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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들>을 보고 극장을 나오니 세상이 작아보였다. 사람들이 작아보이고 건물이 좁아보였다. 마치 소인국에 온 것 같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 깨달았다. 내가 소인국에 온 것이 아니라 내가 다녀온 곳이 거인국이었음을.


사람들이 영화를 좋아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영화가 판타지이기 때문이고 그런 면에서 <도둑들>은 잘 만든 멋진 판타지다. 10명의 개성 강한 캐릭터가 어우러진 하모니. 아마도 배우들에 대한 환상이 있다면 영화 속으로 더 빠져들 것이다. 짧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었고 캐릭터들이 내뿜는 아우라가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한국영화가 만들어낸 멋진 판타지 <도둑들>을 보고 느낀 점 몇 가지를 적어본다.



1. 크레딧. 이 영화는 한국영화에서 정말 오랜만에 투자자 크레딧으로 시작하지 않는 영화다. 사실 그동안 정말 불만이 많았다. 투자책임 아무개, 제작투자 아무개 이렇게 족보도 없는 스탭(?)들이 대형 배급사의 고위직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한국영화들의 첫 오프닝 크레딧을 장식해왔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에서도 항상 투자자의 이름이 먼저 올라갔다. 그런데 <도둑들>은 다르다. 배급사와 제작사의 트레일러가 나온 뒤 곧바로 주연 배우들을 소개하는 타이틀 시퀀스로 이어진다. 그뒤 감독 이름이 나오고 영화가 시작한다. 엔딩에서도 주연 배우의 이름이 먼저 나오고 그 뒤로 연출과 촬영 스탭이 나온다. 최동훈의 파워 덕분인지 제작자인 안수현 프로듀서의 공인지 뒷얘기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영화의 크레딧은 이처럼 영화를 만든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 헐리우드에서는 대형 배급사의 임직원 이름을 크레딧에 올리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2. 오프닝. 대부분의 한국영화는 오프닝이 별로였다. 그냥 대충 CG를 이용해서 제목을 나타내는 정도였다. 아마도 한국에서 오프닝에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감독은 박찬욱 감독일 것이다. <박쥐>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올드보이> 등은 오프닝 시퀀스 만으로도 이미 작품이다. 최동훈을 박찬욱과 비교하기에는 스타일이 많이 다르지만 최동훈 감독도 오프닝에 꽤 신경을 쓰는 감독이고 <도둑들>의 오프닝 나쁘지는 않은 편이다. 매스메스에이지라는 광고 프로덕션에서 만들었는데, 흰 배경에 사선으로 선이 오르내리면서 그 사이로 인물의 이미지와 이름이 쓰여진다. 사실 이 아이디어는 헐리우드 영화에서 따온 것이긴 하다. (어떤 영화였는지 찾아보려니 어렴풋한데 나쁜 기억력을 탓해야할까...)


어쨌든 이런 느낌의 오프닝 시퀀스는 사실 좀더 넓게 보면 히치콕과 그의 파트너였던 솔 바스의 영향력 하에 있는 것이다. 히치콕은 "영화가 줄 수 있는 놀라움과 재미는 첫 장면에서 거의 결정된다"고 말하면서 항상 오프닝 시퀀스를 강조했는데 솔 바스가 작업한 <싸이코> <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오프닝은 간결한 선을 이용해 영화의 느낌을 짧은 시간 안에 함축적으로 표현했었다.



3. 부산. 개인적으로 <도둑들>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이 뭐냐고 묻는다면 단연 부산에서의 벽타기 와이어 액션씬을 꼽고 싶다. 사실 홍콩이나 마카오 카지노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재미있긴 하지만 예상했던 수준이었다. 그러나 부산의 낡은 상가 건물에서 찍은 액션씬은 정말 쿨하고 또 리얼하다. 에어컨 실외기가 떨어지고 발코니가 무너지는 와중에 마카오 박이 줄을 타고 총을 쏜다. 대역 없이 대부분 실제 연기했다고 하는데 날것 그대로의 어쿠스틱한 액션이 살아 있다. 아마도 그곳이 홍콩이었다면 느낌이 달랐겠지만 그 장소가 부산이었기에 더 신선했고 더 몰입할 수 있었다. 다른 영화 속 부산에서 이렇게 실감나는 액션을 본 적 있던가.



4. 전지현. 예니콜 혹은 예복희로 등장하는 그녀는 단연 <도둑들>의 히로인이다. 늘 와이어를 달고 살고 검정색의 캣우먼 스타일을 즐기는 그녀는 남자들 사이에서도 발랄하고 당당하다. 전지현이 대사를 치는 스킬이 약간 어색하긴 하지만 그녀가 아니었으면 <도둑들>은 전혀 성적 긴장감이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임팩트 있는 대사들은 모두 예니콜의 입에서 나온 것 같다. "이렇게 생기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어마어마한 썅년이야" 등등. 거침없이 내뱉는 말들이 항상 긴장감을 유발한다. 실제 전지현과 극중 예니콜의 이미지가 섞이면서 대사들이 더 맛깔나게 들린다.



5. 이신제. <도둑들>에는 두 명의 특별출연이 있다. 바로 이신제와 신하균. 신하균이야 분량이 워낙 적어서 특별출연처럼 보이지만 이신제는 주연들과 동급이고 오히려 웬만한 주연들보다도 더 많이 나온다. 그런데 왜 특별출연이라는 타이틀을 붙였을까. 말레이시아에서 전지현 만큼 인기가 있는 그녀를 위한 제작진의 배려라고 하는데 사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국영화에는 이런 방식이 너무 심하다. 우정출연이니 특별출연이니 하는 예외가 너무 많다. 분량 적다고 이 사람 저 사람 사정 다 봐주면 누가 조연을 하려고 할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신제는 멋졌다. 눈빛이 살아 있다. 웨이홍을 잡기 위해 마카오 박 패거리에 잠입한 스파이 경찰 역을 맡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6. 최동훈. 영화아카데미 출신으로 단 4편의 필모그래피 만으로 자신만의 색깔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감독. 영화 4편의 공통점은 모든 영화가 완벽히 감독의 통제 하에 있는 영화처럼 보인다는 것. 즉 감독의 취향과 감독이 캐릭터를 보는 관점이 고스란히 영화에 묻어 있다. 예전에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주관이 뚜렷하고 자신이 아는 것을 확실하게 정리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머리가 좋은 것은 둘째치고 배우들에게서 그들만의 매력을 이토록 잘 끌어낼 수 있는 감독도 드물다.


홍콩을 배경으로 임달화, 증국상 등 몇몇 홍콩 배우들도 출연했기에 <도둑들>에 홍콩 느와르의 감성이 묻어 있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 언젠가 헐리우드에서 <오션스 일레븐>을 능가하는 케이퍼 무비를 만들어주길 기대해본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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