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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비보를 접했습니다. 처음엔 믿기지 않았어요. 김주혁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데 그 김주혁 맞아? 이렇게 몇 번이나 되물어볼 정도였죠. 사고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경찰 조사가 밝혀주겠지요. 저는 4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배우 김주혁에 대해 추억해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김주혁은 1997년 영화 <도시비화>에 출연하며 연기를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인 1998년 SBS 8기 공채 탤런트에 합격하면서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게 됐고요.


<세이 예스>


제가 김주혁의 존재를 처음 알게된 것은 영화 <세이 예스>(2001)에서였습니다. 박중훈과 추상미가 주연인 스릴러 영화인데 김주혁은 추상미의 남편 정현 역으로 출연했습니다. 정현은 결혼 1주년을 기념해 아내와 속초로 여행을 떠나는데요.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내 정체 모를 남자 M(박중훈)을 만나게 됩니다. 김주혁의 영화 데뷔작인데 꽤 비중 있는 역이었죠. 물론 그전에 김주혁은 드라마 <카이스트>를 통해 어느 정도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김주혁의 두번째 영화는 <YMCA 야구단>(2002)입니다. 송강호, 김혜수에 이어 세 번째 크레딧을 맡은 그는 일본에서 야구유학을 하고 돌아와 YMCA야구단의 주장이 된 투수 대현을 연기했습니다.


<싱글즈>


그의 세 번째 영화가 오늘날의 김주혁을 만들었습니다. 김주혁 하면 로맨틱코미디에 잘 어울리는 젠틀한 이미지가 있잖아요. 네 명의 싱글 남녀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싱글즈>(2003)에서 수헌(김주혁)은 능청스럽게 등장해 나난(장진영)의 주위를 맴돕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두 사람 모두 고인이 됐네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2004년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은 김주혁에 의한, 김주혁을 위한 영화입니다. 홍반장 하면 김주혁, 김주혁 하면 홍반장이 자동으로 떠오를 정도로 이 캐릭터는 그에게 딱이었습니다. 용모 빼어나고, 모르는 것 없고, 못하는 일 없는 30살의 홍두식은 그러나 별다른 직업 없이 동네 반장을 하는 허당입니다. <1박 2일>에서 캐릭터가 굳어진 ‘구탱이형’도 홍반장의 연장선상에 있죠. 홍반장이 접수한 마을에 비슷한 또라이 윤혜진(엄정화)이 나타나면서 홍두식은 반장의 자리마저 뺏길 위기에 처합니다. <싱글즈>에 이어 엄정화와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췄습니다.


<청연>


<싱글즈>에서 만난 장진영과의 인연은 2005년 <청연>으로 이어집니다. 최초의 여류비행사 박경원을 그린 이 영화에서 김주혁은 박경원(장진영)을 사랑해 청혼하지만 거절당하고 괴로워하는 일본 유학생 지혁 역을 맡았습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외로움이 묻어나오는 배우, 그때만 해도 김주혁의 이미지는 그랬습니다. 비록 영화는 친일 논란에 휩싸여 흥행 참패했지만 완성도는 나쁘지 않은 작품입니다.



김주혁의 필모그래피를 보다 보면 한 여배우와 두 편 이상 함께 출연한 경우가 자주 보입니다. 엄정화, 장진영에 이어 손예진, 조여정도 두 편을 함께 작업했죠. 그가 여배우들에게 어떤 평판을 얻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죠. 뭔가 어색하거나 불편했다면 그럴 수 없었을 테니까요. 이요원, 문근영, 정려원, 이윤지, 최지우, 이유영 등 여배우 복도 참 많은 편입니다.


<광식이 동생 광태>


<광식이 동생 광태>(2005)는 김주혁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그는 짝사랑하는 윤경(이요원)에게 고백 한 번 못했지만 7년 동안 잊지 못하는 ‘연애계의 평화유지군’ 광식을 연기했습니다. 365일 작업이 일상인 동생 광태(봉태규)와 누가 더 지질한지 내기를 하는 듯한 영화였죠. 윤경의 결혼식에서 광식이 부르는 ‘세월이 가면’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습니다. 윤경은 광식에게 이렇게 말하죠. “인연이라는건 운명의 실수나 장난따위도 포함하는 거 같아요. 광식이 오빠를 친오빠처럼 생각해도 되지요?” 이 대사 듣고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던 것은 저뿐만은 아니겠죠. 세상 모든 지질한 남자들에게 바친 영화가 아닐까 싶네요. <건축학개론>이 그 계보를 이어가기 전까지요.


<사랑따윈 필요없어>


다음 영화 <사랑따윈 필요없어>(2006)에서 김주혁은 광식이와 전혀 다른 인물인 줄리앙을 연기했습니다. 마치 “나는 지질하지 않아”라고 선언하는 듯한 영화였죠. 줄리앙에게 여자는 장난감일 뿐입니다. 달콤한 속삭임 한 마디에 쉽게 몸도 마음도 열 수 있죠. 그는 시각장애인 상속녀 류민(문근영)이 어린 시절 잃어버린 오빠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녀에게 접근합니다. 김주혁의 이미지 변신과 당시 <어린 신부>로 엄청난 인기였던 문근영의 새 영화로 화제를 모았지만 흥행 성적은 신통치 않았습니다.


<아내가 결혼했다>


<아내가 결혼했다>(2008)는 김주혁의 또다른 대표작입니다. 덕훈(김주혁)은 귀엽고 애교 넘치고 지적이고 축구까지 좋아하는 인아(손예진)와 꿈에 그리던 결혼에 성공해 매일밤 아내와 함께할 기대에 부풀어 있는데 어느날 그녀가 덕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 하나 더 갖고 싶어.”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투정부립니다. “내가 별을 따달래 달을 따달래. 그냥 남편 하나 더 갖고 싶다는 것 뿐이잖아.” 다른 남자와 또다른 살림을 차린 아내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하는 김주혁의 표정이 기억에 남네요.


<방자전>


춘향전을 재해석한 영화 <방자전>(2010)에서 춘향(조여정)과 사랑에 빠지는 방자도 김주혁입니다. 몽룡(류승범)보다 더 멋진 하인 방자는 향단이 아니라 춘향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365일 중 360일을 운동한다던 김주혁이 갈고닦은 몸을 드러낸 영화였죠. 이때부터 김주혁은 조금씩 연기 변신을 하고 싶었던 듯합니다. 한 여자만을 위한 순애보는 <방자전>에서도 변함없지만 그전까지 부드러운 남자에서 이제 카리스마 있는 역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적과의 동침>


<적과의 동침>(2011)에서 김주혁이 맡은 배역은 인민군 장교입니다. 전쟁하러 왔다가 설희(정려원)와 사랑에 빠지는 남자였죠. 이때 입었던 인민군 장교복은 이후 <공조> 캐스팅으로 이어집니다.


<투혼>


<투혼>(2011)은 평소 야구를 좋아하던 김주혁이 출연한 두 번째 야구영화입니다. <YMCA 야구단>에 이어 이번에도 포지션은 투수네요. 3년 연속 MVP에 빛나는 롯데자이언츠의 간판스타였지만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아 결국 '고물투수'로 전락한 윤도훈 역을 맡았는데요. 뒷수습의 달인 오유란(김선아)의 헌신 덕분에 전성기를 회복해가는 인간승리의 드라마였습니다. 비록 영화는 승리하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조기강판되는 비운을 겪었지만요.


<커플즈>


<커플즈>(2011)는 제목처럼 커플 이야기가 아니라 <싱글즈>처럼 다섯 싱글들의 이야기입니다. 김주혁은 문자 한 통 남기고 사라져버린 여자친구를 수소문하는 유석 역을 맡았습니다. 이번에도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헌신하는 순정 소심남이었습니다.


2012년부터 2013년까지는 56부작 <무신>, 135부작 <구암 허준> 등 TV 사극에 집중하느라 영화 출연작은 없습니다. 2013년부터 2년 간은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 시즌3>에 출연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고요.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고 있으면 쉰 기간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만큼 꾸준하게 항상 그 자리에 있던 배우이자 예능인이었습니다.



2015년에는 <나의 절친 악당들>과 <뷰티 인사이드>에 깜짝 출연했습니다. <나의 절친 악당들>에선 가진 것은 돈밖에 없는 회장 역이었고, <뷰티 인사이드>에선 수많은 우진들 중 하나였습니다. 한동안 영화 출연이 뜸하던 김주혁은 2016년부터 다시 영화 활동을 재개합니다.


<좋아해줘>


옴니버스 로맨틱코미디 <좋아해줘>(2016)에서 김주혁은 최지우의 상대역이었습니다. 사랑을 잃은 노총각 쉐프 정성찬(김주혁)은 집 잃은 노처녀 스튜어디스 함주란(최지우)과 뜻하지 않은 동거를 하게 되는데요. 둘은 톰과 제리처럼 티격태격하지만 일상을 공유하면서 서서히 서로에게 마음을 엽니다. 김주혁은 최지우와의 연기 호흡에 대해 “내 옆에 있는 친한 친구가 연애하는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이라고 말했습니다.


<비밀은 없다>


김주혁이 가장 센 악역을 맡은 영화는 <비밀은 없다>(2016)입니다. <아내가 결혼했다>에 이어 이번에도 손예진의 남편으로 분했는데요. 국회 입성을 노리는 신예 정치인 종찬 역으로 딸이 실종됐는데도 오로지 선거에만 매진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모습을 보여주죠. 마지막 반전에선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김주혁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이후 그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출연합니다. 홍상수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개런티를 포기할만큼 절박하거나 혹은 꾸밈없는 일상 연기를 해보고 싶거나. 아마도 김주혁은 후자가 아니었을까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2016) 출연은 김주혁 연기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됩니다. 그는 이후 지금까지 로맨틱한 모습 대신 전혀 다른 연기에 도전하거든요. 또 이 영화에서 김주혁은 미래를 약속한 이유영을 만납니다.


<석조저택 살인사건>


홍상수 영화 이후 출연한 두 편에서 김주혁은 모두 악역을 맡습니다. 과거 그를 로맨틱 가이로 기억하는 팬들은 아쉽겠지만 그는 40세를 넘긴 뒤 계속해서 연기 변신을 시도합니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석조저택 살인사건>(2017)에서 김주혁은 경성 최고의 재력가 남도진 역을 맡았습니다. 운전수 최승만(고수)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그는 지하 보일러실에서 고수와 막싸움 액션을 펼쳐보이기도 합니다.


<공조>


북한형사와 남한형사가 합작해 남한으로 숨어든 북한 범죄조직 리더 차기성(김주혁)을 쫓는 영화 <공조>(2017)에서 김주혁은 <석조저택 살인사건>처럼 이번에도 동판에 집착하는 악역을 맡았습니다. 현빈과 유해진에 많이 가리긴 했지만 이 영화에서 김주혁은 근육질 몸매를 보여주며 카리스마를 발산합니다. 잇따라 악역을 맡으면서 그는 연기하는 재미를 알게 됐다고 합니다. 현장에 있는 것이 즐겁다고 곧잘 말하곤 했습니다. 한창 연기의 폭을 넓혀가던 시기에 운명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네요.



“40대가 되면서 변화에 대한 고민이 더 늘어났다. 어떤 작품에서든 좋은 배역을 맡아 이를 잘 표현한 배우들을 보면서, '그래, 내 생각이 맞았어 저렇게 하면 돼'라고 할 때가 잦다. 또 <1박 2일>이라는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나서부터 더 달라진 것 같다. 알겠지만 예능프로그램을 촬영할 땐 웃기지 않아도 웃어야 할 때가 많다. 그런 와중에 난 휘둘리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본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 과정에서 실제로 느낀 만큼만 표현하는 게 가장 좋다는 것을 배웠다. 어떤 프로그램이든 작품이든 전체를 봤을 때 연기자가 과하게 표현하면 보는 분들이 되려 불편해지지 않나. 앞으로 다가올 연기 동향을 예상해보면 지금까지와는 많은 부분이 달라질 것 같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배우들이 하는 연기는 대부분 '보여주기 식'이다. 그러나 할리우드에서 호평 받는 영화를 보면 배우들이 전부 담백하게 연기한다. 그리고 나서 연출로 영화, 장르적 재미를 살리는 편이다. 만약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변화가 생긴다면 잘 얹혀가야지 싶다. 뒤처져서는 안되니까.(웃음)” - 김주혁, [무비스트] 인터뷰 중


<독전> 대본 리딩 중인 김주혁


김주혁의 유작은 <흥부>와 <독전>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두 편 모두 촬영을 마쳤고 현재 후반작업 중입니다. 두 영화에서 김주혁을 보게 되면 지금까지와 달리 아련한 기분이 들 것 같습니다. 히스 레저의 유작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을 보던 때처럼요.


김주혁은 최근 악역으로 연기 변신을 시도했지만, 제 마음 속에서 그는 영원히 첫사랑에 속 끓이던 광식, 좋아하는 여자 주위를 맴도는 로맨틱한 수헌, 부르면 어디서든 나타나는 홍반장, 끝까지 아내를 믿어주는 덕훈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PS)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세월이 가면'을 부르는 광식의 모습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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