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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은 <코스모폴리스>의 중요한 키워드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던 월가 투자가 에릭 파커(로버트 패틴슨 분). 그는 많이 번 자와 가난한 자로 나뉘어지는 것이 세상의 균형이라고 생각했다. 그림이 보고 싶으면 교회를 사서 그림을 혼자 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그림을 보고 싶은 자는 자신을 누르고 교회를 차지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공공을 위해 자신이 교회를 가질 권리를 포기해야 할 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지금 환시장에서 위안화가 예측만큼 떨어지지 않아 불안하다. 자신의 정밀한 예측대로라면 위안화는 떨어져야 한다. 미국 대통령도 부럽지 않을 만큼 억만장자인 그는 지금 이 한 번의 베팅 실패로 몰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여기에서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홀리 모터스>의 오스카(드니 라방 분)처럼 에릭은 리무진 안에서 생활한다. 오스카가 다른 누군가가 되기 위해 리무진을 거점으로 삼는다면 에릭의 리무진은 다른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사무실이다. 그는 투자전문가, 회계전문가, 큐레이터, 의사, 보디가드 등을 리무진으로 불러 대화를 나눈다. 권력과 돈이면 누구든 그의 차로 달려온다. 유일하게 대통령만이 그의 리무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그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리무진을 빠져나갈 때는 그의 아내 엘리스 시프린(사라 가돈 분)을 만날 때뿐이다. 집안끼리의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 부유한 집 딸인 그녀는 스스로를 시인이라고 부르며 에릭을 돈과 섹스 냄새가 진동한다며 경멸한다. 에릭은 모든 것을 가진 그가 정작 아내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느날 그의 주치의 대신 나타난 의사가 리무진에서 그를 진찰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전립선 양쪽 크기가 서로 달라요." 이제 진짜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


전립선의 크기가 서로 다르고, 이발소에서는 한쪽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투자는 처음으로 실패하고, 설상가상으로 그의 회사의 전 직원(폴 지아매티)은 그를 죽이려 한다. 균형을 잃어버린 에릭이 택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균형이 필요한 세계를 빠져나오는 것이다. <설국열차>의 남궁민수가 그랬던 것처럼 에릭은 리무진에서 내린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3년 간 자신을 쫓아다녔다는 자에게 파이 세례를 받아 얼굴이 범벅이 된다. 그는 얼굴에 묻은 파이를 핥아 먹으며 이렇게 말한다. "디저트는 끝났어." 에릭은 보디가드 토르발(케빈 듀런드 분)을 죽이고 자신을 위협하는 전 직원을 찾아간다. 문제는 내가 아니라 돈을 만들어낸 이 시스템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결국 들쥐를 화폐로 썼다."

- 폴란드 시인 지그뇌프 허버트 [포위된 도시] 중


영화 시작과 함께 떠오르는 자막이다. 원작은 포스트 모더니즘 소설가 돈 드릴로의 2003년작 [코스모폴리스].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이전에도 윌리엄 버로스의 [네이키드 런치]라는 포스트 모더니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적이 있다. 문자로 읽기에 난해한 세계가 그에게는 확실한 영상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이 영화는 에릭이 하루동안 겪는 뉴욕에서의 리무진 여정을 담고 있다. 위안화가 떨어질 거라고 경고하는 IMF 총재가 북한 방송 도중 중국인에게 살해당하고, 부자들의 사악함을 규탄하는 시위대가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들쥐를 화폐로 사용하라는 구호까지 나붙는다. 극중 운전사의 표현대로 "Fuck is everywhere." 글자그대로 자본주의의 직접적인 위기다.


에릭은 밤에 리무진이 어디에 주차되어 있는지 궁금해한다. 가뜩이나 대사가 많은 영화지만 이 대사는 전반부와 후반부에 두 번 나온다. "밤에 리무진은 어디에 있는 거지?" 리무진은 낮에는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지만 밤에는 주차하기 힘든 애물단지일 뿐이다. 에릭이 궁금해한 건 스포트라이트가 꺼진 후의 리무진이다. 밤이 되고 리무진이 사라지자 에릭은 홀로 남는다. 어릴 때부터 에릭을 지켜본 이발사는 그에게 권총을 쥐어준다. 총이 없으면 절대로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그때 누군가 에릭을 향해 창문으로 총을 쏜다. 그 장면은 영화속에서 에릭이 가장 쓸쓸해보이던 장면이다. 리무진과 보디가드 없이 홀로 남겨진 에릭은 그저 외로운 청년이다.


"왜 날 죽이려는 거지?"

"너는 자신을 파멸시킬 때조차 남보다도 더 화려하게 실패하고 더 많이 손해를 보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아. 남보다도 더 화려하게 죽고, 남보다도 더 악취를 흩뿌리지. 내가 인갑답게 살려면 네가 죽어줘야 되거든. 쉽지?"



부자가 미움받는 이유는 부자이기 때문이다. 돈이 미움받는 이유는 그것이 돈이기 때문이다. 돈은 이야기로서의 성질을 잃어버린지 이미 오래다. 과거에 회화가 그랬던 것처럼. 돈은 돈을 위해 일하고 부는 스스로 방패막을 세우고 자신을 향해 올라오는 사다리를 걷어 차 버린다. 사다리 아래에서 사람들은 방황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로 인해 이 시스템을 향해 분노하기 시작한다. 씁쓸한 알레고리. 그러나 영화는 너무 추상적인 대사가 많고 장면들에 일관성이 부족해 그 알레고리를 제대로 느낄 수 없어 아쉽다.


마지막 장면, 20분에 걸쳐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립 장면에서 에릭은 자신의 왼손 한가운데를 스스로 총으로 쏜다. 구멍이 뚫리고 나자 에릭은 마침내 잃어버린 균형을 되찾은 것처럼 편안해진 표정이다. 어쩌면 그를 하루종일 짓눌렀던 심리적 압박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균형을 잃은 짝짝이 전립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수백억 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부나 자본주의 시스템이 아니라 그의 허리 아래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신체기관 말이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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