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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보기 전에 <배트맨 비긴즈>를 다시 봤습니다. 배트맨 시리즈와 크리스토퍼 놀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대단하죠. 이 어두침침한 액션 히어로가 영화의 역사를 바꿔놓았으니까요. 영화 찍다가 배우가 죽는가 하면 극장에서 총기난사가 일어날 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습니다. 모두들 아는 이야기 빼놓고, <배트맨 비긴즈> 다시 보면서 느꼈던 점들 몇 가지만 적어볼게요.



경계의 영화


<배트맨 비긴즈>를 다시 보면서 이 영화는 경계에 관한 영화라고 느꼈습니다. 복수와 정의의 경계, 가면과 실제 얼굴의 경계, 그리고 선과 악의 경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브루스 웨인은 복수를 위해 총을 들고 법정으로 향합니다. 마치 <추적자>의 백홍석처럼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 살인자를 죽이고 나자 갈등합니다. 사적 복수를 하려고 했던 자신의 행동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더 강해지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그는 복수와 정의의 경계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 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정의라는 더 큰 뜻으로 자신의 복수심을 위장합니다. 그것을 간파하는 것은 브루스가 어린 시절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여인 레이첼(케이티 홈스)입니다. 레이첼은 브루스가 자신을 구해준 배트맨인걸 알고 난 뒤 "아직 내가 찾는 남자는 더 뒤에 있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자신의 탓으로 생각하고 그에 대한 복수심으로 배트맨이 된 브루스 웨인은 태생적으로 경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속에서 크레인 박사(킬리언 머피)가 칼 융의 원형을 언급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배트맨에게 가스를 뿌리자 배트맨은 어린 시절부터 느껴왔던 박쥐에 대한 공포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낍니다. 완전히 극복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의 무의식에는 아직 그 우물 속에서 느꼈던 공포가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크레인이 가스가 뇌에 작용하는 원리를 융의 원형에 빗대 설명합니다. 그런데 융에게 무의식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문화적인 것이었습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개인적인 억압 속에서 찾으려 했다면 융은 신화, 민담, 종교처럼 인류 공통의 관념의 원형에서 무의식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장면에서 크레인이 프로이트가 아닌 칼 융을 언급한 것은 좀 색다르게 보입니다. 감독은 배트맨의 개인적인 트라우마 보다는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과정이 인류가 보편적으로 느껴왔던 트라우마에 더 가깝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영화의 다른 면을 보면 분명히 프로이트보다 칼 융을 언급한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칼 융의 원형은 시간, 공간, 문화나 인종의 차이와 관계없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인류의 가장 원초적인 행동유형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사전경험이 없이도 어둠을 무서워하고, 고통을 피하려 하고, 어머니를 반가워합니다. 마치 우물 속에 빠진 어린 브루스 웨인이 그전까지 본 적도 없었던 박쥐에 공포심을 느끼는 것처럼요. 원형은 순수하고 거짓 없는 성질이어서 인간은 그 의미를 의식하지 못합니다.


또 대부분의 슈퍼 히어로들이 갖고 있는 특성이지만, 융의 개념 중 그림자와 페르소나, 그리고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배트맨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림자라는 개념은 반사회적인 욕망을 지닌 인간의 본성으로 통제력을 잃으면 어떻게 행동할지 모른다고 느끼는 내적인 공포이며, 페르소나는 이를 위장해 관습과 사회적 연출에 응답하는 가면입니다. 즉, 그림자가 내적인 자아라면 페르소나는 공적인 자아입니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각각 남성의 여성성과 여성의 남성성을 뜻하지만 여기에서 리비도에 대한 융의 해석처럼 성적인 면을 거세하고 본다면, 아니마가 인간 내면의 비합리적이고 몽상적인 부분이고 아니무스는 현실적이고 계획적인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개의 결합이 하나의 영혼을 만듭니다. 이런 융의 개념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이 바로 밤의 배트맨과 낮의 브루스 웨인이겠네요. 실제로 칼 융은 세 살 때 동굴 속에 갇힌 꿈을 꾼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꿈을 자신의 무의식으로 받아들여 진로를 정할때 참조했다고 하는데요. 이쯤되면 배트맨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에서도 칼 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칼 융처럼 브루스 웨인도 동굴 속에서 자신의 진로를 발견한 것이죠.



 


 


시스템이 아닌 개인


한 사람의 선인이 부패한 도시를 살릴 수 있을까요? <배트맨 비긴즈>는 부패한 고담시를 완전히 멸망시키려는 라스 알굴(리암 니슨)에 대항해 고담시는 다시 살릴 수 있다면서 희망의 해독제를 뿌리려고 하는 한 남자의 고군분투를 그리고 있는 영화입니다. 한편으로는 참 무모해보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래서 참 대책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희망이라는 것이 결국 크레인 박사가 내뿜는 가스처럼 인간의 약한 곳만을 공격해 공포에 질려 취하게 만들 테니까요. 무슨 말이냐고요?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닌 개인의 의지로 생명연장시키려고 하는 변화가 참 공허하게 들린다는 말입니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아요. 계속해서 인공적인 호흡기에 유지해야 합니다. 고담시에 늘 배트맨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라스 알굴은 후반부에 브루스 웨인을 만나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경제를 통해 이 도시를 없애려고 했다. 하지만 당신 아버지 같은 사람이 나타나 계획이 실패했다." 자본주의에 관한 풍자가 담긴 이 대사는 참 흥미롭습니다. 도시를 망하게 하려고 경제 시스템을 주입시켰다. 그랬더니 예상대로 도시가 쓰레기가 되었다. 그런데 억만장자이면서도 심성이 착한 사람이 나타나 선행을 베풀면서 구휼에 힘쓰는 바람에 사람들이 가난해졌으면서도 희망을 믿게 됐다는 겁니다. 저는 이것이 참 미국적인 발상이라고 봅니다. 개인주의적인 미국인들은 자신과 가족이 스스로 잘 해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자경단이 등장하는 것도 참 미국적이죠.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 거죠. 정치인과 기업인들은 불법을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자유롭게 알아서 뭘하든 신경쓰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승자독식이고, 부익부 빈익빈을 통해 부가 한곳으로 집중됩니다. 그런데 강제적 세금보다는 자발적 기부를 통해 자산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미국사회입니다. 고담시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불법까지 만연한 곳이죠. 고담시민들이 시스템을 바꾸겠다고 나서지 않는 한 그들은 계속해서 배트맨 마크를 하늘로 쏘아올려야 할 것입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우수한 잠재력을 가진 사람이 완전히 자기 자신을 지배하고 자신의 가치를 창조한 뒤 초인으로 나타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를 '그리스도의 영혼을 가진 카이사르'라고 묘사했습니다. 한 마디로 착한 전쟁영웅이죠. 초인의 개념은 나치에 의해 왜곡되긴 했지만, 어떻게 보면 미국형 슈퍼히어로, 그중에서도 배트맨과 참 유사합니다. <배트맨 비긴즈>는 초인이 어떻게 완전히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데까지 나아갔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그는 무술을 연마하고 정신력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초인이 필요없는 사회가 더 행복한 사회 아닐까요? 누군가 엄청나게 뛰어난 존재가 있으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열등감을 느끼는 존재들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영화속에서 레이첼은 쑥대밭이 된 고담시에서 한 남자 아이를 보호합니다. 그들이 좀비처럼 변해버린 사람들에게 위협을 당할 때 배트맨이 하늘에서 내려와 둘을 데려갑니다. 그 장면이 왜 익숙하게 느껴지나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셋이 한 화면에 잡힌 그 장면에서 가족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역시 헐리우드 영화답게 감독은 배트맨에게도 가족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물론 그녀의 운명은 속편을 통해 알려져 있고, 결국 이들은 가족이 아닌 가족의 원형으로 남겠지만요.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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