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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목에 ‘지랄’이 들어가다니. 네. 욕할 때 쓰는 그 속어 맞습니다만 엄연한 표준어입니다. 국어사전 찾아보면 역사가 300년이나 된다고요.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대왕을 연기한 한석규가 “지랄”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그때부터 약간 주류문화(?)로 올라온 경향이 있죠. 드디어 미국영화의 한글 제목으로까지 채택됐네요. 이 혁명적인 제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여러분의 몫이지만 영화의 원제는 의외로 차분합니다. ‘The Edge of Seventeen’ 즉, 17세의 모서리라는 뜻입니다. 영화는 17살 소녀의 모퉁이처럼 찌질한 사춘기를 그립니다.
네이딘(헤일리 스테인펠드)은 모든 게 불만투성이인 17살입니다. 매일 똑같은 파란색 재킷을 입는 그는 친구 사귈 줄 모르고, 질투심 많고, 사람들이 자기를 몰라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며 오빠와 자신을 비교합니다. 오빠 대리언(블레이크 제너)은 어디서도 환영받는 인기남인데 왜 자신만 이렇게 되었냐는 것이죠. 우월한 유전자가 오빠에게로 다 갔다며 이 얼굴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거울을 보며 화를 냅니다. (그런데 네이딘을 연기한 헤일리 스테인펠드도 자세히 살펴보면 꽤 예쁜 편이라는 것은 이런 종류의 영화에 꼭 따라붙는 함정.)
네이딘에게는 크리스타(헤일리 루 리차드슨)라는 베프가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유일하게 마음이 맞는 단짝친구입니다. 그리고 역사 선생님 브루너(우디 해럴슨)도 있습니다. 교실에서 혼자서 책 보는 선생님 찾아가서 괴롭히는 게 네이딘의 유일한 취미입니다. 친구같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네이딘은 의지할 어른이 브루너밖에 없습니다. 브루너는 자꾸만 찾아와서 엉뚱한 고민을 털어놓는 네이딘을 쿨하게 대합니다.
“선생님 저 결심했어요. 오늘 자살하려고요.”
“그래? 어디보자. 나도 지금 막 유서를 써놓은 참이었거든.”
“제가 와서 말 상대 해주니까 좋죠?”
“원숭이가 온 것보다는 낫지.”
“그러니까 선생님은 대머리에 노총각인 거예요.”
“굳이 그 부분을 언급해줘서 고맙네.”
이런 식이죠. 음식을 먹어도 단 것만 찾고, 아이처럼 떼쓰는 네이딘에게 브루너는 친구같은 선생님입니다. 이런 선생님 만나기 쉽지 않은데 네이딘은 운이 좋네요. 네이딘도 그걸 알까요?
어느날 사건이 터집니다. 네이딘 17년 인생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순간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살을 결심할 만큼 부끄러운 사건인 것이죠. 자다가도 이불킥을 하게 만드는 그 사건은 엄마가 집을 비운 그날 밤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날 밤, 네이딘은 집에서 크리스타와 술 파티를 벌이다가 화장실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겨우 일어나서 바닥을 기어 방 문을 열어보니 크리스타가 오빠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는 겁니다. 헉, 내 불행의 근원인 오빠에게 베프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 네이딘은 외로움에 몸서리치다가 짝사랑하던 닉(알렉산더 칼버트)에게 홧김에 고백하는 문자를 보냅니다. 눈뜨고는 못봐줄 내용이 부끄러워서 얼굴은 화끈거리고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때 닉에게 문자가 옵니다. “귀엽네. 한 번 만날까?”
스포일러가 될테니 이후 스토리는 자제하겠습니다. 결말은 익숙한 방식의 마무리입니다. ‘지랄발광’을 떨던 네이딘은 그 사건을 계기로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되고 성숙해져갑니다. 스토리 자체가 새롭다기보다는 네이딘이라는 톡톡 튀는 캐릭터가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그녀는 매사 불만투성이지만 사랑스럽습니다. 아마도 17살 이상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느껴봤을 불안함과 어리숙함이기에 혀를 차기보다는 그의 편이 되어서 응원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 영화에는 네이딘의 로맨스 파트너로 한국계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애니메이션에 재능 있지만 네이딘의 표현을 빌리자면 “말하는 게 꼭 노인 같은” 그의 이름은 어윈 킴입니다. 한국계 남자가 미국영화에서 백인 여자의 진지한 상대역을 연기하는 것을 저는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미국영화에서 한국인 하면 돈만 밝히는 세탁소 주인 역할이 고작이었는데 어느새 로맨틱 가이로 나오게 됐네요.
그런데 반전이 있습니다. 어윈 역을 맡은 배우는 한국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중국계 캐나다인 헤이든 제토입니다. 영화는 화이브라더스 등 중국 자본으로 제작돼 중국계 배우를 캐스팅한 것은 이해가 가는데 영화에선 그의 배역을 중국계로 바꾸지 않고 한국계로 두었다는 것이 의아하긴 합니다. 중국인보다는 한국인이 로맨스에 조금 더 어울린다는 판단인 걸까요?
영화는 로튼 토마토에서 신선도 95%의 놀라운 평가를 받으며 입소문을 탔습니다. 흥행 성적도 제작비 대비 2배 이상을 벌어 투자사와 제작사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고요. 인기 배우가 나오지 않으니 한국에선 극장개봉 없이 DVD로 직행하려다가 영화를 미리 본 네티즌들의 폭풍청원에 힘입어 소니는 DVD를 전량 폐기하고 개봉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28일 개봉하는데 만약 흥행 성공한다면 <겟 아웃>에 이어 또 한 번 네티즌이 만든 ‘강제 흥행작’으로 기록되겠네요.
네이딘 역을 맡은 헤일리 스테인펠드는 <더 브레이브> <비긴 어게인> 등에서 아역으로 시작해 꾸준하게 영화에 출연해오고 있는데 <지랄발광 17세>는 당분간 그의 대표작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17살의 이유없는 불안, 초조, 부끄러움, 설레임 등의 감정이 그의 얼굴에 풋풋하게 묻어나서 영화를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상큼하고 발랄한 하이틴 코미디를 찾으신다면 <지랄발광 17세>는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영화입니다.
지랄발광 17세 ★★★☆
외롭고 찌질하고 나만 힘든 것 같은, 그러나 사랑스런 1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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