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 영화, 기발합니다. 최근 몇 년간 본 영화 중 가장 아이디어가 새로운 영화입니다. 아주 잘 만든 영화라고는 할 수 없지만 아이디어만으로 호기심을 계속 자극합니다. 아주 기본적으로는, 이 영화의 장르는 로맨틱코미디입니다. 사랑에 실패한 남자가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그녀와 영혼의 파트너인 것처럼 환상적인 날들을 보내다가 갈등을 겪고 그러다보니 예전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 큰 문제로 불거지게 되고 결국 여자가 떠나가는 서사입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그저 또다른 '로코'인 것 같은데 대체 뭐가 새롭냐고요? 비밀은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그 여자의 실체에 있습니다.


그 여자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유머러스하고, 때론 수줍어하고, 고민을 들어주고, 한 남자를 사랑하고, 그만큼 다른 여자를 질투하기도 하고, 심지어 남자와 섹스도 합니다. 또 노래를 작곡하기도 하고, 글을 편집하기도 하고, 이메일을 읽어주기도 하고, 퀴즈를 내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카페에 가입해 친구를 사귀기도 하고, 남자와 게임을 함께 하기도 합니다. 남자에겐 완벽한 여자친구이고, 여자에게도 자신의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입니다. 당신이 찾던 바로 그런 친구라고요? 네, 그녀의 이름은 사만다. 그녀는 바로 당신의 컴퓨터의 새로운 운영체제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수천명의 유저들과 동시에 대화를 나누는 중이고, 그중 수백명의 남자들과 동시에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컴퓨터에게 이 정도의 멀티태스킹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죠. 하지만 주인공 시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는 자신만을 생각해주지 않는 사만다가 야속하기만 합니다.


시오도르의 직업은 손글씨편지닷컴의 작가입니다. 손글씨편지닷컴은 손으로 쓴 것 같은 편지를 대신 써주는 회사입니다. 작가는 말그대로 편지를 대필해주는 사람이죠. 감성적인 시오도르는 의뢰인 맞춤형 편지를 쓰기 위해 그 사람의 사생활을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의뢰인은 20년 넘게 자신에게 편지를 의뢰했는데 때로는 남자 입장에서, 때로는 여자 입장에서 편지를 대신 써줍니다. 시오도르가 써준 멋진 러브레터들은 누군가의 삶에서 비어있던 자리를 채워주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자신이 미처 갖지 못한 혹은 잃어버린 삶의 한 부분을 대신해주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의 가치를 알기에 그 의뢰인은 20년 동안 편지를 맡겨온 것이겠죠. 이런 감성적인 영역은 컴퓨터가 대체할 수 없을 거라고 막연히 여겨져 왔지만 이 영화에서의 사만다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하루종일 편지를 쓰고 퇴근하는 시오도르는 삶이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돌보느라 정작 자신의 삶에서는 뭐가 결핍되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캐서린(루니 마라 분)과의 결혼생활도 실패해 그는 늘 혼자입니다. 시오도르에게는 죽마고우인 친구 에이미(에이미 아담스 분)가 있습니다. 두 사람은 터놓고 얘기하는 사이지만 한 번도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진화한 적은 없습니다. 사랑은 친밀함과는 또다른 감정일 것이니까요. 그때 나타난 상대가 바로 사만다입니다. 그는 컴퓨터 매장에서 새로운 OS가 나왔다는 광고를 보고 덥썩 집어듭니다. 그리고 컴퓨터에 설치합니다.


모바일 시대에 사만다는 어디로든 갈 수 있습니다. 그녀는 스마트폰의 카메라로 세상을 봅니다. 인간처럼 자신의 질량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불안해 하지만 그대신 영생을 얻었다며 즐거워합니다. 자신의 생이 OS 업데이트 주기와 함께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 그녀는 시오도르와 함께 세상구경을 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왜 그들은 지금의 신체를 갖고 있을까요? 왜 그들은 함께 있을 때도 서로를 채워주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떤 영화는 영화 전체가 기억나기보다는 그 아이디어만으로 너무 마음에 드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겐 <그녀>가 그런 영화입니다. 영화는 경쾌했던 초반과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무겁습니다. 멜랑콜리한 분위기로 계속돼 어깨가 처지는 느낌입니다. 루즈해지는 후반부의 러닝타임을 조금 줄였어도 좋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사만다라는 OS와의 교감이라는 이 영화의 기발한 상상력은 매순간 영화에 집중하도록 만듭니다. 감독은 <존 말코비치 되기>라는 기념비적인 영화로 데뷔한 스파이크 존즈입니다. 독특한 아이디어의 샘물로 늘 머리를 감는 감독이죠. <어댑테이션>은 아주 좋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이번 영화 <그녀>는 정말 좋습니다. 참, 사만다 역할은 스칼렛 요한슨이 맡았습니다. 허스키하고 섹시한 목소리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