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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지난 7월 26일 오후 1시, 뙤약볕이 내리 쬐는 서울 홍릉동 영화진흥위원회 건물 앞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기자, 평론가, 감독, 제작자 등 영화 관계자 100여 명 중에는 몇몇 반가운 얼굴도 있었다. 그런데 그날 시사회의 분위기는 다른 시사회와 사뭇 달랐다. 입구에 서약서 한 장이 놓여 있었던 것. 시사실 안으로 들어가려면 서약서에 서명을 해야 했다. "이 영화에 대해 언론, 블로그, SNS 등 어디에도 글을 쓰지 않겠습니다." 이 무슨 논리 모순인가. 영화를 보여주지만 절대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니.


상황은 이랬다

이날 시사회는 영화등급위원회에서 두차례 연속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았던 한 영화의 감독이 과연 이 영화가 한국 성인들이 봐서는 안 되는 영화인지 영화 관계자들에게 보여주고 투표를 해보자고 벌인 시사회였다. 물론 투표의 법적 구속력은 없었다. 참고로 한국에는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은 영화를 상영할 극장이 없어 이 등급을 받으면 개봉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사실상의 사전 검열인 셈이다.


뜨거운 감자 같은 이 영화는 바로 김기덕 감독의 신작 <뫼비우스>. 작년 <피에타>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김기덕 감독의 신작이 대한민국에서 첫 공개되는 자리가 이처럼 논란 속에 열린 것이다. 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드는 김 감독은 <뫼비우스>를 만들며 스탭들에게 제대로 돈을 줄 수 없었고 그대신 국내 개봉의 수익금을 나누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흥행 걱정은커녕 국내 개봉조차 할 수 없게 되니 허탈한 마음에 이런 시사회를 연 것이다.


영화 상영이 끝난 뒤

참석자들은 미리 받은 투표용지에 동그라미와 엑스표 중 하나를 그렸다. 누군가는 "이게 무슨 효과가 있나요?" 라며 소리치기도 했다. 잠시 후 개표가 시작됐다. 칠판에 '바를 정'자가 하나씩 새겨졌다. 초등학교 반장 투표 이래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결과는 찬성 93표, 반대 11표, 기권 3표. 반대가 30% 이상 나오면 개봉의사를 접겠다고 했던 김 감독 측은 일단 한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 이 사건은 당시 참석한 몇몇 언론에 의해 투표결과가 보도됐고 그로 인해 '필름을 조금 더 자른' 3차 심의는 가까스로 통과돼 '18세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아 9월 5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도대체 어떤 영화길래

그렇다면 '필름을 조금 더 자르기 전' 이 영화는 대한민국 18세 이상 성인이 감당하기에 힘든 영화인가? 영화를 먼저 본 필자가 일단 <뫼비우스>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성기 접합과 오르가즘을 소재로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인간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연결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있는 영화다.


원래 김기덕 영화는 말수가 적지만 이 영화는 아예 대사가 하나도 없다. 배우들은 대사가 아닌 몸짓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한다. 특히 엄마와 아들의 여자친구로 1인 2역을 한 이은우의 연기는 스크린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그러나 완성도는 투박하다. 화면은 툭툭 튀고 불친절하다. 인간의 욕망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 궁금한 사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관심 많은 사람, 성기 접합 기술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 그리고 김기덕 감독의 팬들이 아마도 이 영화의 관객이 될 것이다. 성기가 잘린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성기를 아들에게 이식해주고 아들이 아버지의 성기로 엄마와 섹스하는 오이디푸스적인 설정 때문에 영등위 심사에서 계속 문제가 됐었다.


베니스와 대한민국

김기덕 감독의 오랜 팬인 필자이지만 딱히 이 영화를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영화를 볼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지난 수십년간 미국 대학에선 영화와 강력사건 사이의 상관 관계에 대한 연구가 진행돼 왔다. 일명 미디어의 폭력배양효과에 관한 연구. 강력범이 폭력적인 영화나 TV를 보고 모방범죄를 일으켰다는 인식 때문에 정말 그런 것인지를 연구했지만 결과는 딱히 상관 관계를 밝힐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청소년에게 모방효과를 일으키지 않겠냐는 심증은 있지만 실험 결과 확인된 물증은 없었다. 마이클 무어는 아카데미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볼링 포 콜럼바인>으로 이런 현상을 멋지게 풍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쨌든 사회가 흉악해지면서 굳이 끔찍한 장면을 만들 필요도, 볼 필요도 없지 않느냐는 공감대는 어느 정도 형성돼 있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언제나 그 틀을 깨고 싶어 한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그 예술가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다. 김기덕 감독은 3수 끝에 심의를 통과한 후 "잔인한 대량학살극이 벌어지는 영화는 15세 관람가를 받는데 <뫼비우스>는 상영조차 금지"였다며 "잔인한 폭력 살인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성에 대해서는 엄격하다"며 한국 사회의 윤리적 편협함을 꼬집었다.


9월 5일 한국 관객은 약 3분 가량이 잘려나간 <뫼비우스>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8월 28일부터 열리는 베니스 영화제에서는 이 영화가 무삭제 원본으로 상영된다. 베니스의 관객들이 한국에서 벌어진 이 소동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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