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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편 잘 만드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봉준호, 박찬욱처럼 꾸준하게 수작을 내놓는 감독은 그래서 더 놀랍다. <혈투>로 데뷔한 박훈정 감독은 두 번째 영화 <신세계>로 한국형 갱스터 누아르의 금자탑을 쌓았다. 그전까지 모든 조폭 영화는 <신세계> 앞에 고개를 숙였다. 박 감독의 장기는 남자들의 욕망과 배신을 최대한 폼나게 그리는 데 있었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답게 "독하게 굴어, 그래야 니가 살아" 같은 대사는 귀에 팍 꽂혔다.


하지만 <신세계> 이후 그가 만든 영화 두 편 <대호>와 <브이아이피>는 실망스럽다. <대호>는 너무 단순한 정공법이었고, <브이아이피>는 지나친 무리수다. 그는 <신세계>에서 칭찬받은 끈적한 인물 관계 묘사를 버리고, 건조한 스릴러 풍으로 <브이아이피>를 만들었는데 식상한 전개, 납득할 수 없는 갈등구조, 불필요한 잔인함, 자극을 유도하는 반전 등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들의 캐스팅이 아까운 영화가 됐다. 영화 <브이아이피>의 문제점 세 가지를 짚어보자.



첫째, 시대착오적인 설정이다. 영화는 <신세계>와 달리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1982년 기획 귀순한 이한영이 1997년 암살당한 사건과 1987년 아내 수지 김을 살해한 뒤 간첩으로 조작한 윤태식 사건이 모티프다.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조카인 이한영은 북한 관련 정보를 팔다가 북한 공작원에게 암살당했고, 윤태식은 국정원과 짜고 죽인 아내를 간첩으로 조작한 뒤 온갖 금융 범죄를 저지르다가 체포됐다.


영화 속 김광일(이종석)은 장성택의 오른팔의 아들로 설정됐다. 장성택은 김정일이 살아있을 때 실세였기에 북한 내에서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다. 그가 남한으로 기획 귀순해 북한에서와 똑같이 연쇄살인사건을 저지르자 국정원은 그를 비호에 나선다.



이러한 영화 속 설정의 문제는 시대가 변했다는 것이다. 기획 귀순은 체제 우월성을 선전하고자 했던 시대의 산물이다. 전두환 정권은 국내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기획 귀순을 적극 홍보에 활용했다. 하지만 최근 탈북자의 귀순이 워낙 많이 이뤄지고 있어서 기획 귀순이라는 단어는 매우 낯설다.



30년 전 윤태식의 범행은 한 건의 살인이었다. 하지만 영화 속 김광일은 막무가내로 연쇄살인을 저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과 국정원이 미국의 압력에 의해 손을 놓는다는 설정은 납득하기 힘들다.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을 대표하는 자로 고작 CIA 요원 폴 그레이(피터 스토메어) 한 명이 등장해 떠들어댈뿐 눈에 보이는 명확한 실체가 없다는 것도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영화 속 김광일이 저지르는 경기남부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은 실제로 2006~2008년 발생했다. 당시 범인 역시 김광일처럼 성적 욕망에 사로잡힌 싸이코패스였다. 이 사건이 워낙 유명하기 때문인지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는 한국 스릴러 영화는 툭하면 이 사건을 소재로 가져다 쓴다. 그만큼 상상력이 빈곤하다는 증거다.



둘째, 영화에 짙게 깔린 여성에 대한 가학증이다. <브이아이피>에는 여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그나마 등장하는 단역 여성들은 죄다 발가벗겨져 고문당하고 살해당한다. 김광일이 지독한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임을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다.


이에 대해 박 감독은 "(저의) 여성에 대한 이해도가 낮기 때문"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는데 그건 핑계가 될 수 없다. 잘 모르면 고문하고 죽이는 장면을 전시해도 되나? 이건 상업영화 창작자로서 예의가 아니다.


한국영화가 '남탕'이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 영화는 정도가 심하다. (<신세계>도 비슷하지만 그나마 송지효라도 있었다.) 할리우드에서도 남성 캐릭터 편중이 심각해 '벡델 테스트'를 도입해 여성 배우가 독립적인 역할 비중을 늘려갈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감독이 잘 모르면 시나리오를 혼자 쓰지 말고 여성 작가를 투입하는 게 어떨까. 관객의 절반(혹은 그 이상)은 여성이다.




셋째, 평면적인 캐릭터와 식상한 스토리다. 백번 양보해 기획 귀순과 권력기관의 암투는 있을 법한 이야기이고, 여성 가학증은 싸이코패스 스릴러를 위한 노림수라고 치자. 영화는 캐릭터의 매력와 개연성 있는 스토리마저 상실했다.


김명민이 연기한 무대포 형사, 장동건이 연기한 회사원 같은 국정원 직원, 박희순이 연기한 복수심에 불타는 북한 요원 모두 신선함이 부족하다. 감독의 전작인 <신세계>의 매력이 가슴 속에 복잡한 욕망을 간직한 남자들의 암투를 멋스럽게 풀어내는 데 있었다면, <브이아이피> 속 인물들의 욕망은 단순하다. 어떤 복선도 없고, 그저 눈앞에 드러나는 현상만 있다. 후반부 반전은 결정적으로 개연성을 떨어뜨리며 그저그런 B급영화로 전락시킨다.


박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신세계>와 달리 캐릭터보다 사건 위주의 영화를 시도했다"고 밝혔지만 정작 만듦새는 그렇지 않다. 영화는 꽤 자주 배우들을 심도 깊은 클로즈업 화면으로 담아 관객이 인물에 몰입하도록 유도한다. 박재혁(장동건)의 얼굴을 오랫동안 비추는 첫 장면부터 그렇다. 그런데 인물들은 하나같이 일차원적이고 사건은 치밀하지 못하다. 결과적으로 캐릭터를 따라가기에도, 사건을 따라가기에도 애매한 영화가 됐다.




<브이아이피>는 <밀정> <싱글라이더>에 이어 워너브라더스가 투자한 세 번째 한국영화다. 북한에서 온 VIP를 통제할 수 없는 남한의 딜레마라는 당초 기획의도는 대북갈등이 첨예한 작금의 현실에 시사점을 줄 수 있을 법했는데 영화는 그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주지 못해 안타깝다. 영화 한 편 잘 만드는 것은 참 어렵다.


브이아이피 ★★

겉멋 잔뜩 들어간, 시대착오적인 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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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
영화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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