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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배우자를 잃은 두 남녀가 있다. 남편은 아내가 죽었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회사에 출근해 밀린 일을 처리한다. 보다 못한 장인이 이러지 말고 한 잔 하러 가자고 말린다. 남편을 잃은 아내는 밝았던 성격에 그늘이 드리운다. 열심히 걸레질을 하고 겨울을 대비해 대나무로 벽을 만들어보지만 남편이 왜 떠나갔는지 궁금해 잠을 이룰 수 없다.


상실을 주제로 한 동서양의 두 영화가 나란히 개봉한다.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남편이 주인공인 첫 번째 영화는 캐나다 감독이 만든 미국영화 <데몰리션>(13일 개봉), 자살한 남편의 아내를 그린 두번째 영화는 만들어진지 21년만에 첫 개봉하는 일본영화 <환상의 빛>(7일 개봉)이다.



두 영화는 비슷한 소재임에도 동서양의 간극과 20년이라는 시차만큼 스타일이나 이야기 전개가 전혀 다르다. 단순하게 말하면, 전자는 적극적이고 후자는 소극적이다. 전자에서 남자는 누군가의 위로를 통해 잊고 있던 진짜 삶을 발견하고, 후자에서 여자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꾹꾹 눌러 담고 숨기다가 터뜨린다. 그러나 두 영화가 결국 던지는 메시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영화가 상실을 치유하는 과정을 따라가 보자.



<데몰리션>의 주인공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는 중환자실에서 아내를 기다리다가 자판기에서 초코바를 꺼내먹으려 한다. 그런데 자판기는 고리가 걸려 과자를 꺼내주지 않는다. 아내가 위독한 이 중차대한 상황에 한낱 자판기라니. 그러나 영화는 엉뚱하고 작은 것을 통해 남자의 감정 변화를 담는데 능하다.


데이비스는 자판기 회사에 편지를 쓴다. 자판기는 '스스로 판매하는 기계'이니만큼 이 편지는 사실상 자기 자신에게 쓰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글로 털어놓는다. 아내가 죽었는데 왜 눈물이 나오기는커녕 자판기 타령만 하고 있는지, 그동안 자신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 아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눈을 뜨면 자꾸만 아내의 모습이 보이는지 등등 쓰고 지우고 또 쓰고를 반복한다. 그리고 이 편지에 자판기 회사의 카렌(나오미 와츠)이 응답하면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인연이 시작된다.


<데몰리션>


<환상의 빛>의 유미코(에스미 마키코)는 오사카에서 멀리 떨어진 해안가 마을로 이주해 재혼 생활을 시작한다. 새 남편은 좋은 사람 같다. 하지만 그녀는 상실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겉돈다.


유미코는 버스 정류장에 홀로 앉아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다 버리고 도망이라도 갈 작정인 듯하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다른 누군가의 장례식 행렬이다. 저 행렬의 끝에서라면 전남편이 자기를 버리고 혼자 떠난 이유를 알 수 있을까. 그러나 그녀가 걱정돼 찾아온 사람은 새 남편이다. 그는 그녀를 이렇게 위로한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빛이 있어서 그 사람은 그 빛을 따라간 게 아닐까?"


<환상의 빛>


커다란 상실을 경험할 때 우리는 깊은 절망에 빠지거나 혹은 상처를 애써 잊으려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우리 삶의 과정에서 진실한 자신을 발견할수록 자기 자신을 상실해간다"고 했고, 레프 톨스토이는 "삶을 깊이 이해할수록 죽음으로 인한 슬픔은 줄어든다"고 했다. <데몰리션>은 하루키의 말을 닮았고, <환상의 빛>은 톨스토이를 연상시킨다.


<데몰리션>의 데이비스는 냉장고를 분해한다. 죽기 전 아내가 고쳐 달라고 했던 냉장고를 손보다가 아예 산산조각내버린 것인데 뭐든 완전히 다 뜯어봐야 문제의 원인이 보인다는 평소 장인의 조언에 따른 것이다. 그는 냉장고 분해를 계기로 자신의 삶도 분해하기 시작한다. 완전히 부수고 뜯어놓은 뒤 뭐가 문제인지 살펴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한다.


<데몰리션>


영화의 후반부로 가면 그는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져 있다. 그래서 수많은 인파가 몰린 출근길에서 홀로 헤드폰을 쓴 채 춤을 추는데 거리낌이 없고, 새로 알게 된 여자를 아내의 장례식에 대동하기도 한다. 이전의 그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환상의 빛>의 유미코는 눈보라가 치는 날 바다로 간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다. 얄궂은 날씨가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상실감을 안겨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미코는 앉은 채로 미동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아무 문제 없이 어디서도 잘 뛰어다니지만 유미코에겐 적응이 문제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괴로움이 더 크다. 마침내 할머니가 폭풍우를 뚫고 모습을 드러내자 유미코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선다. 삶과 죽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로 인한 슬픔은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듯 말이다.


<환상의 빛>


<데몰리션>은 최근 눈에띄는 걸작을 쌓아올리고 있는 캐나다 감독 장마크 발레의 아홉 번째 영화다. HIV 바이러스 감염자의 투쟁기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엄마를 잃은 뒤 극한의 트레킹을 선택한 여성을 섬세하게 따라간 <와일드> 등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영화라는 점에서 <데몰리션> 역시 전작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데몰리션>


매튜 매커너헤이, 리즈 위더스푼 등 배우를 재발견하게 해준 전작들처럼 이 영화에서 데이비스를 연기한 제이크 질렌할 역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나이트 크롤러> <에베레스트> <사우스포> 등에서 보여준 강인하고 집요한 모습을 벗어던지고 공허한 눈빛으로 집을 부수고 뉴욕 거리 한복판에서 춤을 추는 그의 연기는 잔잔한 분위기의 이 영화에서 단연 돋보인다.


<환상의 빛>


<환상의 빛>은 한국 팬들에게 '고 감독'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1995년 데뷔작이다. 고레에다는 이 작품 이후로도 가족의 상실과 위로를 주제로 한 영화들을 꾸준히 만들어 왔다. 그러나 비교적 따뜻한 톤의 그의 최근작들과 달리 <환상의 빛>은 상실의 심연까지 깊이 파고들어가는 분위기가 꽤 무겁고 축축하다. 아름다운 영상으로 당시에도 극찬받았던 영화이니만큼 스크린에서 차분히 감상해볼 것을 권한다. 지금은 대스타가 되어 할리우드로 진출한 아사노 타다노부의 데뷔 초 풋풋했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덤이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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