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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하반기에도 책을 계획보다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 책 20권을 꼽으면서 "조금 더, 조금 더 있을 거야" 이런 심정이었죠. 하지만 좋아하지 않았던 책을 여기에 억지로 집어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조금이라도 좋아했던 부분이 있으면 포함해서 겨우겨우 리스트를 만들었습니다. 2018년에는 조금 더 풍요로운 독서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2017년 하반기 추천작을 소개합니다.
매일이, 여행 - 요시모토 바나나
여행같은 일상에 관한 에세이. 바나나는 작은 추억을 뭉클한 문장으로 길어올리는 재주를 가졌다. 학창시절 풋풋한 첫사랑의 기억에 관해 쓴 ‘첫사랑보다’, 사랑하던 개와 이별하던 순간의 슬픔에 대해 쓴 ‘작별의 날’, 한때 아르바이트하던 카페의 점장과 오랫동안 이어진 인연에 관해 쓴 ‘꿈속 가게’, 은사의 단골 술집을 혼자 운영하는 할머니에 관해 쓴 ‘스시’는 참 좋다.
천천히, 스미는
김영하가 말했다. 죽은 사람의 책을 읽어야 실패하지 않는다고. <천천히, 스미는>은 이미 죽은 영미권 작가들의 산문 모음집이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삼십대 중반부터 불면증에 시들렸는데 특히 모기떼보다 더 무서운 모기 한 마리와 30분동안 씨름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지 오웰은 1940년 전쟁의 한복판에서 기적처럼 봄이 오는 이야기를 쓴다. 두꺼비는 눈이 예쁜데 수컷은 어느 시기가 되면 암컷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렇게 알이 나오고 알에서 올챙이가 나온다.
버지니아 울프는 전투기를 조종하는 남자들 대신 이제 여자들이 생각해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흑인 작가 리처드 라이트는 어린 시절 엄마에게 짐 크로우로 살기를 강요받았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짐 크로우는 1820년대 백인 배우 토마스 라이스가 흑인 분장하고 흑인을 희화화할 때 쓴 캐릭터 이름이다. 이후 차별을 규정하는 법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됐다.
오스카 와일드는 추천도서가 아닌 비추천도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익살스럽게 말하고, 마크 트웨인은 이탈리아어를 독학하는 과정에 대해 썼으며, 영국 시인 힐레어 벨록은 정치인들에게 구불구불한 길을 없애지 말라고 당부한다. 가볍게 읽기 좋은 문장들이 가득하다.
보고 싶어서, 가고 싶어서 - 박세열
건축사무실을 그만 두고 여행을 떠난 남자의 에세이. 미얀마, 태국, 라오스, 인도, 남미, 마다가스카르 등을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글을 쓴다. 그림 그려주고 현지인들과 어울리는 과정이 따뜻한 감수성의 글들과 함께 실려 있어 읽고 있으면 마음의 온도가 올라간다.
그림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언어다. 그림 그리는 여행을 해보고 싶게 만드는 에세이. 글도 참 잘 쓴다.
여행은 나를 찾는 과정이라는 거창한 것보다는 그저 그곳이 보고 싶어서, 가고 싶어서 그렇게 떠나는 것.
지금 지하철 옆에 앉아서 졸고 있는 아저씨가 어쩌면 배낭 하나 메고 전세계를 횡단하던 여행자였을지도 모른다. 슈퍼히어로처럼 나섰다가 결국 카오산로드에서 낮잠 자고 일어나 제 갈 길을 가는 여행객 말이다. 여행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시간은 여행의 기억을 소중하게 만든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 다니엘 글라타우어
실수로 잘못 전달된 이메일로 만난 레오 라이케와 에미 로트너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서간체 소설이다.
얼굴을 보지 않고도 글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두 사람은 메일로 뜨겁게 사랑한다. 남자는 언어를 공부하는 강사, 여자는 나이 많은 남자와 두 아이를 키우며 사는 유부녀다. 도덕적 굴레와 일탈의 경계에서 두 사람은 괴로워하며 서로에 대한 환상을 키워간다.
마지막 장면, 남자의 집에서 만나 블라인드 키스를 하기로 약속하는 두 사람을 묘사한 대목은 로맨틱하다. 하지만 결론은 차갑다. 달콤한 로맨스가 담긴 페이지 터너로 속편도 번역, 출판되어 있다. (그런데 나는 굳이 속편을 읽고 싶지는 않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알랭 드 보통
우연히 비행기에서 만난 클로에와 사랑에 빠진 나.
환상이 일상이 되고, 작은 불만이 점점 커져간다.
사랑은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지만 또 그것은 구속이기도 하다.
사랑에 대한 날카로운 해부가 담긴 알랭 드 보통의 베스트셀러.
이만큼 가까운 프랑스 - 박단
프랑스의 사회, 역사, 지리, 정치, 경제, 문화 등 프랑스에서 공부하며 오랫동안 프랑스 사회를 지켜봐온 저자가 들려주는 프랑스에 관한 이야기. 개인적으로는 앞부분 프랑스의 사회와 역사 부분을 관심 있게 봤고 뒷부분은 적당히 넘겼다.
히트 메이커스 - 데릭 톰슨
저널리스트 출신 데릭 톰슨이 히트한 상품을 분석해 공통점을 찾아본다. 어떤 노래, 영화, 그림 등 콘텐츠가 히트한다는 것은 사실 공통점을 찾기 정말 힘든 작업이다. 꼭 그 이유가 히트의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성실한 자료조사와 냉철한 분석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가장 진보적이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 안에 있는 것을 던지라는 레이먼드 로위의 MAYA(Most Advanced Yet Acceptable) 법칙, 인간의 마음이나 심리 구조 자체는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어서 25가지를 똑같이 하되 한 가지만 바꿔도 충분히 새롭게 보일 거라는 권고, 수많은 인상파 화가들 중 7명만 유명한 이유는 '카유보트 7인'에게 그들만의 스토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 친숙한 뭔가를 팔려면 놀랍게 만들고 놀라운 뭔가를 팔려면 친숙하게 만들라는 조언, 노래든 연설이든 사람들은 반복되는 것에 귀 기울인다는 분석, 인터넷의 정보는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것이 아니라 블록버스터처럼 퍼진다는 분석 등이 새롭게 다가온다.
대량살상수학무기 - 캐시 오닐
저자인 캐시 오닐은 수학자이자 데이터과학자로서 그동안 빅데이터가 어떻게 불평등을 심화시켰는지를 연구했다. 빅데이터라는 ‘보이지 않는 손’은 우리 일상에 유용하다고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대량살상무기처럼 위험하다는 그녀의 지적은 꽤 솔깃하다.
예를 들어, 1980년대 미국의 한 신문이 빅데이터로 대학 순위를 매기는 바람에 대학 서열화가 고착화됐다는 지적, 범죄예측시스템 프레드폴이 경범죄와 중범죄 데이터를 혼용하는 바람에 정작 필요한 지역에 경찰력이 동원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 일정관리 프로그램이 매장에 고객이 몰리는 시간을 분석하는 바람에 종업원들은 풀타임이 아닌 파트타임으로 일하기를 강요당하고 클로프닝(문 닫자마자 문 여는)이 빈번해져 노동 착취가 이뤄진다는 지적,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비행기 탑승이 거부되고 신용대출 비용이 높아지는 사람이 의외로 꽤 많다는 지적 등이다.
결과적으로 대량살상수학무기인 빅데이터는 가난한 자들에겐 가혹하고 부자들에겐 관대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비우량 담보대출이나 영리학교의 약탈적 광고로 융단폭격하고, 더 많은 경찰이 배치되고 더 무거운 형량을 선고하며, 보험에 가입할 때도 불리한 요율을 적용시키고 자동차를 살 때 높은 금리를 부과한다. 이는 다시 이들의 신용평가등급을 떨어뜨려 죽음의 나선 모형을 완성한다. 가난은 더 많은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꼬리표가 된다.
모네가 사랑한 정원 - 데브라 N. 맨코프
"모네는 일몰에 투과되는 빛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따라가서 그 미묘한 느낌을 캔버스에 옮겨놓을 수 있는 유일한 눈과 손을 지녔다." - 세잔
지베르니에 정착해 정원을 꾸미고 또 그 정원을 그리는 모네의 삶과 그림이 담긴 예쁜 책.
마이클 케인의 연기수업 - 마이클 케인
연기자가 될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대배우가 전해주는 인생에 관한 철학이 담긴 책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흠뻑 빠져라, 성공했다고 자만 말라, 사소한 움직임도 카메라에 다 찍힌다, 자신의 것을 철저하게 준비하라, 영화 연기는 경쟁이 아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라, 분장을 받고 나면 그 상태를 최대한 유지하라, 현장에선 항상 준비돼 있어라, 지나친 연습은 오히려 해가 된다, 그 인물이 되고자 한다면 훔쳐라 단 최고만을 훔쳐라.
케인의 아래 에피소드도 인상적이다.
“촬영하러 가는데 관광버스가 한 대 선 적 있다. 대부분의 배우들은 팬들을 피해 빠져나갔지만 나는 버스의 승객들에게 모두 사인을 해주었다. 알고 보니 그 버스기사가 <주라기 공원> 등의 기획자 마이클 오비츠였다.”
아날로그의 반격 - 데이비드 색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색스의 신작. 종이잡지를 만들고 싶고, 서점을 열고 싶게 하는 책.
여기 등장하는 사례는 디지털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나타난 반작용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인간의 승리 서사는 기분 좋게 한다. 신문, 잡지가 망해가고 대세는 디지털이라고 하지만 온라인으로 돈 번 곳은 드물고 크고 작은 매체들은 여전히 오프라인 매체로 돈을 번다. 버즈피드는 집중을 방해하는, 한 번 훑고 지나가는 저렴한 콘텐츠를 양산하지만 종이잡지는 찢어버리기 전에는 보게 되는 더 고급스러운 콘텐츠를 만들어낸다는 것도 아날로그만의 매력이다.
동네 서점은 친밀도를 높이는 커뮤니티 역할로 재기에 성공한다. 여기엔 온라인에서 찾을 수 없는 소비자의 신뢰가 있다. 책은 이밖에도 LP, 몰스킨 노트, 로모 카메라, 보드게임 등을 예로 들며 모두가 디지털을 바라볼 때 아날로그가 반격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오직 두 사람 - 김영하
김영하의 단편 7편이 수록돼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은 '오직 두 사람'과 '아이를 찾습니다' 두 편이다.
서간체 소설인 '오직 두 사람'은 바퀴벌레 같은 가족이 암으로 죽는 아빠를 회상하는 이야기다. 아빠는 점점 희귀 언어의 사용자처럼 사라져간다. '아이를 찾습니다'는 세월호를 모티프로 한 드라마틱한 스토리다. 나중에 영화로 만들어져도 좋을 것 같다.
바깥은 여름 - 김애란
더 무겁고 우울해진 김애란 소설집. 5편의 단편 중 '입동'과 '풍경의 쓸모'가 가장 좋았다.
도배 하려고 짐을 옮기다가 아이가 바닥에 써놓은 글자를 발견한 순간이 좋았고, 패키지 여행지에서 교수 임용에 실패했다는 연락을 듣는 설정이 (좋았다는 건 조금 이상하지만) 마음에 들었다.
"사진 찍을 때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무척 평범한 사람,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날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149쪽)
정원생활자 - 오경아
뜻밖의 발견 같은 책이다. 크리에이티브한 일상을 위한 178가지 정원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식물, 정원, 나무, 꽃 등에 관해 가볍게 서술했다.
방송작가 출신인 저자 오경아는 영국에서 7년 동안 조경학을 공부했다. 세계 최고의 식물원인 영국 왕립식물원 큐가든의 인턴 정원사로 1년 간 일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정원설계회사 오가든스를 설립하고 가든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정원과 관련한 여러 책을 냈고, 속초에 ‘오경아의 정원학교’를 열어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다.
문학의 명장면 - 김성곤
김성곤 명예교수가 들려주는 현대 영문학 이야기. 에즈라 파운드, 윌리엄 포크너, 어니스트 헤밍웨이, 너세니얼 호손 등등 유명 작가들의 결정적 순간이 한 권의 책 안에 담겨 있어 교양을 쌓기에 좋은 책. 문학과 TV 사이에서 ‘중간문학’을 주장한 레슬리 피들러, 일상의 언어로 시를 쓴 소아과 의사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
스파이시 인도 - 홍지은
음식을 통해 만나는 인도 이야기. 딴두르 요리부터 마살라, 빠니르, 짜이와 라씨 등등 흥미로운 음식 이야기가 조선희 작가가 찍은 사진들과 함께 실려 있어 눈이 즐겁다.
세계를 읽다, 인도 - 기탄잘리 콜라나드
여행서와 인문서를 결합한 세계를 읽다 시리즈 인도편이다. 325개의 언어와 7개 이상의 종교가 있는 인도.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에 여행 전에 읽으면 더 좋았을 책이다. 저자는 어릴적 인도에서 성장한 여행작가라서 더 믿음이 간다.
“인도는 마치 생각과 몽상을 겹겹이 고쳐 썼으나 새로 쓴 것이 전에 쓴 것을 완전하게 가리거나 지우지 못한 고대 양피지 문서와 같다.” - 자와할랄 네루
죽음은 예술이 된다 - 강유정
문학과 영화에서 죽음을 다룬 작품을 통해 삶의 지혜를 얻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랑으로 인한 죽음, 불가해한 죽음으로 인한 고통(환상의 빛), 질투로 인한 살인(오셀로), 죽음이 없는 삶(드라큘라), 안락사(미 비포 유), 재앙을 앞둔 인간의 모습(라이프 오브 파이) 등 저자는 죽음 속에는 사랑, 욕망, 우울, 범죄 등 인간사의 다양한 모습이 농축되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문학과 예술에서 죽음을 접하는 것은 그 죽음이라는 미지의 공포로부터 면역을 얻고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언어의 온도 - 이기주
보랏빛 표지의 이 작고 예쁜 책을 처음엔 폄하했는데 읽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글에서 묻어나오는 따뜻함이 참 좋다. 가장 좋아했던 에피소드는 지하철에서 만난 어느 할머니가 손자에게 해준 말이었다.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 정유정
마지막으로 고른 책은 정유정 작가가 2014년에 발표한 에세이. 그녀가 책과 책 사이 재충전을 위해 히말라야 등반에 도전하는 과정이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고산지대에서 겪은 에피소드, 생리현상 때문에 생긴 일, 사소한 갈등과 해결 등 그녀의 히말라야 등반은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을 톺아보는 느낌을 준다. 네팔과 히말라야 지도를 함께 봐야 더 술술 읽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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