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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에 어린 왕을 두고 권력을 좌지우지했던 두 명의 왕후가 있었다. 명종의 섭정을 했던 문정왕후와 순조의 섭정을 했던 정순왕후.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도 만만치 않았지만 숙종은 결국 극복해냈다는 점에서 다르다. <후궁: 제왕의 첩>이 그리고 있는 시대는 문정왕후에 더 가까워 보인다. 영화가 허구임을 표방하고 있지만 많은 내용들은 문정왕후 섭정 하의 명종 집권기의 실화와 야화에서 따온 부분들이다.


예컨대 어린 시절에 집에 불을 질러 죽이려고 했던 이야기는 문정왕후가 중종대에 훗날 인종이 될 이복형을 죽이기 위해 불을 지른 것을 떠으로게 하고(당시 인종은 계비가 저리 날 미워하면 차라리 불에 타 죽겠다고 했다. 영화 속 정찬의 이미지와 비슷하다.), 계비가 왕에게 직접 수라를 대접해 독살하려 한 것은 인종이 문정왕후를 문안해 다과를 먹은 다음부터 심한 설사를 하고 끝내 사망한 것을 떠오르게 한다. 영화 속에서 계비가 왕의 임종을 보려고 소란을 부리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도 인종의 병세가 심각해지자 문정왕후가 독살설을 의심받는 상황에서 홀로 자책하며 궁 안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닌 것에서 참조한 것 같다. 결국 문정왕후는 인종이 즉위 9개월만에 갑작스럽게 죽은 후 계획대로 자신의 아들 명종을 왕위에 올리고 스스로 섭정을 한다. 당시에 인종비가 있었지만 서열상으로나 권력으로나 문정왕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영화 속에서 화연이 미망인이 된 뒤 죽음의 위기에 몰리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영화는 후반부로 가면서 화연에게 정순왕후의 이미지도 심어주었다. 중전이 된 화연은 홀로 두 임금의 임종을 맞이하는데 이 부분은 정조를 독살했다고 의심받고 있는 정순왕후가 홀로 정조의 임종을 맞은 것에서 차용한 것처럼 보인다. 정순왕후는 영조가 65세에 맞은 어린 색시였다.


어쨌든 영화 속의 권력구도처럼 조선 정치는 정쟁의 역사였고 훈구와 사림의 반목에서 이후 사림이 정권을 잡은 뒤로는 사림 내 동인-서인, 다시 노론-소론의 대결로 분열과 대립을 반복했다. <후궁: 제왕의 첩>은 의도했든 아니든 결과적으로는 문정왕후 시대에 조광조의 개혁 흐름을 무시하고 사림을 내친 을사사화로 시작해서 이후 사림이 권력을 잡고 250년 후 정조를 죽이고 또다른 섭정이 시작되는 정순왕후로 끝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림이 집권해 뭔가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처럼 보였던 그 시기가 조선시대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시기였다.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죽고 죽이는 권력관계를 긴 조선의 역사에 함축적으로 끼워넣을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영화는 미장센에 공을 많이 들였다. 화면이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잃지 않는다. 노출 장면이 많지만 특별히 야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은 아마도 미장센 덕분일 것이다. <장화, 홍련> <형사 Duelist> <음란서생> 등을 작업했던 조근현 미술감독의 솜씨인데 난잡한 장식은 최대한 배제해 간결하면서도 강렬하다. 특히 합궁방의 팔각형 이미지를 보면 마치 연못에 갇힌 물고기가 떠오르는데 궁녀들과 내시들이 문틈으로 들여다보며 참견하는 가운데 짐승처럼 씨를 뿌려야 했던 조선 왕의 심리상태가 그대로 담긴 공간이다. 그만큼 미술에 공을 많이 들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조여정, 김동욱, 김민준 세 사람의 연기 앙상블도 괜찮았고 조연들도 화려하게 캐스팅됐다. 특히 오현경과 오지혜 부녀가 동시에 나오는 영화는 처음인 것 같다. 조여정은 <방자전>에서 이미 보여준 섹시한 몸매 외에도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이 표정으로도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김동욱은 한 여자에게 마음을 뺏겨 시종일관 흔들리면서도 약한 마음을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 왕 역할에 적역이었다. 김민준은 터프했던 지금까지 역할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내시로서 변화를 보여주었는데 뭔가 언밸런스한 느낌으로 긴장을 주기에는 괜찮은 캐스팅이었다. 그나저나 중간에 고자를 증명하기 위해 바지를 벗는 장면이 있는데 내시의 '흉측한 물건'을 어떻게 고증한 건지 궁금하긴 하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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