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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의 영화를 보는 것은 바른 말 하는 '꼰대'에게 설교를 듣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일관적입니다. 영화계의 버니 샌더스가 있다면 그가 바로 켄 로치일 것입니다. 언제나 블루 칼라, 언제나 노동자,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 언제나 토리당(보수당)의 반대편, 언제나 약자들, 언제나 세계화의 뒤쪽, 언제나 시골마을, 언제나 사회 부적응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킵니다.


젊은 시절 그의 영화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로 시끌벅적했습니다. 아무리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라도 자막 없이는 알아듣기 힘든 지역 사투리를 그대로 대사로 썼습니다. 전문 배우가 아니라 실제 노동자들을 캐스팅하기도 했습니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사이 어디쯤에 켄 로치 영화가 있었습니다. <케스> <히든 어젠다> <하층민들> <레이닝 스톤>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 등 영화는 투박하고 날이 바짝 서 있었습니다. 스토리는 너무나 짐작이 가능하도록 선과 악이 명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힘이 있는 강한 영화들이었습니다.


<케스>(1969)

<하층민들>(1991)


<랜드 앤 프리덤>부터 그의 관심사는 폭넓어집니다. 근대 유럽의 역사부터 미국의 불법 이민자까지 영화 소재로 흡수하거든요. <랜드 앤 프리덤>은 스페인 내전, <칼라 송>은 니카라과 내전, <빵과 장미>는 미국의 멕시코계 이민자,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IRA 등으로 다양합니다.


그는 2014년 아일랜드의 근대사를 소재로 한 <지미스 홀>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의 나이 78세였으니 사람들은 노장의 일관된 커리어에 찬사를 보냈고 이제 그는 명예의 전당으로 옮겨가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빵과 장미>(2000)

<지미스 홀>(2014)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그가 은퇴를 번복하고 2년 만에 내놓은 작품입니다. 그는 이 영화로 무려 13번째로 칸 영화제의 초청을 받았고 생애 두번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컴백합니다.


은퇴 번복에 대한 부담으로 심혈을 기울인 덕분인지 영화의 완성도는 그의 다른 작품들을 압도할 정도로 뛰어납니다. 노장의 따뜻한 시선, 차분하게 설득하는 태도, 유려한 완급 조절, 그러면서도 강인한 메시지 등 흠잡을 곳이 없습니다. 켄 로치라는 거장의 '인생작'으로 꼽고 싶을 정도입니다. (개인적으로 켄 로치를 만들어준 영화로 <케스> <하층민들> <랜드 앤 프리덤> <나, 다니엘 블레이크> 네 편을 선택합니다.)


그는 왜 80세에 은퇴를 번복하고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길래 다시 영화계로 복귀한 것일까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처럼 툭하면 은퇴를 선언한 뒤 번복하며 관심을 끄는 할아버지가 있긴 합니다만 켄 로치도 그런 경우일까요? 이 글에서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만의 특별한 메시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이 글에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1. 한 사람의 시민인 '나'의 이야기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제목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나'라는 1인칭 대명사입니다. '나'가 없이 그저 '다니엘 블레이크'를 제목으로 했어도 영화는 됩니다. 아니, 많은 영화들이 그렇게 합니다. 주인공 이름을 제목으로 하는 영화들이 많습니다. '페넬로피' '주노' '루시' 등등. 아마 다른 감독이었다면 그저 '블레이크'를 제목으로 했을지도 모릅니다.


1인칭 대명사 '나'의 의미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합니다. 다니엘(데이브 존스)의 친구 캐티(헤일리 스콰이어)가 장례식에서 읽어주는 글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한 사람의 시민인 '나'의 이야기입니다. 곧 죽을 운명인 '나' 역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만든 영화입니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스크린 속의 세상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이고, 나는 스크린 밖에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기 쉬운데요. 이 영화는 그 경계를 무너뜨리려 합니다.


켄 로치 감독이 평생동안 붙들어왔던 주제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세계화, 빈곤, 계층갈등의 문제가 바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경고였는데요. 이 영화는 그것을 더 직접적으로 제시합니다. 바로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라는 선언, 그래서 제목에 '나'가 붙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 중 하나는 다니엘 블레이크가 벽에 낙서를 하고난 뒤 사람들의 반응일 것입니다. 그때까지 그를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만 그가 자신의 요구사항을 벽에 쓰자마자 사람들이 그를 응원하기 시작합니다. "잘 했어요!" "계속 저항해요!" "불합리하다는 것을 표현해요!" 한 시민은 그에게 추위에 견디라며 입던 재킷을 벗어주기까지 하죠.


"저항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면 벽에 대고 욕이라도 하라"는 어느 정치인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었는데요. 다니엘이 벽에 쓴 글도 '나'로 시작합니다. 나의 이야기, 내가 겪은 불합리함, 부조리한 세상의 나... 그 장면에서 다니엘 블레이크는 켄 로치 감독 자신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켄 로치 감독이 평생에 걸쳐 해온 이야기가 모두 '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받아들여 달라는 외침이 들리는 장면이었습니다.



2. 선별적 복지의 사각지대


지금까지 켄 로치 영화들은 주로 빈곤층에 확대경을 들이대고 보는 영화였습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캐티의 딱한 사정이 바로 켄 로치 전작들의 주제였습니다.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 청소 일이라도 해보려 하지만 구해지지 않는 일자리, 무료 식료품을 배급받고 울어버린 설움, 마치 성냥팔이 소녀처럼 안타까운 사연... 그동안 켄 로치 영화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다른 점은 캐티를 도와주는 다니엘이라는 노인이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없이, 그저 캐티가 딱해서 다니엘은 캐티의 집을 수리해 주고 아이들과 놀아주고 식료품 배급의 긴 줄을 함께 서줍니다.


요즘 보기 드문 노인인 다니엘은 그러나 키다리 아저씨가 아닙니다. 대단한 능력자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도 캐티처럼 가난한 이웃일 뿐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마음은 가난한 사람이 더 잘 안다고 하죠? 내가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풀면 내가 힘들 때 다른 누군가도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 어쩌면 이것이 냉혹한 정글같은 사회에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원동력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화는 착한 이웃 다니엘이 겪는 어려움을 꼼꼼하게 보여줍니다. 심장병으로 고생하는 그는 일을 할 수 없어 정부의 실업급여를 받아야 하지만 구직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당하고 환자로 등록하려 하지만 평가 기준에 미달된다는 이유로 기각당합니다.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거부당한 그는 어필을 하지만 영국의 최저생계비 보장 절차는 신청자를 지치게 하는 방향으로 최적화되어 있어서 그는 시간만 허비합니다.


절차를 만들어 놓았지만 정작 필요한 사람에게 혜택이 가지 않는 복지제도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영화는 다니엘 블레이크를 통해 조용히 고발합니다. 다니엘이 겪는 불합리함은 영미식 선별적 복지의 사각지대입니다. 보편적 복지제도를 채택한 유럽대륙이나 스칸디나비아였다면 이런 불합리함은 없거나 적을 것입니다.


켄 로치 감독은 영국식 복지의 사각지대를 발견했고 그것이 그가 은퇴를 번복하게 된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는 천상 카메라로 불합리한 시스템을 고발하는 투쟁가니까요. 젊어서는 과격했고 80세에 이른 지금도 스타일은 온화해졌지만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못다한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는데 카메라를 놓고 편히 쉴 수만은 없었겠지요. 늘 바른 말만 하는 그는 어쩔 수 없는 '꼰대'지만 절대 변심하지 않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꼰대입니다.


켄 로치 감독(왼쪽)


한국도 무상급식, 무상교육 등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 논란이 많았고 앞으로도 사회 고령화에 따라 기본소득제 등 논란은 더 커질텐데 참고해보면 좋을 영화입니다. 소위 차상위계층에 속한 사람들, 그러니까 최저생계비 이상은 벌지만 평균 수준에는 한참 못미쳐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습니다. 2014년에는 송파구의 세 모녀가 슬픈 가계부만을 남긴 채 번개탄을 피워 놓고 집단 자살해서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됐었죠.


이것저것 자격과 조건을 시시콜콜 따지면서 시혜 베풀듯 하는 복지제도를 택할 것인지, 아니면 일괄적으로 지급한 뒤 변화를 지켜보는 복지제도를 택할 것인지. 한국사회도 곧 선택의 순간에 직면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장은 명확합니다. 그래서 담백합니다. 지금도 선별적 복지의 피해자인 우리 시대의 레미제라블들이 받지 않는 상담 전화와 까다로운 인터넷 신청 절차와 신청자를 지치게 하는 소극적인 홍보 때문에 병을 더 키우며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

우리 시대의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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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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