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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과 알랭 드 보통은 사실 큰 공통점이 없어보인다. 이현은 꿈꾸는 듯 달콤하고 리얼한 글을 써온 한국 작가이고, 알랭은 자전적인 소재에 바탕을 둔 에세이 스타일의 글을 써온 스위스 태생 영국 작가이다.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둘 다 로맨스에 기초한 도회적인 글을 쓰는 작가라는 것 정도일까?


그런데 둘이 함께 사랑을 주제로 소설을 발표하니 두 사람의 전혀 다른 스타일은 어색하다기보다는 마치 서로 다른 피부색을 가진 남녀가 포옹을 하는 것처럼 어울린다. 이질적이지만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가 연결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리고 두 책 모두 제목과 달리 '낭만적이지 않다'는 공통점도 있다.


[연인들]은 전형적인 스토리 위주의 소설이고, [한 남자]는 스토리에 역사, 심리 등을 녹인 에세이 형식의 소설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두 이야기가 만날 지점이 있었는데도 전혀 만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연인들]에서 민아가 캠브리지로 떠났을 때 그곳에서 클레아라는 친구를 사귀고 그녀에게 트렌치코트를 선물로 준다. [한 남자]를 읽으면서 클레아가 등장하기를 기대했지만 끝내 나오지 않았다. 아쉽다.


각각 서울과 런던에서 만난 두 커플. 한 커플은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려 하고 또 한 커플은 사랑이 이루어진 다음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느 쪽이 해피엔딩일까?




사랑의 기초: 연인들 The Foundation of Love_ Lovers



준호와 민아는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커플이다. 두 사람은 동창이 주선한 소개팅으로 만났다. 그들은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은 공통점을 발견했고, 그래서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수줍게 모텔을 전전하며 서투른 연애에 흥분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은 멀어졌지만 둘다 너무 착한 나머지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 이별통보를 미루고 있었다.


이현의 맛깔스러운 비유와 편안한 문체로 두 사람이 같은 시대를 살아온 배경과 만날 수 밖에 없었던 과정과 그리고 이대로 사랑이 계속될 수 없는 이유를 사소하지만 복잡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준호와 민아는 지금 그들의 선택을 먼훗날 후회하게 될까? 작가 이현은 그들이 나누는 서툰 사랑의 방식이 제목처럼 '사랑의 기초'여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것은 첫사랑도 아니고 마지막 사랑도 아니고 바로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랑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깨닫고 또 스스로 위로받길 바란다. 이현은 준호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거듭한 실수와 자신의 헛된 자만심 때문에 결국은 이렇게 별볼일없는 중년이 되고 만 것에 대해, 어린 날 그를 믿어주었던 모든 이들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또 세상의 지혜를 터득한 권위 있는 누군가가 너는 지금 모습 그대로 충분히 훌륭하니 더이상 자신의 존엄성을 검증받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길 간절히 바랐다."


초반부에서 사랑의 순수함에 대해 걸었던 기대와 달리 소설은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헤어짐을 암시한다.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던 영국(혹은 어디라도 좋았던)으로 떠난 민아와 그녀를 붙잡지 않은 준호. 그들의 마음이 멀어지는 계기는 작가도 잘 설명하지 못하는 아주 사소한 것들의 누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헤어지는 순간의 그 느낌을 잘 포착해낸다. 아련하게 이미 떠나버린 그것, 그래서 다시 잡으려고 해도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 없는 그것에 관해서다. 이현은 아쉬운 그들의 사랑을 경쾌하게 마무리한다. "응, 안녕. 처음 만난 순간에도 헤어지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안녕'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그들은 불현듯 깨달았다. 각자의 길을 향해 뒤돌아서, 서로의 뒤통수 반대 방향으로 한 발짝 내디딘 것과 거의 동시였다. 그것은 불완전한 인간들끼리 나눌 수 있는 아마도 가장 완벽한 작별인사였다."


준호와 민아는 지금 대한민국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아주 평범한 우리 시대 20대 후반의 사랑 그 모습 그대로다. 그들이 서로를 발견하고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는 과정은 평범해서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물론 평범한 이야기를 평범하지 않게 읽히게 만드는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담긴 표현들이 군데군데 빛을 발한다. "다른 곳에서 발생해 서로 겹쳐졌던 두 개의 포물선은 이제 다시 제각각의 완만한 곡선을 그려갈 것이다. 그렇다고, 허공에서 포개졌던 한 순간이 기적이 아니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사랑의 기초: 한 남자 The Foundation of Love_ A Man's Story



런던에 사는 벤은 부인 엘로이즈와 딸 아이와 함께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결혼하기 전 그들의 사랑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알랭은 설명해주지 않는다. 단지 모든 해피엔딩으로부터 소설은 시작한다. 엘로이즈가 조용하고 부드럽지만 내면이 강한 여성인 반면 벤은 예민한 몽상가이면서 충동적인 남성이다. 벤은 엘로이즈의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어른스러운 면을 못견뎌한다. 그래서 이 모든 현실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있다. 18세기 부르주아가 만든 결혼관에 적응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21세기 중년 남성으로서 그는 방황하고 또 방황한다.


딸 아이의 정서적인 교육방식에 대해 늘 고민하는 벤은 한편으로는 가정을 버리는 상상에 사로잡힌다.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상상이다. "자본주의의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 우리는 낭만적 사랑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며 벤은 자신에게 주어진 본능으로 새로운 사랑을 찾아나선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는 가정의 소중함을 알고 그것을 지키려는 남자다. 상상이 끝나면 곧바로 다시 딸 아이에게 다가간다. 중년이 되어버린 그에게 아주 소중했지만 죄책감의 근원이 된 한 번의 외도 후에 그는 좀더 어른스러워지고 책임감이 강해진 자신을 발견한다.


"사회적 관계의 모순 중 하나는, 우리가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보다 좋아하지도 않는 이들에게 훨씬 더 잘해주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정서는 시니컬하다. 그래서 벤은 괴로워한다. 그가 괴로워하는 대상은 이런 것들이다. "채워질 수 없는 정서적 욕구, 부조리하지만 억제할 수 없는 욕정과 그로 인한 수치심, 더 좋은 아빠가 아니라는 죄책감, 언젠가 집을 떠나 버릴 아이들에 대한 서늘한 예감 - 그들은 벤과 엘로이즈에게서 생명의 피를 다 빨아먹은 뒤에 조용하고 음산해진 과거 속의 집을 어쩌다 한 번씩 의무감으로 들르곤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벤은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까?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오르는 마지막 장면은 다소 작위적이지만 한편으로는 깔끔한 엔딩으로서 근사하다.


낭만적인 연애와 결혼이라는 관념이 생겨난 유래, 자본주의를 만든 부르주아가 지금의 결혼관을 왜 필요로 하게 되었는지, 일 년에 여섯 번 섹스하는 부부가 어떻게 행복한 가정을 유지할 수 있는지 등 다른 알랭의 글들처럼 그의 자전적인 내용이 담긴 이 소설은 많은 부부들과 특히 남자들에게 뜨끔한 상황을 재현하면서 공감을 얻을 것이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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