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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두 편의 영화를 소개할까 합니다. 두 편 모두 독립심 강한 ‘레이디’가 주인공이고, 유명한 작가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했습니다. 첫 번째 소개할 영화는 제인 오스틴의 첫 번째 소설을 영화화한 <레이디 수잔>, 두 번째 소개할 영화는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1865)을 각색한 <레이디 맥베스>입니다.



<레이디 수잔> 남자들은 다 멍청해


제인 오스틴이 스무살 무렵 쓴 이 소설은 그녀 사후인 1871년에야 출간되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생전의 오스틴은 이 첫 작품을 발표하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서간체의 이 소설은 다른 오스틴 소설에 비해 과감한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이지만 이후 학자들에 의해 재평가받고 있다고 하는군요.


영화는 아마존 스튜디오가 제작하고 휘트 스틸먼 감독이 오랜만에 연출을 맡았는데 여러 등장인물을 코믹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누구는 잘생겨서 여자들의 관심을 받고, 누구는 오지랖이 넓다는 식이죠. 마치 옛날 TV드라마를 보는 듯한 구성을 살짝 비틀었습니다.



레이디 수잔(케이트 베킨세일)은 남편과 사별한 사교계의 여왕입니다. 결혼 적령기가 된 딸 프레데리카(모피드 클락)를 키우고 있지만 그녀의 관심사는 오직 자신뿐입니다. 그녀가 동서가 사는 처칠이라는 작은 시골마을로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동서에겐 마침 잘생긴 젊은 동생 레지널드(자비에 사무엘)가 있는데 레이디 수잔은 순진하고 집안 좋은 그를 작업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사교계에서 워낙 안 좋은 소문이 많은 여자이기 때문에 다들 레지널드에게 레이디 수잔을 조심하라고 말해주지만 그는 이미 그녀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습니다. 레이디 수잔은 레지널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과 사별한 뒤 사교계를 일부러 멀리하고 혼자 지냈어요. 처칠에 온 것도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기 위해서지요. 저에 관한 말들은 다 뜬소문이에요.”


너무나 뻔해 보이지만 마음 착한 청년 레지널드는 이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습니다.


레이디 수잔과 레지널드.


그렇게 레지널드의 마음을 산 레이디 수잔의 또다른 목표는 딸 프레데리카를 돈 많은 남자 제임스(톰 베넷)와 결혼시키는 것입니다. 제임스는 얼빵한 바보여서 다들 그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프레데리카 역시 그와 결혼만은 하지 않겠다며 저항합니다만, 레이디 수잔은 성경까지 들춰 10계명에 ‘부모에게 복종하라’는 구절을 내밀며 프레데리카를 압박합니다.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것 같은 이때 레이디 수잔은 런던에 두고 온 남자가 생각납니다. 유부남인 맨워링으로 레이디 수잔은 런던과 처칠을 오가며 레지널드와 맨워링 사이에서 간을 봅니다. 그런데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맨워링의 부인이 울며불며 찾아간 곳에 하필 레지널드가 있었고, 레지널드는 맨워링과 레이디 수잔의 관계를 알게 됩니다. 이제 레이디 수잔은 위기에 처하는데요. 하지만 작전이 들통났다고 해서 주눅들 그녀가 아니죠. 레이디 수잔은 당당하게 레지널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맨워링이요? 그 남자와는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나를 의심하는 거라면 우리 결혼은 없었던 걸로 해요.”


레이디 수잔의 이 '뻥카' 작전이 과연 통할까요? 자신은 젊고 잘생긴 부잣집 도련님 레지널드의 마음을 얻고, 딸은 부잣집에 시집보내려는 두 가지 목표를 레이디 수잔은 모두 이룰 수 있을까요? 분명한 건 영화는 해피엔딩이라는 것입니다. 레이디 수잔 입장에서 말이죠.


레이디 수잔과 알리시아.


레이디 수잔에겐 절친 알리시아(클로에 세비니)가 있는데 그녀와 나누는 대화도 재미있습니다. 알리시아의 남편은 그녀가 레이디 수잔과 만나는 것을 반대하며 한 번만 더 만나면 친정이 있는 미국으로 보내버리겠다고 겁박하죠. 하지만 알리시아는 꿋꿋하게 레이디 수잔을 만나 도움을 줍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레이디 수잔은 알리시아에게 이렇게 고마움을 표시합니다.


"네 남편의 중풍이 더 심해져서 너도 나처럼 싱글이 되어 자유로워지기를."


가난하지만 교양있는 말투와 품위있는 행동을 잃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하며, 남자들은 다 멍청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멍청한 남자들의 심리를 역이용해 마음을 쉽게 빼앗는 레이디 수잔은 지금 봐도 참 놀라운 캐릭터입니다. 팜므파탈이라고 하기엔 사랑스럽고, 진취적이라고 하기엔 잔머리가 심한, 페미니즘의 연구대상일 듯합니다.


자신의 매력적인 외모가 얼마나 큰 자산인지를 잘 알고 있는 그녀에게 결혼은 일종의 게임입니다. 돈 많고 일찍 죽을 남자 만나는 게 레이디 수잔에겐 최고의 목표인 것이죠. [오만과 편견]에서 ‘착한 마음’을 제거한 엘리자베스라고 할까요. 레이디 수잔을 연기한 케이트 베킨세일은 그녀를 "초기 페미니스트 전사"라고 평했군요.


레이디 수잔 ★★★☆

결혼시장이라는 게임에서 여성이 승리하는 방법. 케이트 베킨세일의 재발견.



<레이디 맥베스> 배신하면 죽여버릴 거야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맥베스’는 지나친 야심으로 파멸하는 인물입니다. 니콜라이 레스코프가 쓴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 역시 끔찍할 만큼 강렬한 여성이 주인공인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비롯해 폴란드 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영화 <시베리안 레이디 맥베스>(1962)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영화화된 <레이디 맥베스>는 영국 출신 윌리엄 올드로이드 감독의 데뷔작입니다. 그는 과감한 각색과 밀도 깊은 연출로 로튼토마토 지수 92%의 엄청난 호평을 이끌어냈습니다. 과연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수작입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어느 저택에서 캐서린(플로렌스 퓨)이 혼자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밤이 됐지만 남편은 그녀를 거들떠도 보지 않습니다. 답답해서 산책을 하고 돌아오지만 시아버지는 집을 비우지 말라며 잔소리를 늘어 놓는군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대꾸를 하니 내가 너를 얼마에 사왔는데 말대꾸냐며 다그칩니다. 아, 캐서린은 원래 가난한 집 딸이었는데 영주인 시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신붓댁에 돈을 치르고 구해온 신부인가 봅니다. 아들은 신분 차이가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캐서린을 멀리하는 것이고요.



남편이 출장을 간다고 몇 달 동안 집을 비우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제 집에는 캐서린과 하녀 애나(나오미 아키), 그리고 하인들밖에 없습니다. 하인들이 애나를 괴롭히는 것을 목격한 캐서린은 하인들에게 애나를 괴롭히지 말 것을 명령하지만 하인 중 한 명이 그녀에게 반항합니다. 바로 세바스찬(코스모 자비스)입니다. 시아버지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던 캐서린은 이 반항적인 남자에게 끌리기 시작합니다. 세바스찬 역시 저돌적이어서 두 사람은 결국 침대에서 정사를 치릅니다.


그날 이후 캐서린은 애나 몰래 세바스찬과 자주 사랑을 나눕니다. 캐서린은 세바스찬에게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애나는 이 사실을 알게 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캐서린은 더 과감해집니다. 그녀는 세바스찬에게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사랑하지? 만약 배신하면 죽여버릴거야.”



이제 이야기는 긴장과 광기와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그러면서도 화면은 아주 단정하고 정돈되어 있어 숨이 막힐 듯한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매일 코르셋을 꽉 끼어 입고, 집 밖으로 외출도 금지된 채 살아가던 캐서린은 자신을 압박하던 남자들을 죽임으로써 자유를 만끽합니다. 캐서린은 세 번의 살인을 저지릅니다. 차례대로 노인, 중년남, 소년입니다. 어떠한 자비도 없습니다. 남자의 3대를 끊어버린 이 상징적인 살인은 급진적 페미니즘과 맞닿아 있습니다.



세 번의 살인을 통해 캐서린은 마침내 이 외딴 저택을 장악합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역시 해피엔딩입니다. 물론 캐서린의 입장에서 말이죠.


원작 소설은 캐서린이 붙잡혀 처형당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지만 영화는 캐서린을 불쌍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녀의 냉철한 광기가 절정에 달하는 순간 끝맺습니다. 그래서 더 강렬합니다.


18세의 플로렌스 퓨는 매혹적인 외모로 놀라운 연기를 보여줍니다. 서서히 끓어오르는 광기를 표현하는 그녀의 눈매가 압도적입니다. 앞으로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보게 될 것 같은 예감입니다.


레이디 맥베스 ★★★★

억압받는 여성의 강렬한 복수. 플로렌스 퓨의 발견.



<레이디 수잔>과 <레이디 맥베스> 모두 사랑을 무기로 남자들을 갖고 노는 카리스마 있는 여성을 그린 작품입니다.


<레이디 수잔>의 레이디 수잔은 “여자들이 바람 핀다는 게 말이나 되냐”는 허세 강한 남자들의 시대에 남자들의 마음을 빼앗는데 선수로 군림한 여성이고, <레이디 맥베스>의 캐서린은 집에만 가둬놓고 코르셋으로 몸을 조이고 밥 먹는 것도 일일이 간섭하는 남자들이 만든 룰이 지배하는 저택에서 과감하게 룰을 깨고 자신만의 규칙을 세운 여성입니다.


매력적인 캐릭터, 과감한 서사, 훌륭한 연출로 빚은 두 작품은 모두 2016년에 만들어졌습니다. 매혹적인 수잔과 강렬한 캐서린 중 당신은 누구에게 더 끌리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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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
영화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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