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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인 파리>의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니어스>의 스콧 피츠제럴드, <일 포스티노>의 파블로 네루다, <토탈 이클립스>의 아르튀르 랭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작가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팬들을 설레게 한다. 글쓰기는 정적인 작업이어서 인물의 동작이 필요한 영화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의외로 궁합이 잘 맞는다. 그들이 스크린에서 글을 쓰고 글이 낭독되는 순간, 영상은 종이가 되고 음성은 사운드트랙이 된다.


영화는 작가들을 어떻게 그려왔을까? 특히 위대한 작품을 남긴 문호를 영화는 어떻게 영상언어로 풀어냈을까? 네 가지 유형으로 살펴봤다.



#1.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


허기진 야수처럼 글감을 찾아 헤맨 작가들이 있는가 하면, 삶이 고스란히 글이 된 작가들도 있다. 작가의 삶이 드라마라면 각색이 필요 없다. 영화로 옮기기만 하면 될 테니까.


파블로 네루다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작가도 드물다. 정치와 문학을 넘나든 그의 삶이 곧 칠레의 현대사를 상징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삶은 영화 소재로도 환영받는다. 1994년작 <일 포스티노>가 이탈리아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순수한 서정시 같은 영상을 만들어냈다면 2016년 작 <네루다>는 칠레에서 경찰에 쫓기던 시절의 네루다를 그린다.



<네루다>


영화 <네루다>는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던 44세의 네루다가 주인공이다. 그는 1948년 공산당과의 연립 내각을 파기한 비델라 대통령의 탄핵을 주도하며 ‘나를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연설을 한 뒤 국가원수 모독죄로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된다.


수사반장 오스카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오스카와 네루다의 쫓고 쫓기는 과정을 그린다. 네루다는 도피 기간 중 역작 ‘모두의 노래'를 쓰면서 자유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그를 잡아야 하는 오스카조차 네루다가 쓴 책에 매료된다. 총보다 강한 글의 힘이다. 칠레 배우 루이스 그네코가 네루다를 연기하고, 케네디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미망인을 그린 영화 <재키>의 파블로 라라인이 연출을 맡았다.


<일 포스티노>


지난 3월 재개봉한 <일 포스티노>는 네루다가 칠레를 탈출해 유럽을 떠돌다가 이탈리아 시실리의 작은 섬까지 온 1950년대 초가 배경이다. 이때 그는 고작 40대 중반이었지만 영화는 환갑이 지난 필립 느와레를 캐스팅해 네루다를 인자한 할아버지로 바꾸어 놓았다.


영화의 주인공은 네루다에게 편지를 배달하는 순박한 시골청년 마리오다. 까막눈인 그는 네루다를 만나면서 시에 눈을 뜨지만 대체 시를 어디에 쓸 수 있는 거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때론 시가 의사보다 더 소중하다. 동네 처녀에게 첫 눈에 반한 마리오는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되는데 이 병을 치유해줄 수 있는 것은 시뿐이다. 마리오와의 우정 덕분에 네루다 역시 세상에 대한 애정을 되찾는다. “시가 나를 찾아왔다”는 네루다의 서정시가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녹아든다.


<일 포스티노>는 실제 사건을 그린 영화는 아니다. 영화의 원작 소설은 네루다가 아옌데와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후 칠레의 외딴 섬에서 휴양하던 1970년가 배경이다. 네루다가 한때 이탈리아에 망명했다는 사실에서 착안해 감독이 장소를 바꾸고 허구의 주변 인물과 사건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네루다라는 시인의 삶이 가진 상징성과 잘 어울려 그럴 듯한 허구의 산물이 되었다.


<동주>


한국영화 <동주>에 등장하는 시인 윤동주의 삶 역시 드라마틱하다. 평생 시밖에 모르던 동주가 일제강점기 현실에 눈 뜨고 저항시인으로 거듭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절친 송몽규와의 우정과 질투였다. 감옥 안에서 쇠창살 사이로 별을 보며 시를 떠올리는 동주의 맑은 눈망울이 인상적인 영화다.


윤동주의 시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변함없이 사랑받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작품 속에 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그가 겪었던 절절한 고뇌와 반성의 시간이 눈에 보인다. 그는 자화상을 쓸 때 우물 속에서 부끄러운 자신을 보고, 참회록을 쓸 때는 밤마다 거울을 닦는다. 삶 자체가 시인 청년의 내면에서 우리는 순수한 감정의 원형을 본다. 마치 잠 못 이루던 오래전 어느 밤, 남몰래 쓰다가 다음날 구겨버린 원고지처럼, 속마음을 들킨 듯 뜨끔한 기분을 갖게 하는 시다. 강하늘이 윤동주로 분해 차분한 내면 연기를 펼쳐 보인다.



<비커밍 제인>


#2. 뮤즈와 사랑에 빠지다


작가도 사랑을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은 언제나 옳다. 영화는 심지어 사랑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작가마저도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준다. 사랑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그토록 멋진 작품을 쓸 수 있었겠냐는 듯이 말이다.


올해부터 영국 10만 파운드 지폐의 새 얼굴이 된 제인 오스틴은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가 중 한 명이다. 오스틴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렇다면 [오만과 편견]은 순수하게 상상만으로 쓰인 작품일까? 그에게도 소설 속 엘리자베스와 비슷한 사랑의 경험이 있지 않을까? 영화 <비커밍 제인>(2007)은 이 같은 추측을 바탕으로 한다.


<비커밍 제인>


전기 작가 존 스펜스가 오스틴을 연구해 2003년 쓴 [비커밍 제인 오스틴]에는 오스틴이 스무 살 무렵 만난 톰 리프로이와 사랑에 빠졌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3년 후 리프로이는 다른 여자와 결혼해 딸 이름을 제인이라고 짓는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미묘한 이 작명에서 영화는 힌트를 얻는다.


영화는 [오만과 편견] 서사에 오스틴의 실제 이야기를 접목한다. 앤 해서웨이가 연기한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처럼 로맨틱한 남자 톰과 조건 좋은 남자 위슬리의 마음을 동시에 얻는다. 영화 속 오스틴은 그가 쓴 작품 속 캐릭터처럼 ‘밀당’의 고수로 그려진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


위대한 작품을 쓴 작가에게 실제 뮤즈가 있었다는 상상은 셰익스피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순수한 허구가 아니라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실제 겪은 사랑 덕분에 탄생한 작품이라고 말한다. 작품을 쓰던 그에게 운명처럼 한 뮤즈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1593년 슬럼프에 빠져 글을 쓰지 못하던 젊은 셰익스피어는 연극 오디션에 찾아온 한 소년을 보자마자 매혹 당한다. 알고 보니 그는 배우가 되고 싶어 남장을 하고 무대에 오른 소녀 바이올라였다. 셰익스피어는 사랑에 빠지지만 바이올라는 귀족 가문과 정략결혼이 예정돼 있다. 괴로워하던 셰익스피어는 쓰고 있던 희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결말을 수정해 비극으로 바꿔버린다. 조셉 파인즈가 셰익스피어, 바이올라는 기네스 팰트로가 연기했다.


<킬 유어 달링>


1950년대 자유분방함을 추구한 '비트 제너레이션' 문학가들에게도 매혹적인 뮤즈가 있었다. ‘하울’을 쓴 앨런 긴즈버그, ‘길 위에서’의 잭 케루악, ‘네이키드 런치’의 윌리엄 버로우즈 등 당대의 문학청년들은 일제히 한 청년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 묘령의 남자는 제도권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세상 속에서 제멋대로 사는 루시엔 카다. 긴즈버그는 그를 위해 시를 쓰고, 카를 가르치는 교수는 그를 잃을까 전전긍긍하며 스토킹까지 한다.


영화 <킬 유어 달링>은 당시 문학청년들과 루시엔 카가 겪은 ‘의문의 밤’을 소재로 한다. 영화의 제목은 글을 퇴고할 때 가장 마음에 드는 문장부터 없애라는 뜻의 숙어로, 영화에선 작가들의 뮤즈를 죽이라는 중의적 의미도 담고 있다.


퇴폐적인 매력이 가득한 루시엔 카는 데인 드한이 연기하고, 앨런 긴즈버그는 <해리 포터>의 다니엘 래드클리프, 잭 케루악은 잭 휴스턴, 윌리엄 버로우즈는 벤 포스터가 연기한다. 제임스 딘을 연상시킬 정도로 매력적인 삶을 살았던 카는 역사 속에서 잊혀지고, 카를 흠모하던 주위 인물들이 모두 걸작을 남긴 것을 보면, 글을 쓰는 데 필요한 것은 재능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뮤즈는 그에게 매혹당한 작가가 있기에 더 빛나는 것 아닐까.



<카포티>


#3. 집요하게 매달려 치열하게 쓰다


작품이 특별할수록 사람들은 그 작품이 만들어진 과정도 흥미로울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글을 쓰고 다듬는 과정 자체가 훌륭한 영화 콘텐츠가 된다.


트루먼 카포티는 소설 [티파니에서 아침을]이 히트한 이후 자기에게 따라붙는 로맨스 작가라는 타이틀이 싫었다. 커밍아웃한 게이인 그는 성 정체성과 계급사회를 주제로 한 소설을 잇달아 내놓았지만 사람들의 고정관념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카포티>


영화 <카포티>는 카포티가 이런 선입견을 극복하기 위해 차기작을 쓰는 과정을 담는다. 그는 1959년 캔자스 주의 한 농장에서 벌어진 일가족 살인사건을 접한 뒤 직접 현장을 찾아간다. 무려 6년이라는 기간 동안 감옥까지 찾아가 범인과 함께 생활할 정도로 그는 취재에 공을 들인다. 정성이 통했는지 그는 다른 사형수들로부터 수십 통의 편지를 받을 정도로 범죄 심리 전문가가 되어 있다.


결국 성 정체성만큼이나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을 혼동하게 된 카포티는 나중엔 작품을 서둘러 완성해 이 사건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범인의 사형이 빨리 집행되기를 바라기까지 한다.


이토록 치열한 취재 과정 끝에 카포티가 6년만에 완성한 [인 콜드 블러드]는 세계 최초의 논픽션 문학으로 역사에 남았다. 카포티의 극도로 예민한 성격을 절묘하게 포착한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연기가 돋보인다.


<지니어스>


집요한 집필 과정을 담은 영화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은 <지니어스>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등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펴낸 전설의 편집자 맥스 퍼킨스는 새로운 천재 토마스 울프를 발견하고는 그와 호흡을 맞춰 초고를 다듬어간다. 5000장의 엄청난 분량을 4년간 편집한 끝에 세상에 나온 책이 1930년대 미국문학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칭송받은 [천사여, 고향을 보라]이다.


퍼킨스가 알아보기 전까지 울프는 희곡 몇 편을 쓴 무명작가에 불과했다. 그는 유럽을 여행하고 돌아와 26세에 자전적인 삶을 바탕으로 장편소설을 써 여러 출판사에 투고하지만 글이 너무 장황하고 젠 체한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는다.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같은 울프의 글에 매료된 퍼킨스는 그를 다이아몬드로 깎아낸다.


<지니어스>


주드 로가 연기한 울프와 콜린 퍼스가 연기한 퍼킨스는 거의 브로맨스에 가까운 관계로 밤낮으로 소설에 꼭 필요한 ‘한 문장’을 찾기 위해 몰두한다. 퍼킨스의 아내는 지나치게 가까운 두 사람의 관계를 동성애로 의심하기까지 하는데 그가 아내와 벌이는 일화는 작업이 얼마나 집요했는지를 단박에 설명해준다.


가정에 소홀하다며 불평하는 아내에게 퍼킨스는 이렇게 말한다. "톰 같은 작가는 일생에 한 번밖에 못 만나." 참다못한 아내는 화를 내며 되받는다. "당신 딸들도 이번 생이 지나면 없어."


퓰리처상 수상자인 A. 스콧 버그가 1978년 펴낸 전기소설 [맥스 퍼킨스: 천재의 편집자]가 원작이다.



<디 아워스>


#4. 평범한 일상에 상상력을 가미하다


꼭 드라마틱한 삶이 아니더라도, 잔잔한 일상도 얼마든지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여백이 많을수록 영화로 옮길 때 오히려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더 커진다.


영화 <디 아워스>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모티프로, 서로 다른 세 가지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 교외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이야기, 두 번째 에피소드는 195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댈러웨이 부인]에 빠져 있는 주부의 이야기, 세 번째 에피소드는 2001년 미국 뉴욕에서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출판사 편집자의 이야기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세 여성은 우연히 같은 날 일탈을 감행한다. 이들은 전혀 다른 시공간 속에 있지만 그 시공간은 하나의 운명적인 실타래로 엮여 있다. 그 실타래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거의 한 세기 전 선구적인 여성 작가와 만난다. 울프의 작품이 그녀 시대 이후 여성들의 삶에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영화는 세 여인의 일탈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 역은 니콜 키드먼이 맡았다.


<패터슨>


영화 <패터슨>은 위대한 시인이 남긴 유산이 현대 일상에서 어떻게 계승되는지를 보여준다.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 주 소도시의 지명이자 이곳에서 버스를 운전하며 시를 쓰는 남자의 이름이다. 패터슨이 흠모하는 시인은 패터슨 출신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로 그는 5부작 서사시 [패터슨]을 남겼다. 상징주의를 배격하고 “관념이 아닌 사물로 말하라”고 주장하며 객관적인 시를 추구했던 윌리엄스처럼 패터슨도 철저히 일상의 소재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성냥갑 글자의 폰트, 사랑하는 아내와의 잠자리, 반복되는 무늬 등이 그를 통해 시어로 재탄생한다.


영화는 패터슨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세상의 표면을 오랫동안 관찰해 자신만의 독립된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좇는다. 윌리엄스는 반세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은 남아 일상의 패터슨 같은 무명의 시인에게 영감을 불어넣으며 전승되고 있다.


* [BBB] 7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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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
영화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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