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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두근거려 잠을 못 자요. 자꾸만 생각나서 계속 확인하게 돼요."
비트코인 투자자들의 증상은 사랑에 빠진 이들과 비슷하다. 눈앞에 아른거리지만 잡히지 않는다. 알랭 드 보통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진다. 튤립부터 비트코인까지 버블의 역사도 그렇다. 잘 모르니까 환상을 쌓아간다. 심하면 집착으로 이어진다. 사랑과 집착은 한끝 차이다. '가즈아'라는 외침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마이클 무어 감독은 '자본주의' 역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부제를 '러브스토리'라고 달았는데 기실 돈의 속성이 사랑과 유사하다. 사랑(돈)에 배신당해본 사람들은 사랑(돈)을 믿지 못하지만 사랑(돈)을 믿는 사람들은 사랑(돈)에 뛰어든다. 하지만 사랑도 돈도 결국 변덕 심한 사람의 일이라 영원한 사랑은 가상현실 속에만 존재한다. 비트코인 역시 그렇다.
시작은 아름다웠다. 2007년 금융위기로 각국의 화폐 가치가 출렁거리자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세계 공용화폐가 필요하다며 사토시 나카모토(라고 주장하는 누군가)가 2009년 내놓은 암호화폐가 비트코인이다. 취지를 따르자면 비트코인은 어떤 화폐보다 안정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최근 비트코인보다 더 가치가 불안정한 화폐는 국가 부도 위기에 몰린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정도를 제외하면 찾기 힘들다(베네수엘라는 국가 차원에서 지하자원과 연동되는 암호화폐 '페트로'를 내놓았지만 전망은 밝지 않다).
비트코인 투자 열풍은 유독 한국에서, 특히 젊은 층에서 강하게 불고 있다.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 빗썸이 지난달 이용자 40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20대와 30대가 각각 29%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40대 20%, 50대 12%였다). "비트코인은 등록금 걸고 하는 도박"이라는 어느 네티즌의 지적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하지만 젊은 층에만 비난의 화살을 돌릴 것은 아니다. 부모 세대 역시 젊을 때 부동산 투기 환상을 쫓지 않았나. "그때 강남 아파트 살 걸"하는 아빠의 푸념을 듣고 자란 아이들이 지금 20대가 된 것이니 말이다. 최근 신한은행은 20대가 서울서 집 사려면 월급을 한푼도 안 쓰고 18년 간 모아야 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어차피 취직도 안 되고 내 집 마련은 판타지일 뿐이니 돈 벌 방법이 있다면 뭐든 해보자는 심리가 청춘들을 비트코인으로 이끌었다는 분석이 더 현실적이다.
암호화폐는 네트워크 참가자들의 신뢰를 기반으로 운영된다. 실질적인 가치는 0에 가깝지만 앞으로 실물화폐를 얼마나 대체하느냐에 따라 잠재력은 무한대다. 당장 비트코인 거래대금이 조 단위로 늘며 코스닥 시장 거래대금이 줄어드는 것만 봐도 암호화폐가 여러 분야에서 제로섬 게임을 펼칠 것을 예상해볼 수 있다.
비트코인을 향한 구애는 죄가 없다. 돈을 향한 간절한 러브스토리는 자본주의의 속성이니까. 문제는 시세를 조종하려는 세력이 곳곳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고등학생이 벌인 비트코인 플래티넘 하드포크(화폐분할) 사기극으로 시총 50조원이 증발되는가 하면 텔레그램으로 펌핑앤덤핑(일괄매수 후 매도)하는 작전세력이 등장했다는 정황이 포착되기도 했다. 정부가 뒤늦게 규제의 칼을 빼들었는데 이것이 득일지 실일지는 두고봐야 한다.
산업혁명 이래 자산 버블은 반복돼 왔다. 버블은 후유증을 남기지만 한편으로는 시대 변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된다. 18세기 미시시피 버블 붕괴는 프랑스혁명으로 이어졌고, 골드러시 이후엔 미국 서부가 급속하게 성장했으며, 닷컴버블이 꺼지고 나선 인터넷 세상이 왔다. 비트코인 버블이 잠잠해질 무렵 세상은 어떻게 변해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에리히 프롬은 진정한 사랑은 사랑으로부터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게 아니라 믿어주는 데서 출발한다고 했다. 비트코인을 향한 러브스토리는 해피엔딩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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