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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정가는 로비 없이는 굴러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로비스트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주요 사안을 당론으로 결정하는 한국 정치와 달리 양당 구도가 뿌리내린 미국은 의원 개인의 의견이 중요한데 이때 의원들을 물밑에서 접촉하는 사람들이 로비스트다. 1995년 등록제를 시행한 이래 워싱턴에는 1만3000명 가량의 등록된 로비스트가 있다.


하지만 로비스트는 주로 이익단체를 대변하고 스스로 힘을 과신하며 ‘파워 브로커’ 행세를 하기에 대중의 불신 또한 깊다. 이들은 100만달러(약 11억원) 이상의 연봉을 가져갈 정도로 큰 보상을 받지만 상당수가 뇌물, 탈세, 협박 등의 혐의로 감옥에 갔을만큼 교도소의 담장 위를 넘나들며 산다. 며칠 전 트럼프 정부에서 로비스트 3명을 참모로 고용한 것을 두고 비난 여론이 거셌던 것만 봐도 로비스트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역시 린다 김으로 인해 로비스트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다. 한국에서 로비제도는 불법이지만 편법이 일상화돼 많은 대형 로펌들이 사실상 로비 행위를 하고 있고, 또 기업들이 줄줄이 고용하는 각종 ‘고문’ 직함 가진 사람들이 한국형 로비스트 역할을 한다.



영화 <미스 슬로운>은 워싱턴 로비스트의 세계를 그린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로비스트는 대중적 인식 그대로 비열한 협잡꾼에 돈과 권력에 인생을 저당잡힌 사람들이다. 하지만 영화는 로비스트가 정치판을 좌지우지하게 된 배경에 부패한 정치가 먼저 있다고 폭로한다.


“로비는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다. 적의 행동을 예측하고 계산해 반격한다. 나는 이기기 위해 고용됐다.”


엘리자베스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은 자유경제를 신봉하는 단체들의 뒤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워싱턴 로비스트다. 그녀는 소시오패스 같은 냉혹함으로 연전연승, 부동의 업계 1위로 사장의 전폭적 신뢰를 받고 있다.



어느날 그녀에게 총기규제 법안을 막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슬로운은 주부들을 총으로 무장하게 하자는 강경론자들의 주장에 웃음을 터뜨리고는 사건을 맡는 대신 팀원들을 데리고 회사를 떠난다. 비영리단체의 후원을 받는 작은 회사로 옮겨 오히려 총기규제 법안 통과를 위해 일하기로 한다. 이전 회사와 맞서기로 결심한 것이다.



영화는 슬로운이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이상주의자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하지 않는다. “때로는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일해야 할 때도 있다.” 그녀는 회사를 옮긴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지만 이는 그녀가 살아온 삶과는 다르다. 그녀는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한 사람이다. 어쩌면 사건도 이기고 총기규제론자라는 그럴듯한 명분도 얻어 나중에 정치인이 되기 위한 자산으로 삼기 위해 회사를 옮겼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영화는 슬로운의 신념 대신 냉철한 승부의 세계에 집중함으로써 총기규제 같은 국민의 생사가 달린 중차대한 사안도 로비스트들의 개인플레이에 오락가락하는 정치게임으로 변질됐다고 말한다. 의원들이 신념이 아닌 오직 돈과 권력의 힘에 의해 법안에 투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슬로운은 이기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 상원의원들의 가정사를 꿰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이들을 뒷조사, 협박하고 도청까지 저지른다. 팀원들에겐 무자비한 상사여서 그녀는 능력 있는 부하 에스메(구구 바샤-로)가 오랫동안 숨겨온 과거를 불리한 상황에서 여론반전의 도구로 이용할 정도로 피도 눈물도 없다. 승리를 향한 폭주기관차같은 그녀의 집착으로 인해 패색이 짙었던 총기규제 법안은 다시 힘을 얻기 시작한다.


기쁨도 잠시, 슬로운은 반격에 맞딱뜨린다. 적이 많은 사람이라서 노리는 사람도 많다. 예전 회사는 상원의원들이 하나둘 슬로운 쪽으로 넘어가는 것을 지켜본 뒤 방향을 바꿔 슬로운을 직접 공격하기로 한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살기 위해 정치권과 로비업계에 맞서 싸워야 한다.



슬로운은 실존 인물은 아니다. 각본을 쓴 조나단 페레라는 사기, 탈세, 공모, 부패 등의 혐의로 감옥에 간 어느 로비스트의 인터뷰를 TV에서 보고 영화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정치인과 스파이의 중간에 있는 로비스트에게서 정치 스릴러의 가능성을 본 것이다. 페레라는 대학 졸업 후 로펌에서 기업 변호사로 일한 적 있는데 그 덕분인지 영화 속 인물들이 기관총 쏘듯 치고받는 대사들은 실제 로비스트 세계를 알지 못하면 나오기 힘든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페레라는 로펌을 그만둔 뒤 한국에서 영어 강사로도 일했다. <미스 슬로운>은 이때부터 구상해 쓰기 시작한 그의 데뷔작이다. 백악관을 정교하게 묘사한 드라마 <웨스트 윙>과 페이스북 창업자들 사이의 미묘한 갈등을 드러낸 <소셜 네트워크> 등을 집필한 당대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 중 한 명인 아론 소킨이 연상된다는 평가와 함께 <미스 슬로운>은 한동안 할리우드에서 가장 기대되는 각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조나단 페레라


영화의 감독은 <셰익스피어 인 러브>(1998),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2011)을 만든 존 매든이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고 어떤 편이 이기느냐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미스 슬로운>이 파워게임의 숨겨진 이면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결코 선하지만은 않은 주인공이 거침없이 내부 상황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내부자들>과 <더 킹> 같은 정치고발 한국영화를 연상시킨다. <내부자들>이 실제 한국정치 상황을 닮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처럼, <미스 슬로운> 역시 작년 말 미국 개봉 당시 언론에서 슬로운 청문회 장면이 힐러리 클린턴 청문회 장면을 연상시킨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상원 청문회는 슬로운 한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해 개최되는데 이것이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을 부각시키기 위해 열린 2015년 벵가지 청문회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슬로운이 상원 청문회에 불려가 진술하는 장면과 그녀의 과거 행적을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후반부에 강력한 반전을 준비하는데 이것은 마치 <내부자들>에서 이병헌이 날린 한 방처럼 혹은 반전 영화의 대명사급인 <유주얼 서스펙트>의 충격처럼 강력하다. 로비스트계의 ‘카이저 소제’가 있다면 그가 바로 슬로운일 것이다.



슬로운 역을 맡은 배우는 할리우드에서 전문직 여성 배역을 도맡는 제시카 차스테인이다. <제로 다크 서티>에서 빈 라덴을 쫓는 CIA 요원, <인터스텔라>에서 아버지와 화해하는 물리학자, <모스트 바이어런트>에서 은밀한 제안을 하는 마피아의 딸, <마션>에서 우주탐사대 리더 역할을 맡았던 그녀는 워낙 출중한 배우지만 이 영화에선 더 놀랍다. 화면이 꽉 차도록 얼굴을 클로즈업한 오프닝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차스테인은 한 순간도 시선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


차스테인이 연기한 슬로운은 창백한 피부, 빨간 립스틱에 하이힐을 신고 사무실을 휘젓고 다니면서 명석한 두뇌로 직원들에게 업무를 지시한다. 누구에게도 진심을 말하지 않는 그녀는 팀원들도 믿지 못해 스스로 백업 플랜을 실행하며 승리를 위해 올인한다. 24시간을 초단위로 쪼개 살면서 밥먹는 시간도 아까워 똑같은 식당에 가고, 수면 장애로 못 자는 잠은 약으로 보충한다. 차스테인은 이런 워커홀릭 여성의 모습을 스테레오타입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실제 여성 로비스트들을 만나 그들의 옷차림과 말투 등을 연구해 캐릭터를 만들었다.



친구도 애인도 가족도 없이 기계처럼 일만 하는 슬로운이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줄 때는 오직 밤에 집에서 남성 파트너 포드(제이크 레이시)를 만날 때뿐이다. 132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마치 의자놀이 하는 것처럼 상원의원들을 뺏고 빼앗기는 로비전이 쉴 새 없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이 영화에서 포드가 등장하는 순간만큼은 색다른 기운이 감돈다. 일터에서의 치열함과 전혀 다른 성적인 긴장감이다. 다소 도식적일 수도 있는 관계지만 포드는 매번 의뭉스런 표정으로 뻔한 예상을 흩트러뜨리고 장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선 슬로운의 운명을 좌우할 열쇠를 쥔 인물로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워싱턴 정가를 다룬 영화들이 담아내지 못한 로비스트의 세계가 궁금한 사람들, 속 시원한 사이다 같은 반전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 <미스 슬로운>을 추천한다.


영화의 배급사인 뤽 베송의 유로파코프는 작년 미국 개봉 당시 대선 시점과 맞물려 흥행을 기대했지만 예상치 못한 트럼프 당선이 분위기를 다운시키며 영화는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


미스 슬로운 ★★★☆

로비스트계의 카이저 소제. 승리만을 위해 살아온 로비스트가 정치권을 향해 날리는 한 방.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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