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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의 대통령이 위기의 대통령을 만난다. 전자는 엘비스 프레슬리, 후자는 리처드 닉슨이다. 우리로 치면 싸이가 박근혜를 만난 격이랄까. 싸이 팬들에게는 미안. 하야 결단한 닉슨에게도 미안.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다. 1970년 12월 21일 역사상 딱 한 번이었다. 아직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기 전, 닉슨이 베트남전 장기화와 경제위기, 여소야대 정국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엘비스는 연예인 홍보대사 같은 두루뭉술한 자격으로 초청받아 백악관에 간 게 아니다. 무려 마약단속국 비밀요원이라는 거창한 명목으로 찾아간 것이다. 30일 개봉하는 영화 '엘비스와 대통령'은 그 순간을 그린다.



우주 대스타 엘비스 프레슬리(마이클 섀넌)에겐 엉뚱한 소원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마약단속국 비밀요원이 되는 것이다. 마약 때문에 나라가 위기에 처했다고 믿는 그는 자신이 직접 요원 배지를 가슴에 품고 공항에서 마약 밀수범을 잡는 꿈을 꾼다.


권태가 하늘을 찌르던 어느날, 엘비스는 매니저와 함께 백악관에 들러 대통령에게 쓴 편지를 전달한다. 전세계에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비밀요원이라니, 보좌관은 처음엔 코웃음을 친다. 하지만 이후 생각을 바꿔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젊은층 지지율을 끌어올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을 첨부해 닉슨(케빈 스페이시)에게 보고한다.



그러나 닉슨은 전형적인 '꼰대'다. 지금 자신이 아무리 인기가 없어도 세계 최강국 미국 대통령인데 한가하게 '딴따라'나 만나야겠냐며 면박을 준다. 다행히 엘비스 매니저의 기지로 닉슨은 딱 5분만이라는 조건을 달아 만남을 허락한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사실상 이 영화의 전부다. 감독은 86분의 러닝타임 중 50분 가량을 할애해 이 만남을 위한 바람잡기에 나선다. 극단적인 두 사람의 성격을 대비하며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지를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두 사람이 만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백악관에 도착한 엘비스는 대통령 비서로부터 주의사항을 듣는다. 닉슨을 만날 때 누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하는지, 어떤 동선으로 걸어서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하는지, 심지어 테이블에 놓인 음료수 중 어떤 것을 먹어야 하는지까지 시시콜콜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춰본 적 없는 엘비스에겐 이런 매뉴얼이 통할 리 없다.



마침내 엘비스와 닉슨이 만난 순간, 영화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한다. 과연 누가 진짜 대통령인가, 누가 회동의 주도권을 쥘 것인가를 놓고 마치 호랑이와 사자가 만난 것처럼, 혹은 악어가 뭍으로 올라와 코뿔소를 만난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기싸움이 시작된다. 영화는 이 순간의 숨막히는 공기를 스릴 넘치게,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게 잡아낸다.



먼저 기선제압에 나선 이는 닉슨이다. 그는 포옹하려는 엘비스를 향해 손을 내민다. 하지만 엘비스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소파로 가서 닉슨의 자리에 앉아버린다. 그리고는 당황하는 닉슨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비틀스는 빨갱이입니다. 진정한 미국정신에 반기를 드는 반미주의자들이 미국에서 돈을 벌어가고 있어요."


엘비스가 맥락없이 던진 한 마디. 그런데 이 말이 통한다. 닉슨은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무장해제된다. 연예인 따위 만나서 뭐하냐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랜만에 정치적 성향이 같은 사람을 만났다며 찰떡궁합이 된다. 보좌관이 다음 스케줄을 연기하느라 진땀을 뺄 정도로 두 사람은 의기투합한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한국으로치면 박근혜 대통령이나 김종 전 차관이 했을 법한 수준이다. "이 사람이 아직 거기 있어요?" “나는 그 사람이 참 싫어.” 뭐 그런 밑도 끝도 없는 ‘혼이 비정상’인 대화 말이다. 이 황당한 말잔치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과연 저들이 그렇게 막강한 영향력을 가져도 될 만한 사람이었나 의구심이 들 정도다. 10.26 사건을 블랙코미디로 만든 한국영화 ‘그때 그 사람들’(2005)에서 박정희가 죽은 뒤 청와대에서 서로 권력다툼하느라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향해 내레이션을 맡은 윤여정이 일갈했던 말을 빌려오자면 “가히 철딱서니가 없다.”


당시 두 사람의 실제 만남은 비공개로 진행됐다고 한다. 엘비스가 공개를 원치 않아 백악관도 언론에 알리지 않다가 한참 뒤에야 알려졌다. 미국의 인기 음악채널 VH1은 엘비스와 닉슨의 이 독특한 만남을 록 음악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100대 사건 중 하나로 꼽았다.



영화 '엘비스와 대통령'은 답답한 뉴스가 계속되는 요즘 가볍게 즐길 만한 웰메이드 코미디다. 아마존 스튜디오가 드라마에 이어 영화도 만들기로 선언한 뒤 처음 만든 작품들 중 하나로 감독은 소프트한 드라마를 주로 만들어온 여성 감독 리자 존슨이 맡았다.


이 영화에서 눈여겨 볼 것 중 하나는 캐스팅이다. 엘비스와 닉슨 역을 맡은 배우는 실제 그들과 외모 상으로는 그다지 닮지 않았지만 뛰어난 연기력으로 외모 논란을 잠재운다.


'테이크 쉘터'(2011) '라스트 홈'(2014) 등에서 매우 사실적이고 냉철한 인물을 연기해온 마이클 섀넌은 엘비스보다 더 마른 체형에 얼굴도 노안이지만, 연신 과장되고 거들먹거리는 모습으로 웃음을 이끌어낸다. '하우스 오브 카드'에 이어 또다시 대통령이 된 케빈 스페이시는 닉슨의 표정과 발음 등을 연구해 꼰대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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