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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딜레마다. 선거판을 다루는 영화를 현실과 너무 닮게 그리자니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현실과 다른 이야기를 하자니 리얼리티가 걱정된다. 그래서 자꾸만 영화는 안전한 길을 간다. 그것은 “정치인들은 다 똑같이 더럽다”는 하나의 명제다. 하지만 이 익숙하고 뻔한 레토릭은 이제 지긋지긋하지 않은가. 다 똑같다고 생각해 정치를 외면한 결과를 우리는 지난 겨울 생생하게 목도했다.
<특별시민>은 아쉬운 영화다. 애초 기획의도는 <하우스 오브 카드>나 <킹메이커>처럼 정치판의 비정한 현실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선거 현장을 리얼하게 묘사함으로써 유권자이기도 한 관객에게 두 눈 똑바로 뜨고 보라는 경각심을 심어주려 했을 것이다. 실제로 전반부에 나열되는 에피소드 중 일부는 꽤 흥미진진하고 몇몇 대사는 신랄하다. 하지만 영화는 후반부에 길을 잃고 익숙한 정치혐오의 길로 빠져버린다. 에피소드 나열로 승부하는 드라마의 가장 쉬운 타결책이 자극적인 설정으로 클라이막스를 만드는 것인데 이 영화가 그런 경우다. 인물의 내면 묘사나 선거에 관한 성찰은 사라지고 단편적인 사건들만 남는다. 전형적인 용두사미다.
영화는 3선 서울시장에 도전하는 변종구(최민식)와 광고 능력을 인정받아 선거대책본부에 합류한 박경(심은경)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변종구는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겉과 속이 다른 정치인, 박경은 변종구를 좋아해 그를 돕지만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선거판에서 환멸을 느끼는 청년으로 그려진다. 선거대책본부장인 재선 의원 심혁수(곽도원)는 변종구를 도우면서도 다른 정치적 야심을 품은 인물이고, 베테랑 기자 정제이(문소리)는 순진한 박경을 꼬드겨 정보를 캐내 뒤통수를 친다. 이들의 상대 진영엔 양진주 후보(라미란)가 있는데 그녀의 권모술수 역시 변종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변종구의 서울시장 출마 선언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여러 이슈를 나열하며 치열한 선거전을 그린다. 심혁수는 박경에게 선거판을 '똥물'에 비유하며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고한다. 몰래카메라를 조작해 실검 1위에 올리고, 상대 후보 부인이 비싼 그림을 샀다고 폭로하고, 지하철 공사장의 싱크홀 재난을 왜 막지 못했나 공격하고, 이슈를 다른 이슈로 덮고, 성향이 다른 후보끼리 단일화 논의와 뒷거래가 진행되는 과정을 영화는 여과없이 나열하는데 어떤 에피소드는 기시감이 들 정도로 현실과 닮았다.
영화가 설득력을 잃기 시작하는 지점은 지나치게 인위적인 사건이 터지고 변종구가 이를 감추려 하면서부터다. 그전까지 서로 치고받으며 블랙코미디 같았던 선거판이 갑자기 흑막에 가려져 다시 익숙한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영화는 선거를 “똥물에서 진주를 꺼내는 것”으로 규정하고 시작하지만, “색깔은 섞다 보면 다 까만 색 되는 것”이라며 진주 발굴을 멈추고 정치혐오의 뻔한 결말로 치닫는다.
영화에는 연기 잘 하는 배우들이 대거 등장해 눈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모든 캐릭터들이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최민식, 곽도원, 문소리는 제 물을 만난 듯 능수능란한 연기를 펼치지만 심은경, 라미란이 연기한 캐릭터는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최민식은 뒤돌아보지 않고 전진만 해야 하는 변종구의 카멜레온 같은 면모를 수십년 내공으로 소화한다. 그는 권력에 눈이 먼 악당이지만 인간적인 모습이 강조돼 <하우스 오브 카드>의 언더우드(케빈 스페이시)처럼 미워하기 힘든 인물이다. 곽도원은 야비한 역할에 언제나 최적화되어 있고, 문소리의 얄미운 뒤통수도 영화에 양념 역할을 한다.
이에 비해 심은경이 연기한 박경은 캐릭터가 모호하다. 성취욕이 강한 그녀는 선거판에 몸담을수록 고민을 거듭하는데 이 과정이 제대로 표현되고 있지 않아 관객 입장에선 후반부 그녀의 결심에 공감하기 힘들다. 라미란이 맡은 양진주 역할 역시 입체적이지 않다. 그녀는 독립적으로 사고한다기보다 그저 변종구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리액션으로서만 의미를 갖는 캐릭터처럼 보인다. 또다른 서울시장 후보인 허만길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험한 길’을 간다는 의미의 이름과 달리 무기력하고 존재감이 거의 없다.
이처럼 영화는 캐릭터가 빈약하게 설계된 탓에 서사를 탄탄하게 구축해 나아가지 못하고 병렬적으로 에피소드만 나열하는 선에서 멈춰 버린다. 정의와 분노에만 초점을 맞춘 기존 한국형 정치영화들과 달리 선거판을 리얼하게 보여주려 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되긴 하지만 풍자로 즐기기에도, 의미를 찾기에도 아쉬움이 크다.
특별시민 ★★☆
어리둥절한 후반부가 만든 식상한 정치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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