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옛날에 한국영화에 문예영화 붐이 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문예영화란 소설을 그대로 영화화한 거죠. 문학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게 장점이라면 단점은 특유의 문어체 대사들입니다. 김수용의 <안개> 이만희의 <만추> 유현목의 <김약국의 딸들> 같은 영화들이죠. 소위 그런 '먹물' 대사들은 한동안 한국영화에 남아 90년대까지만 해도 도대체 이게 책을 읽는 건지 헷갈리는 대사들이 많았습니다. <카운슬러>는 할리우드 영화지만 보는 내내 옛날 문예영화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마도 코맥 맥카시가 직접 스크립트를 썼기 때문일까요? 가뜩이나 대사가 많은데 그 대사들은 대부분 상당히 심오하고 또 문어체입니다.


그런 대사들의 장점도 있습니다. 마치 책을 읽는 느낌이기 때문에 대사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는 겁니다. 카운슬러(마이클 파스벤더 분)는 라이너(하비에르 바르뎀 분), 웨스트레이(브래드 피트 분)와 긴 대화를 나누고 두 사람이 잠적하고 나서는 멕시코 후아레즈에서 한 남자와 교차로를 주제로 긴 대화를 나눕니다. 저는 특히 이 장면의 대사가 좋았습니다. 인생의 교차로를 건너고 있는데 그 선택은 이미 예전에 했으니 돌이킬 수 없다는 내용의 대사였습니다.



이 영화는 리들리 스콧의 영화라기보다는 코맥 맥카시의 정서가 그대로 묻어 있는 영화입니다. 코맥 맥카시의 정서는 하드보일드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국내에서 잘 알려져 있죠. 따라서 이 영화를 보면서 두 가지는 절대로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해피엔딩과 플롯입니다. 주인공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행복하게 잘 살지 않습니다. 또 반전이니 다층적인 복선이니 이런 놀랄 만한 플롯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주인공이 왜 계속 위험하다는 경고를 받으면서까지 마약 거래에 끼어드는지 그 이유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대신 이 영화는 분위기의 영화입니다. 어떤 분위기가 시종일관 관객들을 짓누르면서 러닝타임을 끌고 갑니다. 그 분위기에 흠뻑 젖으면 시간은 금세 지나가 있고 영화는 끝나 버립니다.


그 분위기란 바로 '공포'입니다. 카운슬러, 라이너, 웨스트레이 세 명의 남자들은 일이 틀어지자 두려움에 벌벌 떨며 도망칩니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자신이 도망치려는 대상을 모릅니다. 즉, 존재를 알 수 없는 어떤 막강한 대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그들이 식은땀을 흘리는 이유입니다. 영화 속에 "멕시코 위험하다"는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밤엔 절대로 돌아다니지 마라. 그냥 재미로 쏴죽인다"고 하죠. 하지만 정작 카운슬러가 후아레즈의 밤거리로 나섰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확인할 수 없는 공포가 등장인물을 계속해서 위협합니다. 그들은 그 공포에서 벗어나려 하고 영화의 플롯은 그들이 도망치는 과정이 전부입니다. 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은 멕시코와 미국 사이에서 마약 운반을 총괄하는 어떤 큰 조직일 것입니다. 그들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어 반드시 보복합니다. 카운슬러에게는 스너프 필름이었고 브로커에게는 목에 감기는 쇠줄 같은 신기술이었습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괴물 같은 무시무시한 악당으로 등장했던 하비에르 바르뎀이 <카운슬러>에서는 허무하게 죽어버리죠. 그 뒤에는 남의 말 엿들으며 브로커들 등처먹는 말키나(카메론 디아즈 분)라는 영악한 여자가 있습니다. 이 여자는 세 남자의 공포를 이용해 자기 몫을 챙깁니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강하고 겁이 없는 캐릭터입니다. 하드보일드의 세계에서는 상상력이 없어야 살아남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전체 이야기보다는 몇몇 장면들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경고의 다이아몬드'의 불길한 징조, 한 번 목에 걸리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공포의 쇠줄, 331km로 달리는 오토바이를 멈추는 헤드 하이재킹, 고속도로에서 똥차를 둘러싼 총격전, 노란색 포르쉐와 섹스하는 말키나, 카운슬러에게 교차로를 지나왔다고 경고하는 전화 통화 등입니다. <카운슬러>는 유려하게 흘러가는 내러티브의 영화라기보다는 공들여 찍은 씬들을 붙여놓은 모자이크 같은 영화입니다. 많은 인물들이 단 한 씬에서만 등장하면서도 강력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교도소 면회 장면에서 등장한 루스(로지 페레즈 분)는 담배를 피면서 카운슬러를 노려보는데 눈빛만으로 기를 죽입니다. 다이아몬드 딜러로 나오는 브루노 간츠는 카운슬러에게 차분하게 다이아몬드에 대해 설명해주는데 그 설명은 결국 영화의 (거의 유일한) 복선이 됩니다.



<카운슬러>는 화려한 캐스팅과 달리 대중에게 어필할 영화는 아니지만 보고 나면 강한 인상이 뇌리에 깊숙이 남을 영화입니다. 리들리 스콧은 기존의 내러티브 위주의 영화가 아닌 아우라의 영화를 만들어 거장의 솜씨를 보여주었습니다. 인정사정 없는 하드보일드의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으신 분에게 추천합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