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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소아 오종의 영화가 돋보이려면 에로티시즘이 스릴러와 만나야 합니다. <바다를 보라> <사랑의 추억> <스위밍 풀> <타임 투 리브>는 물론 최근작 <인 더 하우스>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다른 장르에서 오종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사실 <타임 투 리브> 이후의 영화들은 지나치게 평이해서 오종의 전성기가 지나갔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인 더 하우스>로 예전 감각을 되찾나 싶었지만 <영 앤 뷰티풀>은 또다시 실망스럽습니다. 에로티시즘만 남고 특유의 번뜩이는 냉철함은 온데간데 없이 평이합니다.


영화는 여름, 가을, 겨울, 봄의 4부 구성으로 전개됩니다. 마치 에릭 로메르의 영화에서 따온 듯하지만 내용상 공통점을 찾기는 힘듭니다. 굳이 찾자면 여주인공이 <여름이야기>의 인물처럼 큰 고민이 없는 소녀라는 것. 성에 막 눈뜨기 시작한 17세 소녀 이사벨(마린 바크스 분)은 남동생, 친엄마, 새아빠와 함께 삽니다. 밤에 자위를 할 정도로 호기심 왕성한 그녀는 새로 만난 독일인 남자친구와 해변에서 첫 경험을 치르지만 생각만큼 좋지 않았습니다. 그뒤 영화는 이사벨이 몸을 팔게 된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그저 계절이 지나가고 가을이 되니 그녀가 돈을 받고 남자들을 만나고 있더라는 식입니다. '여름이 남긴 흔적'이라는 자막과 함께 이사벨은 인터넷 콜걸 '레아'가 되어 돈을 받고 중년의 남자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사벨은 <비브르 사비>의 나나처럼 가난해서 몸을 판 것도 아니고, <사마리아>의 여진처럼 유럽여행을 가려고 창녀가 된 것도 아니고, <세브린느>의 세브린처럼 권태와 외로움 때문에 일탈한 것도 아닙니다. 성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주지 못하는 시시하고 멍청한 동년배 남자. 이것이 이 영화에서 그녀가 대담하게 인터넷 조건만남 사이트의 콜걸이 된 계기를 설명해주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이토록 불친절하기에 이 영화는 초반에 궁금증을 유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비록 그 궁금증이 영화를 끝까지 파워풀하게 이끌어가지는 못 하고 있지만요.


호텔방에 들어온 이사벨에게 아저씨들이 묻는 것은 똑같습니다. 몇 살인지, 학생인지. 이사벨은 미성년자인 것을 숨기려 엄마 블라우스를 입고 화장을 하고 있습니다. 돈이 필요해서 이 일을 하는지 묻는 남자들에게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립니다. 하지만 이사벨은 화대 300유로를 받아서 옷장 바닥에 숨겨놓을 뿐 쓰지 않습니다. 친구들 중 누구는 프라다 가방을 사기 위해 몸을 판다는 이야기도 듣지만 이사벨의 관심은 명품 가방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셰임>의 섹스중독자 브랜든처럼 도시 생활에 무기력해져 섹스에 몰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사벨은 정사 중 복상사한 조지로 인해 매춘 행각이 발각된 뒤에도 엄마에게 자신이 번 돈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윤락여성 재활을 돕는 단체에 기부하자는 엄마를 비웃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망가졌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 세상의 남자들은 똑같습니다. 시시하거나 혹은 자기를 돈 주고 사거나. 어느날 이사벨은 새 아빠를 유혹하려 하고 이에 엄마는 화를 냅니다. 예전의 프랑소아 오종이었다면 <스위밍 풀>처럼 여기서 더 밀어부쳤겠지만 이 영화는 이 정도에서 밋밋하게 타협하고 이사벨의 심리를 보여주는데 만족합니다.


<영 앤 뷰티풀>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딸이 콜걸이라는 걸 알게 된 부모의 대응방식입니다. 엄마와 새아빠, 그리고 남동생은 차분하게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굉장히 쿨하면서도 책임과 권리에 명확한 프랑스적인 사고방식입니다. 한국영화였으면 한바탕 난리법석이 벌어졌을테지만 이들은 그녀가 다시 학교생활에 적응하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온 그녀에게는 이미 많은 것이 변해 있습니다. 계절도 바뀌어 있고 남자친구를 사귀어보려 했지만 더이상 시시해서 사귈 수가 없습니다.


여름에서 가을, 겨울을 지나 봄으로 계절이 바뀌면서 길었던 17세가 끝나갑니다. 그녀도 곧 성인이 될 것입니다. 영화가 담은 시간은 17세이기에 가능했던 방황의 계절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사벨은 조지의 미망인 알리스(샤를로트 램플링 분)와 함께 침대에 눕습니다. 이사벨이 조지와 마지막 정사를 했던 곳입니다. "나도 네 나이땐 돈 받고 남자들을 만나고 싶었지" (마치 <스위밍 풀>의 연장선상 같은) 알리스의 뜻밖의 고백에 이사벨은 마음이 놓입니다. "여기 다시 와보고 싶었어요." 과연 이사벨은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까요?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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