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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의 역작 [호모 데우스]는 [사피엔스]에 이은 문제작입니다. 제 생각에는 [사피엔스]보다 이 책을 더 읽어야 할 것 같은데요. [사피엔스]의 확장판이자 더 깊은 이야기를 하는 책입니다. 꽤 두껍기 때문에 두려움을 가질 분들을 위해 제가 이 책을 요약해보려 합니다.
‘호모 데우스’에서 ‘데우스’는 ‘신’이라는 뜻입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이제 호모 데우스, 즉 신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제명입니다. 책은 크게 프롤로그와 3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프롤로그
하라리는 인류의 역사를 현대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각각 무엇을 추구해온 역사였는지를 서술합니다. 과거의 인류는 기아, 질병, 전쟁이 3대 악재였습니다. 대부분 이 세 가지 때문에 죽었습니다. 농사 작황, 유행병, 부족 혹은 국가간 충돌은 인간의 생사와 직결됐습니다.
하지만 현대 인류는 이 세 가지를 정복했습니다. 이제 가난해서 죽는 사람은 거의 없고, 전염병은 오래 지속되지 않고, 전쟁은 적어도 문명 국가에서는 발발하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던 인류는 이제 점점 죽음을 정복해가고 있습니다.
총보다 당뇨병으로 죽는 사람이 훨씬 많은 시대입니다. 당뇨, 암 등은 여전히 인간을 죽이고 있지만 이는 현대만의 현상은 아니고 과거에도 그랬습니다. 다만 암에 걸리기 전에 죽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도드라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어쨌든 인간은 이 만성 질병도 서서히 정복해가고 있습니다.
새로 제시된 현대 인류의 목표는 불멸, 행복, 신성입니다. 특히 불멸 추구는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인류는 게놈지도를 해독하고 있고, 뇌연구를 하고 있고, 암 정복을 위해 연구하고 있는데 이 모든 행동들의 목표는 죽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하라리는 불멸의 향한 인간의 전진은 제어할 수 있는 구심점이 없기에 결코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행복이야말로 가장 정의하기 어렵고, 달성하기 어려운 가치입니다.
또, 성장이 모든 지배체제의 가치가 되면서 그 속에서 소외된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기대치가 올라갈수록 만족감은 줄어드는 가치입니다. 인류의 가장 큰 난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불멸과 행복을 통해 인류는 신성, 즉 호모 데우스가 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40만년 동안 살아온 호모 사피엔스와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항상 변화해왔습니다. 역사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위대한 상수가 있다면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입니다. 지금은 대변화의 시기입니다.
1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를 정복하다
인간이 지구를 정복한 결정적인 원인은 무엇일까요? 도구를 사용할 수 있어서? 손놀림이 민첩해서? 영혼이 있어서? 머리가 뛰어나서? 아닙니다. 2만년 전의 사피엔스도 지금의 인류와 비슷한 지능을 갖고 있었지만 그땐 인류가 지구의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하라리는 결정적인 이유를 '협업'에서 찾습니다. 인간은 여럿이서 유연하게 협력할 수 있는 지구 상의 유일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인류가 다른 동물과 달리 문명을 일군 비결은 협업에 있습니다.
인류는 ‘의미의 그물망’을 짜고 그것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이를 위해 스토리를 만들고, 스토리를 퍼뜨려서 여러 사람들이 하나의 스토리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도록 합니다.
예를 들어, 십자군 원정의 경우, 지금 생각해 보면 천국에 가기를 바라면서 십자군 전쟁에 나선다는 것은 미친 짓처럼 들립니다. 또 냉전은 어떤가요?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건 무모해 보입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신이 구원해 주리라는 믿음, 공산주의 낙원에 대한 믿음 때문에 소중한 목숨을 걸었습니다.
따라서 현재 보편적인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백년 뒤에 평가해 보면 똑같은 방식으로 후손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인류가 만든 ‘상호주관적 의미망’ 속에는 공동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법, 힘, 실체, 장소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협업하게 합니다. 그 결과 인간은 십자군, 사회주의 혁명, 인권운동을 조직할 수 있습니다. 본 적도, 맛본 적도 없지만 인류는 미국 달러, 구글 기업, 유럽연합 같은 비현실적인 것들을 상상하고 또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하라리는 이것이 인류가 세계를 정복하도록 만든 가장 큰 힘이라고 말합니다.
인류는 미국, 달러, 구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들고, 그것을 공동체의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2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
최초의 인류가 만든 상호주관적 의미망은 종교를 탄생시켰습니다. 종교는 의식과 생활양식으로 나타나 인류가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종교와 과학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깝습니다. 오히려 종교와 영성의 거리가 훨씬 더 멉니다. 종교는 의미이고, 과학은 힘입니다. 종교는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고, 과학은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합니다. 그러니 궁합이 잘 맞는 조합입니다.
갈릴레이 같은 과학자가 종교 때문에 핍박받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단편적인 사실일 뿐 큰 그림으로 보면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종교가 보호해 주었기에 중세 시대에 과학이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뉴턴 같은 힘을 연구하는 물리학자가 왜 중세 시대에 나타났는지 생각해보세요.
중세 유럽의 종교는 과학이 제공한 힘을 바탕으로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반면 진정으로 영성을 추구한 자들은 종교를 떠났습니다. 예수, 부처, 마르틴 루터 등은 기존 종교를 벗어나 구도의 길을 걸었고, 그 결과 그들 자신이 새로운 종교가 되어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세속화되었습니다. 즉, 종교는 교리로는 영성을 주장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영성을 거부해왔습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이래, 현대 사회에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종교는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종교는 인본주의입니다. 민주주의, 인권 등은 인류의 절대적인 믿음을 얻고 있는 또다른 종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역사는 과학과 인본주의의 계약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장대한 우주적 계획이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했다면, 인본주의는 역할을 뒤집어 인간의 경험이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합니다.
근대 이전에 진리란 성경을 깊이 연구해야만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지식의 공식은 ‘지식=성경x논리’였습니다. 학자들은 더 많은 문헌을 읽고, 그 문헌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자신들의 논리를 갈고 닦았습니다.
과학혁명은 ‘지식=경험적 데이터x수학’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기에는 가치가 빠져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서 가치를 결정하는 역할은 종교가 담당했기 때문에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본주의는 ‘지식=경험x감수성’을 제시했습니다. 경험과 감수성은 끝없는 고리로 이어져 서로를 강화합니다. 인본주의적 삶의 최종 목표는 광범위한 지적, 정서적, 육체적 경험을 통해 지식을 온전히 발현시키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 신은 죽었고, 그 지위를 인간이 물려받았습니다.
인본주의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사회주의적 인본주의, 진화론적 인본주의로 구분됩니다. 20세기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인본주의들의 투쟁 과정이었습니다. 히틀러로 대표되는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소련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에 패퇴했고, 이는 다시 자유주의적 인본주의가 물리쳐 지금 세상은 자유주의적 인본주의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개인주의, 인권, 민주주의, 자유시장이라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패키지를 대신할 대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과거의 종교인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 등에는 창조적인 힘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윤리적 진보뿐만 아니라 기술적 진보도 도맡았습니다. 로마 교황청은 12세기에는 지금의 실리콘밸리와 비슷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수도원은 천 년 동안 유럽 경제를 이끈 최초의 경제수도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들 유신론 종교들은 창조하는 힘에서 반응하는 힘으로 바뀐 지 오래입니다. 새로운 기술, 획기적인 사상을 창조하기보다는 버티기 작전을 쓰기에 바쁩니다. 피임약을 막고, 인터넷을 막고, 페미니즘에 맞서기 위해 골몰합니다. 창조적인 힘이 아닌 수동적인 반박의 힘이 된 것입니다. 이런 종교가 인류의 미래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과거엔 종교가 창조를 담당했지만, 오늘날 그 역할은 과학이 넘겨받았습니다.
오늘날 창조의 힘은 과학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19세기 마르크스와 레닌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던 이유는 당시 고대 문헌을 연구하기보다 당대의 신기술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증기기관, 철도, 전신, 전기의 운영방식과 그 문제점에 천착한 결과, 정보와 자원을 하나의 허브에 집적하고 분배하는 공산주의의 기본 원리를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변화는 창조로부터 시작합니다. 오늘날 창조의 주도권을 쥔 쪽은 과학입니다. 과학은 인류가 200년 이상 믿어온 인본주의를 근본부터 흔들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인본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도 변할 것입니다.
3부. 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낱낱이 해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인간보다 더 잘 아는 알고리즘에게 인간에 대한 지배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기계보다 나은 이유로 흔히 자유의지를 듭니다. 마음까지는 흉내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 자유의지, 영혼 등은 상상 속 단어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믿는 자아는 허구의 개념입니다. 자유의지도 영혼처럼 느낌일 뿐입니다.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밝힌 것은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에 따르면 모든 동물의 선택은 유전자가 결정합니다. 만약 어떤 동물이 자유의지로 선택을 한다면 그 종은 멸종할 것입니다. 자유의지로 사냥을 하지 않는 동물은 폼은 났을지 몰라도 생존에는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모든 선택은 결정론과 무작위성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자유’가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자유의지가 느껴지는데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요? 하라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뇌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반응들이 자유의지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자유의지가 실제로 있든 없든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자유의지가 있다는 느낌 자체를 누구도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은 상황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과학은 인간이 자유의지라고 믿고 있는 느낌도 조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뇌신경계 조작으로 A보다 B를 더 좋아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면 그때도 그것을 자유의지라고 불러야 할까요?
내가 무엇을 더 좋아하게 될지, 과학은 인간의 욕망을 조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선택은 욕망의 결과입니다. 욕망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감정입니다. 인간은 욕망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인간에게는 단지 의식의 흐름만 존재해서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확고한 불멸의 자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경험하는 자아’와 ‘이야기하는 자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결정에서 경험하는 자아는 원천배제됩니다. 모든 결정은 이야기하는 자아가 경험의 기억을 참조해 독단적으로 내립니다.
경험을 평가할 때 이야기하는 자아는 경험의 지속시간은 고려하지 않고, 경험의 정점과 마지막 순간만 기억해 둘의 평균으로 경험 전체를 평가합니다.
미래에는 일하지 않는 계층이 탄생할 것입니다. 이들은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요?
예컨대, 우리는 출산의 고통을 평가할 때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과 마지막 순간만을 기억해 둘 사이의 평균을 냅니다. 마지막에 아이를 안고 기뻤으면 고통의 강도도 약해집니다. 이런 원칙은 투표에서도 나타나 인간은 정치인의 평소 행동보다 선거전 막바지의 장밋빛 공약에 더 영향을 받습니다.
자유의지를 믿는 인본주의는 그동안 우리에게 두렵더라도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생명과학은 개인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생화학적 알고리즘들의 집합이 지어낸 허구적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으로 자유주의를 뿌리째 뒤흔듭니다. 내면의 소리가 인간에게 실질적 도움을 준 적은 거의 없다는 것이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봤자 고통만 환기될 뿐 도움이 되는 것은 프로작 같은 우울증 약이 효과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기술의 진보는 인간의 생화학적 시스템을 이해해 우리 내면의 목소리들을 통제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스위치들을 자유자재로 조작해 필요에 따라 볼륨을 높이고 낮추며 인생을 훨씬 더 쉽고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편함에 대해 현재의 인류가 갖고 있는 거부감이겠지만요.
미래 인간은 볼륨을 높이고 낮추며 인생을 훨씬 더 쉽고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이 대부분인 현재의 인류가 자유시장과 민주적 선거를 지지하는 이유는 모든 개인이 저마다 특별한 가치를 가지고 있고, 그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 권력의 궁극적 원천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향후 전개될 상황은 이 믿음을 무용지물로 만들 것입니다.
인공지능 같은 알고리즘이 인간을 뛰어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현재도 많은 분야에서 인간의 능력을 추월했습니다. 알고리즘이 인간 위에 위치한 또 하나의 상류계층이 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알고리즘이 여러 분야에서 일관되게 좋은 성과를 낸다면 지구 대부분은 알고리즘의 소유로 넘어갈 것입니다.
이미 지구 대부분의 법적 소유자는 인간이 아니라 국가와 기업 같은 상호주관적 실재들입니다. 사실 5,000년 전에도 수메르 땅 대부분의 소유자는 엔키와 이난나 같은 상상 속 신들이었습니다. 신이 땅을 소유하고 사람들을 고용했던 것처럼 앞으로는 알고리즘이 그 역할을 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현대의 새로운 종교는 데이터교입니다. 인간은 데이터를 숭배하고 믿고 따릅니다.
머지 않아 인간보다 인간에 대해 훨씬 더 잘 아는 알고리즘이 나타날 것입니다. 내 몸과 뇌를 구성하는 시스템 각각을 관리 감독하는 알고리즘은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알고리즘이 개발되면 유권자, 고객, 보는 사람의 눈을 대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는 알고리즘이 가장 잘 알고, 알고리즘이 항상 옳고, 알고리즘의 계산에 아름다움이 달려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변화에 대한 의견은 다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역사적 관점에서 이미 이런 변화가 시작됐고, 또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 인간은 정보를 숭배합니다. ‘데이터교’라고 할 정도로 데이터는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분석하는 토대가 되어 종교 역할의 일부까지 대체하고 있습니다. 데이터라는 알고리즘이 인간을 어디로 이끌지, 인류는 현재 변화의 망망대해 한복판에서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러나 어디론가 빠른 속도로 떠밀려 가는 중입니다.
유발 하라리
630쪽에 달하는 이 책은 주장이 뚜렷하고 사례가 많아 술술 읽힙니다. 군데군데 중복되는 문장이 꽤 있고, 또 3부에서 구글, 페이스북, MS 등 여러 IT 기업에서 개발한 인공지능 등을 예시로 드는 부분은 너무 지엽적이어서 실망스러운 면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전반적으로 인간이라는 종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생각해볼 만한 주제를 많이 던져주고 있어 얼어붙은 고정관념을 깨는 도끼같은 책입니다.
책을 읽고 나서 어쩌면 인류의 미래가 <매트릭스>, <공각기동대> 등의 영화에서 보여진 사이버 세상에 중독된 인간처럼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섬뜩해 보였지만 그것은 현재 시점에서 그렇게 보여지길 의도했기 때문에 나쁘게 보였던 것이죠. 실제로 그렇게 진화했을 때 그 변화가 인간에게 좋은지 나쁜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저의 생각 역시 자유의지가 아니라 그렇게 말하기로 결정되어 있는 유전자의 영향 때문이겠죠. 그렇게 되기를 바라게 되면 또 그 상황에 적응해 가는 것이 인간이니까요.
이런 결론이 슬픈가요? 혹은 기쁜가요? 어쩌면 인간은 감정과 느낌만으로 이루어진 유기체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이 책은 그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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