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근대 군산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시간입니다. 군산은 일제 강점기에 번성했던 도시여서인지 1930~40년대 유적지들이 꽤 많이 보존돼 있습니다. 대부분 월명동(구영길) 근처에 몰려 있어서 걸어서 둘러보는데 4~5시간 정도면 충분합니다.
역사적으로 서해의 곡창지대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던 군산은 고려 시대땐 진포에서 최무선이 왜구를 물리치는 진포대첩이 벌어질 만큼 치열한 곳이었습니다. 현대의 군산은 옥구현과 임피현이 합쳐져 본격적으로 개발이 시작됐습니다. 1899년 개항 이후 일제 강점기에 미곡 반출을 위한 항구도시로 급성장했습니다. 당초 인구 수백명에 불과했으나 1914년 8266명, 1940년엔 4만명으로 급증했죠. 광복 이후 일본인들이 떠나면서 개발이 늦어졌습니다. 그래서 일본식 도로나 가옥이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이것이 관광 자원으로 탈바꿈했으니 전화위복인가요?
월명동의 1930 근대군산 시간여행길은 이렇게 3개의 코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코스는 바닷가 근처 박물관과 미술관들을 둘러보는 코스이고, 2코스는 일본식 가옥과 이성당, 동국사 등을 돌아다니는 코스입니다. 3코스는 1,2코스를 한데 묶은 코스입니다.
입구 곳곳에 예쁜 카페들이 보입니다. 당나행(당신이 나보다 행복하길바래)은 조금 닭살 돋는 이름의 카페인데 아기자기해서 주인의 취향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눈길은 가는데 아직 초입인지라 저는 밖에서 구경만 하다가 이동합니다.
'1930 그 카페'니 '당나행'에 비하면 아주 심플한 이름입니다.
일본식 가옥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입니다. 곳곳에 예쁜 게스트하우스도 참 많더라고요. 한적한 군산에서 집을 개조해 손님 맞으면서 사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었습니다.
일본식 가옥이 있는 이 거리엔 탁류길이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채만식의 '탁류'에서 따온 지명입니다. 채만식은 군산이 자랑하는 소설가죠. 그가 35세 때인 1937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탁류'는 군산을 배경으로 여인의 수난사를 그리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탁류라는 이름을 접하고 나니 어릴 적 접했던 '탁류'를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이웃'이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입니다. 역시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곳입니다. 벽에는 군산의 옛날 사진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드디어 신흥동 일본식 가옥(히로쓰 가옥)에 도착했습니다. 월명동과 붙어 있는 신흥동 일대는 일제 강점기 군산 유지들이 살던 부유층 거주 지역입니다. 당시 포목점을 운영하며 군산부 협의회 의원을 지낸 히로쓰 게이샤브로가 1925년 지은 주택으로 광복 후 (구)호남제분의 이용구 사장 명의로 넘어가 오늘날까지 한국제분의 소유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일본식 가옥은 2층 목조 주택입니다. 기역(ㄱ)자 모양으로 된 건물과 그 앞에 일본식 정원이 놓여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근세 일본 무가(武家)의 고급주택 양식이라고 하네요. 건축물의 구조와 내·외부 공간 구성, 장식 등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2005년 국가등록문화재 제18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영화 <장군의 아들>, <바람의 파이터>, <타짜> 등에 등장한 곳이기도 합니다. <타짜>의 백윤식이 저 마루에 걸터 앉아 조승우가 문으로 들어오는 걸 지켜보는 장면이 기억나네요.
마침 일본식 가옥 안에서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민요를 연주하고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는 퍼포먼스도 있었어요. 일본 부자의 집에서 대한민국 만세라니 당시엔 꿈도 못 꾸던 일이겠지만 지금은 누구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형식적인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무리 치열해도 그 시대를 통과하고 나면 모든 게 시시해져버리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죠.
일본식 가옥에서 올려다본 나무들의 모습입니다. 1930년대에도 이 나무들은 이대로 건재했겠지요.
군산 월명동을 여행한다는 것은 1930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번엔 고우당으로 가보겠습니다. 이곳 역시 일본식으로 지어진 가옥입니다만 많이 개조가 돼서 현재는 게스트하우스로 쓰이는 곳입니다. 하룻밤에 4만원 정도면 묵을 수 있는 저렴한 숙소이기도 합니다.
참 고우당께! 고우당 안에는 이렇게 산책하기 좋은 정원과 작은 엿못도 있습니다. 또 카페도 있어서 저는 커피 한 잔을 사들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길을 걷다가 공연단을 만났습니다. 하와이안 춤을 신나게 추고 있더라고요. 저 뒤 담벼락에 써 있는 글자들이 궁금하신가요?
가까이 가보니 이렇게 시들이 예쁘게 써져 있었습니다. 하상욱과 나태주의 시가 나란히 있다니 시는 칸칸마다 평등한가봅니다.
코너를 돌면 바로 초원사진관이 나타납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배경으로 잘 알려진 곳이죠. 심은하가 연기한 다림이가 이 앞을 서성이던 장면이 생각나네요.
문 앞 다림이 사진 보이시나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다림이 사진이 여기 걸려 있었죠.
초원사진관 안은 영화를 추억하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한석규와 심은하의 어린 시절 사진과 영화 속 장면들이 전시돼 있네요. 또 정원이 영정사진이 된 증명사진을 찍던 스튜디오도 그대로 있어서 그 의자에 앉아 증명사진을 찍어볼 수도 있습니다.
8월에는 8월의 크리스마스가 있습니다. 영화의 힘은 이렇게 오래 지속됩니다.
초원사진관 옆에는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을 붙인 카페가 영업 중이에요. 운치 있는 모습이네요.
이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을 만나러 갈 시간입니다. 중앙로에 위치한 이성당입니다. 1920년대에 일본인이 '이즈모야' 라는 화과자점으로 문을 열어 영업해오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인이 이성당이라는 상호로 바꾸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밖에 길게 줄 선 사람들은 야채빵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성당 로고에 그려진 동물은 하마로군요.
이성당은 빵도 맛있지만 건물 자체도 이렇게 운치가 있습니다.
이성당에서 가장 인기 있는 빵은 단팥빵과 야채빵입니다. 다른 빵들은 사진에서처럼 전시가 되어 있지만 두 가지 빵은 줄을 서야만 살 수 있습니다.
저게 다 야채빵입니다. "10개 주세요", "20개 주세요" 줄 선 사람들이 한 번에 뭉텅이로 빵을 사가더군요. 저도 덩달아 많이 샀습니다. 나중에 먹어 보니 왜 그렇게 많이 사는지 알겠더군요. 가격이 단팥빵 1300원, 야채빵 1600원으로 저렴한데 빵 안에 단팥이나 야채가 가득 들었습니다. 정말 최고입니다.
점원이 빵을 쇼핑백에 담아주고 있습니다. 로고의 글씨체도 꽤 세련되게 뽑았네요.
이성당 바로 옆에 이성당 신관이 있습니다. 신관은 새로운 메뉴를 선보이는 곳입니다. 기존에 볼 수 없던 메뉴들을 즐길 수 있고 2층에는 카페도 있습니다. 참고로 이성당 빵은 서울에서도 맛볼 수 있습니다. 서초동 햇살마루점에서 이성당 빵을 팔고 있고요. 잠실 롯데백화점, 제2롯데월드에서도 이성당을 본 것 같네요.
이제 1코스로 가보겠습니다. 바닷가에 박물관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이 근사한 건물은 일제가 조선은행 군산지점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광복 후에는 한일은행 군산지점으로 쓰였다가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채만식 소설 '탁류'에도 등장하는 건물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이렇게 규모는 아담하지만 곳곳에 볼거리가 많은 박물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바닥만 쳐다보고 있는데요. 터치스크린이 신기한가 봅니다.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을 조각해놓은 대형 전시물입니다. 김구, 안중근 등등 여기 다 있다고 하는데 너무 많아서 도저히 찾을 엄두가 안 나네요. 사진은 그 일부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겠죠? 이런 조각품을 볼 때마다 감탄스럽습니다.
짐을 실은 트럭은 정차돼 있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 짐을 등에 진 사람... 저 때 3층 집이라니 대단한 위세였나 봅니다.
조선은행 건물 밖에는 이렇게 1930년대 기차 모형이 있습니다. 군산 하면 역시 기차가 생각나죠. 1912년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철길을 통해 군산의 쌀들이 이리(익산)로 옮겨졌습니다. 생각해보면 참 슬픈 기차네요.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서 더 슬퍼 보입니다.
군산 월명동은 1930년에서 멈춰버린 듯한 동네입니다.
박물관, 갤러리, 공연장, 군산세관, 미즈상사... 어디로 갈까요?
장미 공연장 입구입니다. 이곳은 1930년대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에서 수탈한 쌀을 보관한 창고였던 곳입니다. 지금은 77석 규모의 소극장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이곳에서 자주 공연을 엽니다. 입구에 전시된 동상들은 채만식의 '탁류'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조각해놓은 것입니다. 공연이 없는데다 마침 빗줄기가 굵어져서 저는 서둘어 옆에 있는 근대역사박물관으로 이동했습니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입니다. 3층 규모 건물입니다. 배 모양의 녹색 건물이 강렬하네요.
박물관으로 들어서자 '탁류' 중 한 구절이 저를 맞이합니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박물관 안에는 선사시대 유적, 군산의 역사가 전시돼 있는데 하이라이트는 1930년대 당시 잡화점, 술집, 극장, 기차역, 인력거 등을 재현해 놓은 전시실입니다.
군산극장입니다. 당시엔 '군산좌'라고 불렸습니다. 1914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펴낸 '호남선'에 "군산에는 군산좌와 명치좌 두 곳의 극장이 있다"라고 적혀 있다고 하는데요. 그만큼 군산에 극장이 들어선 역사는 깁니다. 1920년대 군산좌는 군산 사람들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민족운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다양한 공연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개장 초엔 가부키 중심의 공연을 했지만 후에는 변사가 진행하는 활동사진을 상영했다고 합니다.
군산좌는 이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의자가 없는 다다미방 구조여서 신발을 벗고 들어갑니다. 입구에 매표소가 있고 현관에 신발 보관소가 따로 있습니다. 겨울에는 담요(자부동)를 1전에 빌려주고, 차와 찹쌀떡(모찌)을 5전씩에 팔기도 했습니다.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해가 저물어 저녁 시간이 다 되었네요. 서울로 떠나기 전 저녁을 먹기로 합니다. 뜨끈한 국물이 당겼는데 검색을 해보니 초원사진관 앞에 한일옥이라는 맛집이 있다고 하네요. 입구에 들어섰는데 여러 유명 인사들의 사인이 내걸려 있고 식당 내의 규모도 꽤 큽니다. 이런 집이 정말 맛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경험 상으로는 반반이었던 듯해요. 한일옥의 경우는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메뉴는 무국과 비빔밥 정도인데요. 맑은 물에 무와 소고기가 어울린 무국이 배를 따뜻하게 데워줘 좋았습니다. 맛도 깔끔하고요. 덕분에 군산 여행을 즐겁게 마무리할 수 있었네요.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