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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꿈 있어?"

햇살 눈부신 초원에서 스타(사샤 레인)가 묻는다.


"미래의 꿈? 그런 질문 처음 받아봐."

당황하던 제이크(샤이아 라보프)가 말한다.

"뭘 모으고 있어. 비밀인데 나중에 보여줄게."


그날 밤 제이크는 숨겨둔 가방에서 훔친 돈과 금붙이를 꺼내 보여준다.


"이게 어떻게 꿈이 될 수 있어?"

스타가 다시 묻자 제이크가 답한다.


"이게 내 꿈을 사줄 수 있을 거야. 숲에 내 집을 하나 갖고 싶어. 노예의 퇴직금처럼. 언젠가."



13일 개봉한 영화 <아메리칸 허니: 방황하는 별의 노래>(이하 <아메리칸 허니>)는 돈을 벌기 위해 승합차를 타고 미국을 유랑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다. 가정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을 나와 떠돌아다니는 스타는 오클라호마에서 우연히 제이크를 만나 로드트립 대열에 합류한다. 대장 크리스탈(라일리 코프)이 이끄는 10여명 안팎의 청춘들은 승합차 한 대에 몰려 타고 전국을 누비며 낮에는 잡지를 방문판매하고 밤에는 신나게 파티하는 생활을 한다.


영화는 특별한 내러티브 없이 163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청춘들을 쫓는다. <오즈의 마법사>의 도시 캔자스에서 시작한 그들의 여정은 네브라스카의 부유한 마을, 사우스 다코타의 유전, 미네소타의 빈민촌 등 미국 중서부 지방을 따라 계속된다.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를 흠모하고, 속옷을 훌렁 벗어던지고, 시끌벅적하게 춤을 추는 청춘들은 무모하리만치 자유분방해 보인다. 그들은 내일이 없을 것처럼 뛰고, 넘어지고, 발광한다. 현실에 억눌려 있던 스타는 점점 이들의 세계에 적응해 간다. 그는 함께 노래하고, 춤 추고, 크리스탈의 감시를 피해 제이크와 풀밭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영화는 두 편의 고전 히피 영화를 떠오르게 한다. 오클라호마에서 출발한 청년이 히피들의 무리에 들어가 함께 생활한다는 설정은 <헤어>(1979)와 닮았고, 반항적인 청춘 남녀가 목표없이 떠돌며 감정을 소모하는 과정은 <자브리스키 포인트>(1970)와 유사하다. 단, 영화는 시끌벅적한 히피 뮤지컬 <헤어>보다 감성적이고, 차가운 모더니즘 스타일의 히피 로맨스 <자브리스키 포인트>보다 생동감 있다. (공교롭게도 미국을 배경으로 한 세 편의 감독이 모두 유럽 출신 이방인이라는 점도 닮았다.)



영화 속 청춘들은 겉보기엔 영락없는 히피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히피들은 일상 밖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평범한 삶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영혼인 반면, <아메리칸 허니>의 청춘들에겐 불문율로 지켜야 하는 엄격한 규칙이 있고, 뒤처지면 낙오해야 하는 매일의 경쟁이 있다.


청춘들은 자유분방한 삶을 누리는 대가로 매일 노동한다. 디지털 시대에 아무도 사지 않는 잡지를 팔기 위해 그들은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 화려한 말빨로 사람들을 유인하고, 때론 협박하거나 구걸한다. 쇠락하는 잡지의 운명과 청춘의 운명이 겹쳐 보여 영화 속 이들의 모습은 더 불안정하고 구차해 보인다. 그들이 문을 두드리는 집 안에는 석유 노동자, 기독교 신자, 카우보이, 마약중독자, 가난한 아이 등 다양하면서 전형적인 인간군상이 살고 있다. 부자이건 빈자이건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갑을 열게 할 수 있느냐일 뿐이다.



청춘들은 세일즈 전투에 나서기 전 승합차 안에서 리한나의 'We found love'를 목청껏 소리쳐 부르며 정신무장을 한다. "희망없는 세상에서 사랑을 찾았다"는 후렴구 노랫말은 이들의 처지와 딱 맞는다.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매일 어디론가 떠나는 승합차 안은 탈출구 없는 세상인 듯 답답해 보인다. 영화는 1.37:1 비율의 좁은 화각 안에 청춘들을 가둬 놓아 이러한 효과를 더 극대화한다. 또 반복적으로 성조기 이미지를 삽입함으로써 이것이 현재진행형 미국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영화를 만든 영국인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은 1999년 인위성을 배제하는 '도그마95' 선언에 기초한 영화 <레드 로드>로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렸다. 핸드헬드 카메라, 자연광, 무명 배우 캐스팅 등 그는 이후에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했고 <아메리칸 허니>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영화 속 청춘들은 샤이아 라보프와 라일리 코프를 제외하고 대부분 길거리 캐스팅으로 선발한 배우들이 연기하는데 특히 주인공 스타 역의 사샤 레인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어두운 밤 실루엣으로 처리되는 마지막 장면의 울림은 오랫동안 이 영화를 기억하게 해줄 것이다. 아놀드 감독은 이 영화로 무려 세 번째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아메리칸 허니>는 자유로운 청춘을 마냥 찬미하거나 꿈을 향해 전진하라고 조언하는 영화는 아니다. 캄캄한 밤 깊은 호수에서 빠져죽을 위기에 처한 21세기 청춘의 초상을 몽롱하게 바라보는 영화다. 헐벗은 가난 속에 실오라기 같은 작은 꿈 하나를 간직한 청춘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거의 무방비 상태로, 아무 기교도, 장치도 없이 드러난다. 이들의 행동은 때론 아슬아슬한 수위를 넘나들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춘이라는 증거다. 내러티브가 아닌 이미지로 기억에 남는 영화, 머리보다 가슴으로 보는 영화다.


아메리칸 허니: 방황하는 별의 노래 ★★★☆

실오라기 같은 꿈 하나 걸친 청춘. 흔들리며 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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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
영화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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