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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은 노예제도가 폐지된 북부 뉴욕주에 살던 흑인이 납치당해 남부 루이지애나주에서 12년 간 노예 생활을 하다가 극적으로 풀려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올해 오스카 작품상 유력 후보로 떠오르며 주목을 받고 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12년간 단지 살아남기 위해 살아가던 주인공 솔로몬이 마침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해줄 옛 지인을 만날 때다. 그에게 찾아온 사람은 앞 장면에서 딱 한 번 등장했던 상점 주인 파커. <라이프 오브 파이>의 호랑이 리차드 파커가 주인공을 정신 바짝 차리게 하며 삶의 의지를 확인시켜주었던 것처럼 <노예 12년>의 파커도 구세주처럼 등장해 솔로몬을 노예의 삶에서 구원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12년 전의 나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영화는 160년 전 미국 사회의 이야기지만 현대인에게 주는 시사점도 분명히 있다. 가정의 구성원으로, 직장의 조직원으로,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가면서 완벽한 자유인이라고 느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들 허리에 한 가득 짐을 안고 살아가지 않나. 책임감이 클수록 때론 그 짐이 너무 무거워 노예의 삶과 다를 바 없다고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영화가 그리고 있는 160년 전 처참한 노예생활과는 또다른 세련된 방식의 현대판 노예들이 아침 일찍 나가서 밤 늦게 귀가하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최근 삼성 직원들이 주 7일간 근무한다는 보도가 있기도 했는데 많은 직장인들의 생활이 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또 악명 높은 이 나라 학생들의 24시간은 어떤가.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밤늦게까지 자율학습(!)을 한다. 자신이 어떤 쳇바퀴를 돌고 있는 지 생각할 여유도 잊은 채,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 노예들처럼 때론 좋은 주인을 만나 편하고 때론 나쁜 주인을 만나 고생하면서 뒷담화를 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면 12년 전의 나는 까마득한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내가 누구였는지 마땅히 증명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납치 감금된 지 15년 만에 풀려나 과거를 잊은 것을 보라. 그는 자신의 딸도 알아보지 못해 비극의 오이디푸스가 되었다. 하지만 <노예 12년>의 솔로몬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참고 또 참으면서 자유를 꿈꾸었다.


솔로몬이 자유를 찾은 방식은 기대만큼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어느 진보주의자의 편지 한 통이 그를 살려냈으니까. 그러나 주목할 것은 멀리 남부까지 찾아와준 파커의 존재다. 우리는 파커와 솔로몬이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먼 길을 달려와 플랫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솔로몬이 과거에 솔로몬이었음을 증명한다.


영화는 담담하게 이 장면을 그리고 있지만 사실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에서 파커를 만난다는 것은 종교의 절대자와 마주치는 것만큼이나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누군가 당신을 찾아와 지금의 당신은 당신이 아니오, 12년 전의 자유인이었던 당신은 이런 사람이었소, 라고 말해준다면 어떻겠는가? <매트릭스>에서 네오를 불러낸 모피어스처럼 아주 낯선 인물이 아니라 당신이 자주 들르던 상점의 주인이라면, 당신은 과거의 자신을 증명하고 그를 따라갈 수 있겠는가?


12년의 삶을 134분으로 압축한 <노예 12년>을 보는 당신의 대답은 당연히 "Yes"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사실 이 글을 읽는 지금의 당신은 어제도 오늘도 끊임없이 망설이고 있지 않은가.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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