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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스의 시 - 양미자 (윤정희 분)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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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그렇게 적었지만
사실 촛불이라는 단어를 빼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시에서 노무현을 떠올릴 만한 단서는 그것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노무현 편이라고 라디오에서 말하는
이창동 감독의 모습이 떠오르면
이 시에서 노무현을 향한 그리움이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이창동 감독의 <시>는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영화입니다.
극중 김용탁 시인이 수강생들에게 묻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 언제였느냐고...

양미자는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죠.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겁니다. 혹은 없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있었으면 하는 순간일 겁니다.
그게 보잘 것 없어서 스스로 실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죠.

영화 속에는 성폭행범이 된 한 소년이 등장합니다.
시와 성폭행범... 무언가 잘 어울리지 않는 소재이지만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는 우리가 숨기고 싶은 사회 속 더러움을 끄집어내서
문학적으로 보여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은 머리보다 가슴 속에서 먼저 반응을 이끌어냅니다.

아이들의 부모들 모두가 공범이 되고 교감 선생마저 사건을 덮고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지점에서 시를 쓰고 싶은 양미자가 사건 한복판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관객에게 묻습니다.
당신 가슴속에 있던 그 아름다웠던 순간은 지금도 살아 있느냐고...

성폭행을 당해 싸늘한 주검이 된 한 소녀, 그녀의 세례명 아네스.
아네스는 무셰뜨처럼 돌팔매질 당하고 쓰러져 자살했습니다.
자살하기 전 다리 위에서 몸을 돌려 카메라를 쓰윽 쳐다봅니다.
마치 관객에게 이렇게 물어볼 것만 같습니다.
"담배 있나?"

마지막 시를 쓰고 떠난 양미자는 이제 아네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 것일까요?
알 수 없습니다. 양미자는 그저 시 속으로 사라졌을 뿐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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