을 사랑하는 연인에 비유해 이렇게 말했다. "연인들은 서로 상대방을 잘 알고 있으므로 먼 거리에서 사랑을 보내도 금방 느낄 수 있다. 얽힌 관계에 있는 입자들도 이와 비슷하게 행동한다." 아마도 이 문장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영화는 그밖에도 50광년 떨어진 센타우루스 자리(남반구에서는 맨눈으로도 볼 수 있다)에 있는 다이아몬드의 별 '백색왜성'을 언급하는데 이브는 아담에게 그 별에선 다이아몬드가 음악을 연주한다고 속삭인다. 이 별은 이상향처럼 제시되고 있지만 현실에서 아담이 마주하게 되는 이상향은 탕헤르에서 우연히 보게 된 한 여가수가 부르는 노래다. 결국 음악만이 고통을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하는 엔딩이다.


영화는 이것저것 잔뜩 늘어놓고 있는데 '소재주의의 끝판왕'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말로우가 현대인의 오염된 피로 인해 600년 만에 죽는다는 설정은 신선했으나 끝내 사용되지 않은 희귀한 나무총알이나 버리고 가버린 기타 등은 변죽만 울리다 끝나고 만다. 아담의 장송곡은 영화를 시종일관 무겁게 만들고 있지만 영화는 그들의 고통을 가슴으로 느끼게 하지 못하고 레퍼런스로만 이해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쓸데없이 늘어뜨려 놓아서 버려도 될 컷들이 너무 많다. 예전 짐 자무쉬 영화의 황량한 감수성에서 '감수성'은 사라지고 '황량함'만 남았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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