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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프랑스 감독 두 명과 한국 감독 한 명이 뭉쳐 한 편의 옴니버스 영화를 내놓습니다. 제목은 <도쿄!>. 일본 도쿄를 배경으로 한 프랑스, 일본, 독일, 한국 합작영화입니다.
오래 전부터 이 영화를 보려고 했는데 실패하다가 이번에 겨우 보게 됐습니다. 영화는 미셸 공드리의 <인테리어 디자인(Interior Design)>, 레오스 카락스의 <메르드(Merde)>, 봉준호 감독의 <흔들리는 도쿄(Shaking Tokyo)> 등 세 편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한 편씩 살펴보겠습니다.
<인테리어 디자인> 가구가 된 청춘
개인적으로 <도쿄!>의 세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영화였습니다. 도쿄라는 거대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는 여성의 이야기인데 그 표현 방식이 참 독창적입니다.
최근 미셸 공드리 감독이 아이폰7로 만든 단편영화 ‘Detour’를 본 적 있는데 그 영화에는 세발 자전거가 나옵니다. 한 아이가 가족과 함께 바캉스를 떠나는데 세발 자전거가 차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여행을 합니다. 자전거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아이가 있는 해변까지 오게 되는데 거기서 아이가 행복하게 놀고 있는 모습을 몰래 엿봅니다.
공드리는 이처럼 사물을 의인화하는 데서 이야기적 재미를 추구하는 감독인데요. <비카인드 리와인드>(2008)에도 비디오테이프를 의인화한 장면이 있죠. <인테리어 디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로코(후지타니 아야코)는 재능은 없지만 열정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남자친구 아키라와 함께 도쿄로 옵니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그들은 히로코의 친구 아케미(이토 아유미)의 좁은 집에서 기생하며 살아갑니다.
남자친구는 자기 일에 빠져 히로코의 감정에는 무심하고, 아케미의 남자친구는 집이 더 좁아졌다며 불평을 늘어놓고, 설상가상으로 불법주차해둔 차가 견인돼 폐차 위기에 처하자 히로코는 절망에 빠집니다.
그녀는 알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상품을 포장하는 테스트를 받는데 혼자만 종이로 고양이를 접습니다. 이는 상징적으로 히로코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어서 기억에 남습니다. 그는 태생적으로 세상에 어울리지 못하는 고양이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어느날 히로코는 거울을 보다가 자신의 가슴이 뻥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도쿄에서의 삶이 고달프고 속이 허할 정도로 공허해서일까요? 하지만 글자 그대로 뻥 뚫려서 손을 가슴의 앞뒤로 집어넣으면 마주잡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다음 장면에선 히로코의 발이 변해 있습니다. 딱딱하고 얇은 나무가 되어 신발이 무용지물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영화는 점점 히로코가 무언가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씩 바뀌어가더니 결국 하나의 물건이 되는데 그것은 바로 나무의자입니다.
히로코는 의자가 되어 거리에 놓이게 되고, 한 남자가 그 의자를 집으로 가져갑니다. 이제 히로코는 생면부지의 한 남자와 함께 살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 당황하던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의자로 사는 삶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의문점은 의자였습니다. 왜 히로코는 의자로 변해야 했을까요?
우선 히로코의 성격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그녀는 책임감이 강한 여성입니다. 그녀는 차가 견인된 뒤 트렁크의 짐을 찾기 위해 홀로 자동차 보관소를 찾아갑니다. 결국 자질구레한 짐을 찾아서 지하철로 실어 옵니다. 그 짐들은 남자친구의 영화를 극장에서 상영할 때 필요한 장비였죠. 이런 히로코에 비하면 남자친구는 무책임한 캐릭터죠.
히로코는 또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친구에게 신세를 지지 않기 위해 집을 아직 구하지 못했으면서도 구하게 됐다고 억지로 거짓말을 하고요. 또 부동산 잡지에 나온 여러 집들을 일일이 찾아가보기도 합니다. 결국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을 보고는 집 구하기를 포기하지만 말이죠.
히로코에게 절망은 이렇게 열심히 하는 데도 결국 방 한 칸 구하지 못하고,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는 데서 옵니다. 허당 같은 남자친구는 영화 상영 뒤 그나마 인정을 받지만 히로코는 그에 비해서도 존재감이 없습니다.
인간일 때 못 느끼던 존재감을 히로코는 의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느낍니다. 의자는 최소한 그 의자에 앉을 한 사람에게는 쓸모가 있는 사물이니까요. 다른 어떤 인테리어 디자인과 달리 의자는 그 자체로는 완벽한 가구가 못 되지만, 한편으론 의자만큼 인간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가구도 없습니다.
의자가 된 히로코는 사람이 없을 땐 벌거벗은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도쿄라는 도시에서 히로코는 벌거벗거나 혹은 의자로서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공드리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청춘을 이렇게 의자에 빗대 도시 곳곳에 숨어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메르드> 하수구에서 나온 광인
프랑스어로 ‘메르드’는 ‘똥’이라는 뜻입니다. 드니 라방이 연기하는 영화의 주인공은 똥같은 남자입니다. 소괄머리가 비었지만 1:9 가르마의 붉은 장발을 휘날리는 백인인 그는 녹색 재킷을 입고 구부정하게 걷는데 한쪽 눈은 멀었습니다. 하수구에서 튀어올라온 그는 긴자 거리를 걸으며 사람들이 들고 있는 물건을 닥치는대로 빼앗아 먹어댑니다. 그는 꽃을 먹고 돈을 먹습니다.
레오스 카락스 감독은 이 영화에서 광인 캐릭터를 선보인 이후 2012년 <홀리 모터스>에서 본격적으로 광인의 탄생 과정을 밝혔습니다. 말하자면 <메르드>는 <홀리 모터스>의 예고편인 셈입니다.
광인의 등장에 도쿄는 충격에 휩싸입니다. 뉴스에선 광인 때문에 공포에 떠는 사람들을 인터뷰해 보여줍니다. 하지만 아무도 광인이 어디에 사는지 모릅니다. 경찰이 출동할 때 광인은 다시 하수구로 숨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광인이 사는 하수구 안에는 욱일승천기가 놓여 있고 그 옆에는 수류탄이 있습니다. 이 상징적인 장면은 명백히 외부인인 광인 캐릭터가 사실은 일본이 감추고 싶어했던 전범으로서의 일본을 폭로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해줍니다. 이 미친 남자는 거리에 수류탄을 무자비하게 투척함으로써 그들이 저질렀던 만행을 그들의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돌려줍니다.
레오스 카락스의 눈에 비친 일본은 이처럼 하수구 속에 욱일기와 수류탄을 감춰놓고 사는, 겉과 속이 다른 나라였나 봅니다. 참으로 급진적인 단편입니다.
광인은 결국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들 두려워하던 세상은 그가 잡히자 다시 한 번 처리방식을 놓고 논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광인은 사형 집행 직전 사라져버립니다. 이 엔딩을 보며 어쩌면 광인은 애초에 실존하지 않은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도쿄라는 도시가 하수구에 수류탄을 감추고 있는 한, 언제든 그것을 터뜨리기 위해 광인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니까요.
<흔들리는 도쿄> 지진이 맺어준 사랑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히키코모리를 그리고 있습니다. 일본 하면 히키코모리의 나라죠. 사람들 사이에 벽이 높고, 체면을 중시하고, 신세 지는 것을 죽기만큼 싫어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니까요. 혼자 살아가기에 너무 편리한 나라이기도 하고요.
카가와 테루유키가 연기한 이름 없는 주인공은 10년째 집 안에서만 사는 남자입니다. 그의 일과는 문 열어놓은 채 화장실에서 잠자고, 쌓아놓은 책 읽고, 배달음식 시켜먹는 것이 전부입니다. 생활비는 아버지가 보내오는 돈으로 충당합니다. 그의 집에는 피자 박스와 화장지와 물병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디테일을 중시하는 봉 감독은 여기서도 화장지의 원, 피자 박스의 직사각형 등에서 재미있는 대칭을 만들어냅니다.
어느날 한 여자가 찾아옵니다. 정확하게는 피자 배달부입니다. 남자는 지금까지 배달부와 눈을 마주친 적이 없습니다만 그날은 달랐습니다. 다리에 찬 가터벨트를 보고 마음이 동한 것입니다. 얼굴을 들었는데 아오이 유우와 눈을 마주칩니다. 그 순간 땅이 흔들리고 여자는 바닥에 쓰러집니다.
여자에게는 여러 문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신이 스위치 모양으로 되어 있네요. 혹시 사이보그라도 되는 걸까요? 남자는 전원 버튼 모양의 문신을 누릅니다. 그러자 여자는 깨어납니다.
여자는 남자의 집을 둘러보더니 완벽하다며 탄성을 지릅니다. 히키코모리로 살기에 최적의 환경이라는 것이죠. 그리고는 그녀 역시 히키코모리가 되기 위해 피자 배달을 그만 둡니다.
영화가 여기서 끝났다면 일본사회의 한 단면을 시크하게 보여주는 정도에 그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봉 감독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런데 그 걸음은 <플란다스의 개>처럼 엉뚱한 방식이 아니라 <옥자>처럼 굉장히 보편적인 방식입니다. 이때부터 봉 감독의 스토리텔링은 국제적으로 통용될 보편성을 향해 가고 있었나 봅니다. 어쨌든 이 단편은 <도쿄!>의 세 편 중 가장 밝은 엔딩을 갖고 있습니다.
남자는 10년 만에 집 밖으로 나갑니다. 여자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에 빠진 거죠. 그런데 10년만에 걷는 거리가 텅 비어 있습니다. 모두들 히키코모리가 되어 집에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피자를 배달하는 로봇만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네요.
남자는 여자의 집을 찾아가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칩니다. 하지만 여자는 저항합니다. 그때 다시 한 번 지진이 발생하고 그제서야 사람들이 집밖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남자는 여자의 문신에 있는 사랑 버튼을 누릅니다. 이제 두 사람의 인생은 더 이상 하나가 아닌 둘이 될 수 있을까요?
<흔들리는 도쿄>의 만듦새는 세 편 중 가장 매끄럽습니다. 봉 감독은 특유의 뛰어난 세공술로 결국은 사랑만이 해결책이라는 결말을 향해 내달립니다.
미셸 공드리, 레오스 카락스, 봉준호
세 편의 영화는 모두 소외된 인물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집 안의 인테리어로 숨거나(<인테리어 디자인>), 일본의 치부를 까발리는 테러를 저질러 사형당할 위기에 처하거나(<메르드>), 혹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사랑을 찾아 나섭니다(<흔들리는 도쿄>).
영화 초반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에 비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두운 편입니다. 혹시 도쿄라는 도시를 좋아하는 분이 있다면 이게 왜 도쿄냐며 항의할 법도 합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한국에서 온 외부자인 세 예술가가 바라보는 도쿄는 이런 곳인가 봅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다른 국적의 감독이 한 명 더 참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왠지 한 가지 시선으로만 한 도시를 바라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도쿄! ★★★☆
소외된 자들의 도시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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