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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BBC는 현생 인류의 선조인 호모 에렉투스와는 전혀 다른 고생인류의 화석이 발굴됐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한국 언론에도 자세히 인용됐던 그 기사를 통해 약 200만 년 전 인간은 한 종만 있던 것이 아니라 호모 루돌펜시스, 호모 하빌리스 등 최소한 3개의 다른 종이 공존했음이 밝혀졌다. 또 10만 년 전 출현한 네안데르탈인과 3만5천 년 전 등장한 크로마뇽인은 진화의 과정이 아니라 개체 수가 많고 지적으로 우월했던 크로마뇽인에 의해 네안데르탈인이 멸종된 결과라는 것은 고고학계의 학설로 자리 잡았다. 즉 현생 인류의 탄생 과정에는 좋든 싫든 결국 다른 종을 말살한 ‘제노사이드’가 있었던 것이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탄생한 지도 약 5만 년이 흘렀다. 그동안 인간은 돌을 갈아 사용하는 것으로 시작해 화성으로 로봇을 보내는 문명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대학살의 역사가 계속됐으며 권력을 통해 지배하려는 욕구가 들끓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잘 이용해 체계화한 것이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그러나 인간은 지금도 핵폭탄 하나면 멸망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종이다. 만약 우리를 대체할 새로운 종이 탄생한다면 현생 인류는 어떻게 될까?


일본 작가인 다카노 가즈아키의 소설 [제노사이드]는 현생 인류에서 진화한 새로운 종이 탄생했다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해 제법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인간이라는 종을 관찰한다. 마치 인간이 침팬지의 습성을 관찰하는 것처럼 제3자의 입장에서 인간과 인간 사회를 관찰해 그들의 습성을 묘사한다. 65억 개체가 지구상에 놀랄 만할 정도로 번성한 호모 사피엔스. 소설은 그들이 다른 어떤 종도 해내지 못한 번성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폭력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다른 종을 두려워하고 없애려고 하는 방식으로 진화해 왔으며 이것이 인간 내부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종교, 인종, 정치, 경제 등에 따라 구분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이 자행되어 왔다. 그 증거로 소설은 콩고, 르완다에서의 아프리카 대전, 나치의 비극, 일본의 난징 대학살, 조선인 학살, 미국의 이라크 침공 등 끊이지 않는 인류의 잔혹사를 제시하고 있다.


소설에서 '제노사이드'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쓰였다. 하나는 인류가 지금까지 자행해온 수많은 종족말살의 증거들을 지칭하는 단어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 막 새롭게 태어난 진화된 생명체를 보고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껴 그를 말살하려는 새로운 작전이다. 그러나 성선설과 성악설이 오래전부터 공존해왔듯이 인간에게 악한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선한 인성이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무기가 된다고 말한다. 시니컬한 인간 혐오주의자로 나오는 하이즈먼 박사는 "인간은 제노사이드를 자행하는 유일한 생물"이라고 말하며 새로운 종의 탄생에 의한 인류 멸망을 예언하는 리포트를 내놓는다. 소설 전체를 지탱하는 이론이 되는 그의 리포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인간에게서 선한 모습을 찾고 싶은 일본인(겐토)과 미국인(루벤스)에 의해 발견된다.


소설은 크게 세 축으로 전개된다. 그린베레 출신의 민간 군사기업 용병으로 콩고에 출현한 새로운 종을 제거 혹은 보호하기 위해 투입된 가디언 혹은 네메시스 작전 팀의 리더 조너선 예거, 10만 명의 인류를 살릴 희귀병 치료약을 개발하는 일본인 대학원생 고가 겐토, 그리고 미국 정부의 슈나이더 연구소에 소속되어 네메시스 작전을 지휘하는 아서 루벤스다. 콩고, 일본, 미국이라는 전혀 다른 공간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이 촘촘하게 엮여서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세 인물에 맞서 그레고리 번즈로 대표되는 미국 정부는 막강한 힘을 무기로 신인류를 말살하려 하고, CIA, NSA, 휴민트, 일본경찰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기관을 통해 예거 일행과 겐토를 쫓는다. 예거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 겐토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른 생면부지의 환자를 위해서 온힘을 다해 사투를 벌이고, 하이즈먼 박사를 숭배하는 루벤스는 신인류를 살리기 위해 (혹은 공격받는 신인류가 난폭하게 변해 인간을 멸종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몰래 예거와 겐토를 돕는다. 소설은 한 순간도 놓칠세라 이들의 행적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소설의 프롤로그는 의외로 그레고리 번즈 미국 대통령으로 시작한다. 백악관에 정보기관 수뇌부가 모인 회의에서 신종 생물 출현에 관한 보고가 올라오지만 번즈는 이를 하찮은 것으로 취급한다. 그에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더 골치 아픈 전쟁이 있기 때문이다. 대량학살무기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라크 공격을 감행한 그는 분명히 조지 부시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를 특별한 악인이 아니라 그저 보통의 인간으로 그리고 있다. 자신과 다른 종교와 문명 속에 있는 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고서도 자신은 자신이 믿는 종교에 의해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는 권력자. 그를 가까이서 관찰하는 루벤스는 그에게서 보통 인간의 잠재된 폭력성을 본다. 그것은 그가 쟁취해낸 권력이 만들어낸 것이다. 작가는 그가 '뉴클리어 풋볼'이라는 가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한 명의 불완전한 인간에게 핵폭탄을 발사할 권리가 주어졌는데 그를 견제할 장치는 유명무실한 시스템의 불완전성이 결국 인간의 잠재된 본성을 대변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있다.


인간은 지구상에 현존하는 다른 종보다 지적으로 뛰어날지 몰라도 도덕적 우월성은 검증되지 않았다. 인간이 지구 곳곳에서 현재진행형으로 학살을 자행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명령을 내리는 자가 현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 발짝 떨어져 있기 때문에 죄책감의 충격에서 멀어져 있다. 언론에서 학살 현장을 다룬 기사는 문명 세계에서 엽기적인 취향을 부추기는 오락처럼 소비된다. 그들 스스로가 학살자들과 똑같은 생물종이면서도 자기만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입으로만 세계 평화를 부르짖는 것이다. 또 선진국들이 공적개발 원조라며 아프리카를 지원하는 이유는 자원의 확보와 소비시장 확대를 위한 것이고, 난치병 치료약 개발도 이익이 우선시되기 때문에 제약사들은 희귀병 약을 개발하지도 않는다.


작가는 이 같은 비도덕성을 극복해 순수하게 남을 돕는 이타적인 인간을 진화한 생명체의 일종이라고 말하고 있다. 위기에 빠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일본 지하철에서 목숨을 걸고 일본인을 구한 한국인 이수현이 작가에게 모티프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겐토의 조력자로 이정훈이라는 한국인 유학생 연구원을 등장시켜 그가 이수현처럼 인류애를 발휘해 멀리 포르투갈에 있는 아이를 살리는데 큰 역할을 부여한다. 고가 겐토와 이정훈처럼 아무 담보도 없이 자기 목숨을 걸고 남을 구하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이긴 하지만 소설 속 하이즈먼 박사에 따르면 "일종의 진화한 인간"이다.


[제노사이드] 일본판 표지


인간의 진화를 다룬 작품인 만큼 소설이 묘사하고 있는 다음 세대의 인류가 무척 궁금하다. 소설 속 진화된 인류의 특성은 두 가지다. 탁월한 지적인 능력과 우월한 도덕성. 작가는 새로운 종의 지능을 현 인류가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침팬지가 인간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상상하기 힘든 것과 같다. 인간의 사고 자체를 뛰어넘기 때문에 인간은 새로운 종이 어떤 생각을 하는 지 전혀 눈치 챌 수 없다. 소설은 누스 혹은 아키리라 불리는 3살 난 신인류를 이렇게 묘사한다. 전두부가 튀어나오고, 기분 나쁜 고양이 눈을 하고 있으며, 몸에 비해 얼굴이 크고, 인간의 언어를 쉽게 습득하지만 정작 말하기를 배우는 것은 느리다. 그러나 자신들끼리는 1차원적인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2차원의 언어로 대화하고, 바람의 세기 같은 불확실한 자연 현상을 예측해내고, 수학능력이 뛰어나 소인수분해를 간단하게 풀고, 군사용까지 포함한 암호의 알고리듬을 해독하며, 위성영상을 해킹해 공작을 방해하고, 심지어 감쪽같이 사이버 전쟁을 일으킨다. 인간이 지금까지 이룩해놓은 문명을 신인류 아이가 이해하고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 또 진화한 종은 새로운 감각이 발달되어 공감 능력이 다르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침팬지에 대해 느끼는 도덕적 우월성과도 같은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인간은 참으로 단순하고 쓸데없이 폭력적인 존재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서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제노사이드]는 경이로운 소설이다. 680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길지만 스릴러 형식을 취해 지루할 틈이 없고, 인간의 선과 악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품었으면서도 주장하려는 바가 명확해 흡입력이 강하다. 할리우드에서 각본가로 5년 동안 일했다는 다카노 가즈아키는 [제노사이드]를 집필하는데 6년이 걸렸다고 한다. 9개월 동안은 자료조사만 했다고 하는데 덕분에 전문적인 깊이를 더했고 이야기 구성이 촘촘해 밀도가 높다. 백악관 회의 같은 미국 행정부 내부 모습부터 군사적, 과학적 지식까지 현실을 그대로 차용하고 생생하게 묘사해 마치 누스의 존재가 정말 어딘가에 있을 법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또 소설 속에 '폐포 상피 세포 경화증'이라는 가상의 난치병과 '기프트'라는 프로그램을 통한 가상의 치료법이 등장하는데 워낙 자세하게 설명해 마치 실제로 있는 병처럼 보였다. 특히 이 병이 새로운 종인 누스와 엠마의 유전자 검사를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는 설정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극적 구성의 치밀함에 감탄했다. 한편으로는 리간드, 수용체, 아고니스트 등 이렇게까지 전문적인 생물학과 약학의 실험 과정을 자세하게 쓸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비전공자인 작가의 끈질긴 탐구로 인해 이야기가 더 설득력을 얻은 것은 분명하다. 전작인 [13계단]을 통해서는 법제도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작가의 집념이 느껴진다. 아마도 번역자는 전문용어 때문에 고생 꽤나 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스토리가 마치 영화처럼 전개되다 보니 중간에 붕 뜨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소년 병사 오네카와 시뮬레이션 비행 게임 조종사 로크웰이 그 예다. 영화에서라면 잠깐 등장하고 편집과정에서 사라질 캐릭터지만 소설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잠깐 들어왔다 사라지니 영 어색하다. 또 하나는 고가 겐토의 아버지의 죽음에 관해서다. 소설은 마지막까지 그가 왜 죽어야했는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이야기를 급하게 끝낸다는 인상을 받는데 중반부까지 그랬던 것처럼 좀더 친절하게 끈기를 유지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소설을 다 읽은 후에도 새로운 종과 주인공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참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종과 인류는 공존할 수 있을까? 소설의 엔딩에는 나오지 않지만 작가는 중간마다 힌트를 던져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결국 새로이 탄생한 종은 인간을 멸망시키려 할 것이다. 현생 인류와 다음 생애의 종의 생태적 지위가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인간이 있는 한 그들의 생식 장소는 확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본 인류는 같은 종끼리 살육을 저지르고 과학기술로 환경을 파괴하는 위험한 하등동물 아니던가.


새로운 종에 의한 인류의 멸망은 SF에서 곧잘 있던 소재였다. 외계인의 침입이나 신인류의 탄생 같은 방식이었다. 그런데 [제노사이드]가 특별한 점은 인간보다 우월한 새로운 종의 신비함을 드러내는 데만 골몰한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열등한 인간의 본성을 고찰하는데 더 정성을 쏟았다는 점이다. 즉, 신인류에 대처하는 인간의 폭력성을 통해 인류가 왜 하등동물일 수밖에 없는지를 역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PS)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겐토가 열어 본 아버지의 메일 내용은 참 뭉클했다. 이것은 아마도 진화한 인류만이 주고받을 수 있는 질문과 대답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구나.

아버지가 부탁한 연구를 다 했느냐?

너는 아이들의 생명을 구했느냐?

너는 인류에게 도움이 되었느냐?

미지의 세계로의 도전을 거리낌 없이 즐겼느냐?

자연이 환상적인 속살을 너에게만 보여 주었느냐?

그리고 너는, 어떤 예술품에서조차 얻지 못하는 감동을 맛보았느냐?

(660페이지)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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