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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재스민이라는 여자는 우디 앨런 영화에 곧잘 등장하는 여자 캐릭터들의 종합세트 같습니다. 허영심 많고, 정신쇠약에 걸려 있고, 수다 떨기 좋아하고, 불평불만에 가득하고, 현실도피를 꿈꿉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다른 결정적인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우디 앨런은 그녀가 어떻게 변해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교차편집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이 78세 노장 감독이 지금까지와 달라진 점입니다. 우디 앨런은 여전히 시니컬하고 여전히 수다스럽지만 확실히 더 친절해졌습니다.


우디 앨런의 영화는 몇 가지 부류로 나뉘어집니다. <당신이 섹스에 대해 알고 싶던 모든 것> <젤리그> 같은 채플린식 코미디, <애니홀> <맨해튼> 같은 뉴욕 드라마, <카이로의 진홍빛 장미> <한나와 그 자매들> <미드나잇 인 파리> 같은 노스탤지어 판타지, <범죄와 비행> <매치포인트> <스쿠프> 같은 히치콕식 스릴러, <인테리어> <또 다른 여인> 같은 잉마르 베르이만식 삶과 죽음에 관한 진지한 드라마, 그리고 <마이티 아프로디테> <카산드라 드림> 같은 그리스 비극의 변주입니다. 일단 우디 앨런 본인이 등장하지 않고 웃음기가 싹 빠지면 잉마르 베르이만과 그리스 비극이 연상됩니다.


우디 앨런의 필모그래피에서 <블루 재스민>과 비슷한 영화를 꼽아본다면 <매치 포인트> <멜린다와 멜린다> <또 다른 여인>이 떠오릅니다. <매치포인트>식 미스터리 구성, <멜린다와 멜린다>식 인물의 이중성, 그리고 <또 다른 여인>처럼 자아가 파괴된 한 여인의 이야기라는 점이 닮았습니다. 또 많이 언급됐던 것처럼 이 영화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영감을 받은 영화입니다. 명문가문 출신의 블랑쉬가 여동생을 찾아 쇠락한 도시에 와서 적응 못하는 이야기라는 구성이 똑같습니다. 1951년작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과거를 숨긴 블랑쉬(비비안 리 분)는 동생 친구 스탠리 코왈스키(말론 브란도 분)와 갈등을 겪다가 결국 결혼에 실패해 정신병을 얻게 되고, <블루 재스민>의 재스민은 칠리(바비 카나베일 분)와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집을 나오게 되죠. 테네시 윌리암스 희곡에 더 근접했던 1995년작 TV영화에서 스탠리 코왈스키를 연기했던 알렉 볼드윈이 폰지(피라미드) 금융사기꾼 메이도프를 닮은 남편 할 역할을 맡고 있는 것도 재미있죠.


<블루 재스민>에는 '파토스(Pathos)'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즉, 외부 환경이나 운명에 의해 불운에 빠진 주인공에게 연민을 자아내야 하는데 블랙코미디가 그것을 막고 있습니다. 재스민에게 연민이나 동정심이 느껴지나요? 재스민은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려 우울증 약 프로작을 먹고, 이복동생에게 얹혀 살면서도 그녀의 삶을 무시하고, 상류층의 남자를 만나 다시 복귀하려 하지만 거짓말이 들통나 실패합니다. 결정적으로 그녀가 불운해진 방아쇠를 당긴 사람이 그녀 자신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클라이막스에 이르러서는 그녀가 아들을 잃은 것마저 자업자득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고 맙니다. 마지막 장면에 홀로 벤치에 앉아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비운의 여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는 이 영화가 그리스식 비극의 구성을 차용해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남편이 바람핀 사기꾼이라는 게 밝혀져 그녀가 추락한 거라면 그녀에겐 비운만 남았겠지만 그 스위치를 홧김에 당긴 사람이 재스민이라는 게 밝혀짐으로서 그녀는 스스로 비극 속으로 걸어들어간 게 된 것입니다.


영화는 상류층에서 추락한 재스민을 통해 계층갈등, 욕망, 허영심 등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배다른 자매 중 신데렐라의 구두를 신었던 언니는 결국 왕자가 사기꾼이었다는 것을 알고 바닥으로 내려옵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정말로 훌륭한 점은 재스민을 단순한 피해자로 만들지 않음으로서 더 폭이 넓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 이를 위해 과거의 뉴욕시절과 현재의 샌프란시스코를 능숙하게 교차편집해 미스터리 구조를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케이트 블란쳇을 캐스팅했다는 것입니다. 케이트 블란쳇은 재스민 그 자체입니다. 그녀가 아닌 재스민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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