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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예술혼을 불태워 전설로 남은 배우 히스 레저. 내년 1월이면 벌써 그의 사망 10주기가 되는데요. 때마침 히스 레저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아이 앰 히스 레저>(안드리안 부이텐후이스, 데릭 머레이 감독)가 19일 개봉하며 그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어린 시절 히스 레저가 직접 찍은 영상, 동료 배우, 감독, 친구, 가족의 인터뷰 등이 삽입되어 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히스 레저가 직접 찍은 비디오 중 빙글빙글 회전하는 모습을 반복해 보여주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온몸이 창작을 위한 열정으로 가득한 한 젊은 예술가의 모습이 그 속에 온전히 담겨 있었습니다.
히스 레저의 삶을 10가지 팩트로 재구성 해봤습니다.
1. 가슴 속에 열정을 품은 예술가
“히스는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 일엔 관심이 없었어요. 그는 항상 자신을 극한으로 내몰며 온몸을 던져 내달렸죠.” - 벤 하퍼 (뮤지션)
“<몬스터볼>에서 작은 배역이었는데도 신을 압도하는 걸 보고 <브로크백 마운틴>에 캐스팅했어요. 신이 질투할 만큼 그는 재능이 많았죠.” - 이안 (영화감독)
“좋은 외모, 재능, 육체미, 남성성, 목소리까지. 히스는 남자 배우로 성공할 모든 요소를 갖고 있었어요. 저는 그와 꼭 작업해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함께 연기한 그 순간 압도당했죠.” - 나오미 왓츠 (배우)
“히스는 계속 다르게 찍으면서 시선 처리, 웃는 모습 등 개선할 부분을 찾아냈어요.” - 트레버 디카를로 (배우)
“아이디어가 생기면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요. 한밤중이나 새벽에도 전화해요. 잠을 못 자겠대요. 한 번은 제가 그랬죠. 알았으니까 아침 8시에 통화하자. 그랬더니 그날 새벽 5시 30분에 저희 집으로 찾아 왔어요.”
히스 레저는 창작욕에 불타는 예술가였다. 그는 늘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폴라로이드와 필름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서 자기 자신과 주변을 찍었다. 새로운 각도, 노출, 셔터스피드 등을 독학으로 익혔고, 조명에 맞춰 필요한 숫자를 암기할 정도로 카메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연기를 할 때면 그는 그 캐릭터가 되어야 직성이 풀렸다. 사람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연기를 하려고 했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 역할을 위해 그는 3주간 외출하지 않고 집에서 조커가 되어 살았다. 잭 니콜슨의 조커가 워낙 전설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부담감이 상당했다. 하지만 그의 친구가 그를 만나러 갔을 때 이미 그는 조커가 되어 있었다.
“저에게 ‘왜 그렇게 진지해? Why so serious?’ 라는 대사를 하는데 소름이 끼쳤어요. 이 친구가 해냈구나 싶더라고요. 그는 조커의 표정으로 이러더군요. 쉿! 이건 비밀이야.”
<다크 나이트>
히스는 자신이 직접 조커 분장을 했다. 입술에 붙인 모형물이 자꾸 떨어져 그는 혀로 입술에 침을 발라야 했는데 나중엔 이 동작을 캐릭터 습관의 하나로 승화시켰다.
잘생긴 하이틴 스타로 경력을 시작한 그는 매작품마다 스스로를 파괴할 정도의 변신을 거듭해 결국 전설적인 연기를 남기고 무대 뒤로 퇴장했다.
매시즈 레이블에서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히스 레저(오른쪽)
2. 능력있는 뮤직비디오 감독
“히스는 항상 카메라를 갖고 다녔어요. 새로운 각도를 찾아 사진을 찍고 또 그걸 긁어내서 작품을 만들었죠. 이미지를 만드는 걸 좋아했고 재능이 있었어요.”
히스 레저는 뮤직비디오 감독이기도 했다. 그는 배우 경력을 시작하면서 사진을 찍어왔는데 이 작업을 발전시켜 인디 뮤지션 친구들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그의 작품들은 강렬하게 이미지와 음악의 리듬을 살린 것이 특징이다.
2006년 히스는 호주 힙합 아티스트 엔파(N'fa)의 'Cause An Effect' 앨범 중 'Seduction is Evil' 뮤직비디오를 연출했다. 그해 히스는 친구인 맷 아마토 감독과 매시스(Masses)라는 레코드 레이블을 차려 인디밴드를 발굴하고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일을 했다. 벤 하퍼의 'Morning Yearning'의 뮤직비디오도 이때 만들었다. 하퍼는 이렇게 회고한다.
“히스가 제 신보를 들어보더니 자신이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싶다고 하더군요. 저는 당연히 좋다고 했죠. 제 친구이자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가 만들어준 이 뮤직비디오가 지금까지 제 뮤직비디오 중 최고예요.”
토드 헤인즈 감독도 히스 레저가 만든 뮤직비디오를 극찬했다.
히스는 프로젝트를 확장해 1974년 26세의 나이로 죽은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닉 드레이크의 뮤직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했다. 이를 위해 그는 2007년 드레이크의 노래 'Black Eyed Dog'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듬해 그가 사망하면서 프로젝트는 무산됐다. 이때 그가 만든 뮤직비디오는 그의 사후에 인터넷으로 공개됐다.
히스의 마지막 뮤직비디오는 모데스트 마우스(Modest Mouse)의 'King Rat'과 그레이스 우드루프의 'Quicksand'다.
3. 주위에 항상 친구가 많은 분위기메이커
“언제나 어딜 가든 빛이 나던 친구였죠.” - 맷 아마토 (영화감독)
“히스는 자신의 성공을 친구들과 나누고 싶어 했어요.” - 나오미 왓츠 (배우)
한때 연인이던 나오미 왓츠와 함께
“그의 죽음 뒤에 여러 말이 오갔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그는 정말 행복했고 삶을 사랑했고 괴로움이 있어도 앞으로 달려 나갔어요.” - 스티브 알렉산더 (매니저)
친구와 동료들이 기억하는 그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그가 나타나면 생기가 돌았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따뜻하고 열린 사람이었다.
<패트리어트: 늪 속의 여우>가 흥행한 뒤 그는 LA에 집을 마련했다. 이 집은 당시 할리우드 스타들이 제집 드나들 듯 오갔던 ‘파티 하우스’였다. 그의 매일 이곳에서 친구들과 예술과 영화에 대해 토론했다.
딸 마틸다와 함께
4. 딸바보 아빠
“히스는 딸을 정말 사랑했어요. 딸에게 그는 최고의 아빠였죠.” - 애슐리 벨 (여동생)
2004년 히스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함께 연기한 미셸 윌리암스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2005년 10월엔 딸 마틸다를 얻었다. 히스는 “마틸다를 낳은 건 내 인생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딸을 아꼈다. 미셸은 뉴욕 브루클린에 새 보금자리를 얻고 싶어했고, 세 식구는 브루클린으로 이사했다.
미셸 윌리암스와 함께
그러나 결혼 생활은 2007년 막을 내렸다. 두 사람은 3년만에 결별했다. 사유는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결별 사실조차 2007년 미셸 윌리엄스의 아버지가 인정하며 알려졌다.
그의 사후 마틸다는 미셸이 키우고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함께 연기한 제이크 질렌할과 미셸 윌리암스와 <도슨스 크릭>에서 연기했던 비지 필립스가 마틸다의 대부와 대모 역할을 하고 있다.
미셸과 이혼한 뒤 히스는 슈퍼모델 헬레나 크리스텐슨, 젬마 워드와 한때 데이트하기도 했다.
5. 어릴 때부터 영화배우를 꿈꾸다
히스의 누나 케이트는 어릴 때 배우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그도 누나처럼 배우가 되고 싶었다. 히스는 어릴 때 침대 위에 별 모양의 야광 스티커를 붙여 놓았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언젠가는 저도 별이 될 거예요.” 그는 할리우드와 영화산업을 동경했다.
10살 때 초등학교에서 피터 팬 배역을 맡은 것이 첫 연기 경험이었다.
17살 때인 1996년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배우가 되기 위해 절친 트레버 디카를로와 함께 시드니로 갔다. 그곳에서 호주의 가족드라마 <클라우닝 어라운드>의 작은 배역을 따내 퍼스로 돌아왔다.
그는 퍼스의 TV에서 점점 출연비중을 늘려갔다. TV시리즈 <땀>(1996)에서는 게이 사이클 선수를 연기했다. 이후 호주 영화 <블랙록>(1997)으로 영화 신고식을 치렀다.
1999년 그는 할리우드 오디션에 도전해 틴에이저 코미디 영화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의 주인공 패트릭 역을 단번에 따낸다. 이 일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은 히스에게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멜 깁슨과 함께
6. 정상에 올랐을 때 고독을 느끼다
스무살에 할리우드 틴에이저 영화에서 주연을 맡으며 얼굴을 알린 그에게 이후 엇비슷한 틴에이저 영화 제안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이들을 모두 거절했다. 대신 그가 택한 영화는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패트리어트: 늪 속의 여우>(2000)였다. 작은 배역이었지만 그는 이 영화를 꼭 하고 싶어했다. 그가 꿈에 그리던 롤모델인 멜 깁슨과 함께 연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멜 깁슨은 그에게 캐릭터에 몰입했다가 빠져나오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다음으로 그에게 들어온 시나리오는 <스파이더맨>이었다. 하지만 그는 피터 파커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도전할 수 있는 배역을 원했다. 그래서 <몬스터볼>(2001)에서 사형 집행인의 아들을 연기했고, 극찬받았다.
<기사 윌리암>
외모에 연기력까지 갖춘 그는 활주로를 날아오른 비행기처럼 급격하게 정상으로 올라갔다. 2001년작 <기사 윌리암>에선 아예 그의 얼굴만으로 포스터를 만들 정도로 그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핫한 남자배우가 되었다. 2001년 그는 한 매체의 조사에서 ‘미래의 남자스타’로 꼽히기도 했다.
그는 원하던 것을 얻었지만 한편으로 이처럼 화려한 삶은 그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할리우드 관계자들과 사업 이야기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브로크백 마운틴>
이후 그는 새롭고, 도전적이고, 또 거장들이 만드는 영화에 출연했다. 그는 <독타운의 제왕들>(2005)에서 자유분방한 스케이드보더가 되었고, <브로크백 마운틴>(2005)에선 게이 카우보이를 연기했으며, 토드 헤인즈 감독의 <아임 낫 데어>(2007)에선 밥 딜런의 6개의 자아 중 하나인 가상의 배우가 되었다. 특히 <브로크백 마운틴>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는 이 영화로 주연상을 휩쓸며 연기 잘하는 배우로 공인받았다.
이안 감독과 <브로크백 마운틴> 촬영 중인 히스 레저
7. 위대한 예술가를 동경하다
“히스는 커트 코베인, 제니스 조플린처럼 27세에 죽은 위대한 아티스트를 동경했어요. 자신도 27세에 죽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땐 그 말이 현실이 될 줄은…”
히스는 집을 예술작품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예술적인 환경 속에서 살고 싶어했다. 에너지가 넘쳤던 그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래서 그는 요절한 천재 아티스트들을 동경했다.
크리스토퍼 놀란과 히스 레저
또, 히스가 영화를 고를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감독이었다. 동경하는 감독과의 작업이면 그는 배역의 경중을 따지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마크 포스터, 캐서린 하드윅, 이안, 토드 헤인즈, 크리스토퍼 놀란, 테리 길리엄 등 거장과 작업할 수 있었다.
<다크 나이트> 촬영 때 그는 자신의 촬영이 없을 때도 현장에 가서 크리스토퍼 놀란 옆에 있었다. 그는 크리스에게 연출을 배우고 싶어했다.
8. 체스에 관한 영화로 감독 데뷔 준비하다
히스는 체스 선수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체스를 둔 그는 10살 때 서호주 주니어 챔피언십에서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는 곧잘 체스를 두었다. 친한 사람들과는 인터넷으로 두기도 했다.
히스는 멜 깁슨처럼 배우이면서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2007년 그는 감독 데뷔를 위해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영화 역시 체스를 소재로 한 것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 시나리오 작가 앨런 스콧과 함께 월터 테비스의 1983년 소설 [여왕의 한수]을 각색했다. 히스는 이 영화에서 연출과 주연을 동시에 할 생각이었다. 상대 배우는 엘렌 페이지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사망하면서 프로젝트는 무산됐다.
9. 언론에게 침을 뱉다
다혈질적인 성격의 히스는 언론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 번은 파파라치 기자를 향해 침을 뱉기도 했다. 이에 대해 파파라치 기자는 앙갚음하느라 2006년 <브로크백 마운틴> 시사회장에서 레드 카펫을 걷는 히스와 미셸을 향해 물총을 쏘기도 했다.
2006년 히스는 멜버른의 ‘헤럴드 선’과의 인터뷰에서 <브로크백 마운틴>이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상영금지됐다고 말하면서 '린치'라는 표현을 써 구설에 올랐다. 한 언론사는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린치가 마지막으로 행해진 것은 1931년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10. 죽기 전까지 불면증에 시달리다
"제가 알던 기간동안 히스는 불면증에 시달렸어요. 그는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어요. 생각이 계속 떠오르고 떠오르면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죠." - 미셸 윌리암스 (배우, 전부인)
히스의 불면증은 <다크 나이트> 조커 역에 빠져들면서 더 심해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주에 나는 하루 평균 2시간밖에 못잤다.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내 몸은 지쳤는데 머리는 계속 돌아간다."
당시 그는 불면증 치료제인 졸피뎀을 먹고 있었다.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테리 길리암 감독의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촬영 중에도 그는 상대 배우인 크리스토퍼 플러머에게 건강이 많이 악화됐다고 털어놓았다. 잠을 못자던 그는 약에 의지하고 있었다. 하루는 한밤 추위 속에서 촬영해 배우들이 죄다 감기에 걸린 적이 있다. 플러머는 그때 히스가 폐렴에 걸렸을 것으로 추측했다.
2008년 1월 22일 오후 2시 45분, 히스는 침대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가정부에게 발견됐다. 그녀는 히스의 친구 메리 케이트 올슨에게 연락했고, 당시 캘리포니아에 있던 메리는 경호원에게 현장에 가보라고 했다. 911 의료진이 3시 33분에 도착했지만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다. 3시 36분 의료진은 히스의 공식적인 사망을 발표했다. 이후 부검 결과 히스의 사망 원인은 '처방약의 과다복용에 의한 중독'으로 결론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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