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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일주일 만에 2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아가씨>. 역대 ‘19금’ 영화 중 흥행속도가 가장 빨라 이 추세라면 박찬욱 영화 최고기록인 <공동경비구역 JSA>의 583만 명을 깰 수도 있다. 논란 분분한 소재여서 과연 흥행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지만 오히려 논란이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아가씨>의 흥행 비결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1. 여성 동성애 영화에 대한 호기심
동성애 소재 영화를 뜻하는 ‘퀴어 영화’가 본격적인 장르로 자리잡은 것은 1980년대 후반 이후다. 토드 헤인즈, 그렉 아라키 등 게이 인디 감독들이 이 장르를 선도했고, <크라잉 게임> <필라델피아> 등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에서도 동성애가 틈틈이 등장했다.
한국에서 퀴어영화는 1990년대 들어 ‘금기’를 깬 작품으로 센세이셔널하게 소개되기 시작했다. <파리넬리>의 성기 장면이나 <결혼 피로연>의 엔딩은 놀라운 반전으로 두고두고 회자됐다. 그러나 이후 <해피 투게더> <브로크백 마운틴> 등 작품성 뛰어난 퀴어영화들이 소개되며 거부감이 줄었고, 한국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쌍화점> <후회하지 않아> 등이 만들어지며 친숙함을 더해갔다. TV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는 아예 안방을 무지개빛으로 물들이며 결정적 한 방을 날렸다.
이 같은 변화는 우리 사회 전반으로 번져 이제 동성애는 흔히 접할 수 있는 용어가 됐다. 김조광수 감독과 김승환 대표 커플의 공개 결혼식이 찬반 속에 큰 화제가 됐고, 최초의 커밍아웃 연예인 홍석천은 대중의 거부감을 극복하고 잘 나가는 사업가 겸 만능 엔터테이너로 맹활약 중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작품들은 모두 남성 동성애를 다뤘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성 동성애는 아직까지 한국에선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창피해’ 등의 레즈비언 영화가 한국에서 만들어졌지만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변화는 웰메이드 레즈비언 영화로부터 시작됐다. 2014년 소소하게 입소문을 타고 5만 명의 관객을 끌어모은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 이어 올해 영화 <캐롤>의 31만 관객 동원은 이 장르가 한국에서도 개척 가능하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이 흐름은 <아가씨>의 흥행으로 이어졌다. <아가씨>는 현재까지 한국에서 개봉한 레즈비언 퀴어 영화들 중 가장 높은 흥행 스코어를 기록하고 있는 영화다.
2. '여혐'시대 여성들의 공감
평생 집안에 틀어박혀 살던 히데코(김민희)에게 어느날 운명처럼 한 소녀가 찾아온다. 갑갑한 그녀의 인생을 망치러 온 소녀의 이름은 숙희(김태리). 남성중심 가정에서 살아온 히데코와 달리 숙희는 사기꾼 엄마를 비롯해 여자만 있는 집에서 살아왔다. 둘다 정상적인 가정환경은 아니어서 외로움에 공감한다. 상대방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던 두 소녀는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되자 죄책감을 내려놓고 운명처럼 이끌린다.
<아가씨> 티켓을 구입한 관객 중엔 여성이 많았다. 개봉 둘째주인 이번주 맥스무비에서 예매한 관객을 살펴보면 여성 57%, 남성 43%로 여성 관객 비중이 더 높았다. (세대별로는 20대 24%, 30대 33%, 40대 이상 43%로 다른 영화와 큰 차이가 없었다.)
여성이 <아가씨>에 열광하는 이유는 영화 속 두 여성 주인공에게 공감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히데코와 숙희는 치정극의 주인공처럼 등장하지만 러닝타임이 지날수록 각각 결핍과 상처를 가진 인물임이 드러난다. 두 여성은 연대를 통해 그들을 괴롭히는 두 남자를 벗어난다. 이러한 스토리는 최근 잇따르는 '여성혐오' 범죄로 인해 위축된 여성들을 무의식적으로 위로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소셜미디어에선 이 영화를 혼자 두세 번 봤다는 여성들의 글을 꽤 볼 수 있었다.
두 여성이 서로의 몸을 탐하는 장면이 섬세하게 연출된 것도 이 영화가 여성들에게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진 이유다. 베드신에서도 거칠게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슬며시 감정선을 따라간다.
<아가씨>에서 가장 야릇한(?) 장면 중 하나는 적나라한 가위 자세의 정사신보다 숙희가 히데코의 이빨을 골무로 갈아주는 장면이다. 목욕물이 찰랑거리고 꽃잎이 떠다니는데 히데코는 골무가 사각거리는 소리에 긴장해 땀을 흘린다. 공감각적인 요소가 모두 들어간 이 장면을 비롯해 영화는 리얼리티보다 판타지에 가깝게 여성 동성애를 묘사하고 있다.
독일의 한 영화평론가는 이 영화 속 레즈비언 섹스 장면을 “사춘기 소년이 레즈비언 섹스에 가진 전형적인 판타지에 걸맞는 섹스신”이라고 폄훼했지만 오히려 그러한 순수함으로 인해 여성 동성애 장면이 한국 관객들에게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3. 감독 브랜드에 대한 믿음
<아가씨>는 박찬욱의, 박찬욱에 의한 영화다. 이 영화를 소개한 기사에서 신데렐라 김태리를 비롯한 주연 배우들이나 칸 영화제에서 벌칸상을 받은 류성희 미술감독보다 박찬욱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볼 수 있는데 주연 배우보다 감독이 더 많이 회자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아가씨>가 신인감독 영화였다면 아마도 이렇게까지 조명받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박찬욱이라는 이름값과 칸 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이라는 성과가 초반 흥행몰이에 도움이 된 측면이 분명히 있다. 이는 최근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뒤 출간 10여년 만에 베스트셀러에 오른 한강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를 떠올리게 한다. 서양에서의 호평과 그로 인해 생성된 네임밸류가 국내 흥행에 영향을 미친 과정이 닮았다. 이런 현상은 비단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최근들어 더 두드러지는데 필자는 그 이유를 최근 한국영화의 부진과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같은 이유로 [채식주의자]는 한국문학의 침체와 관련 있을 것이다.)
올해 상반기 한국영화의 만듦새와 흥행 성적은 전반적으로 미덥지 못했다. <검사외전> 외 눈에띄는 흥행작이 없었는데 그나마 <검사외전>은 짜깁기 표절 시비에 시달렸다. 이러한 한국영화 가뭄에 단비를 내린 작품은 이름있는 감독들의 신작이었다. 조성희 감독의 <탐정 홍길동>이 체면치레를 했고, 나홍진 감독의 <곡성>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감독 브랜드 영화에 대한 기대치가 올라갔다. 이런 흐름 속에 <아가씨>는 박찬욱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대중의 믿음으로 초반 예매율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다.
최근 영진위가 20대 관객을 대상으로 ‘믿고 보는 감독’이 있는지 조사한 적 있다. 이 질문에 가장 많은 응답을 받은 감독은 봉준호와 박찬욱이었다. 이는 그만큼 박찬욱이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영화감독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다는 뜻이다.
봉준호가 보편적인 감수성에 호소하는 영화를 만드는데 반해 박찬욱은 대중성과 예술성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취향 분명한 작품을 만든다. 어떤 때는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어떤 때는 그렇지 못한데,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들의 공통점은 한줄로 요약 가능한 뚜렷한 줄거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흥행 성공한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에 비하면 흥행 실패한 <박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스토커> 등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모호했고, 이는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이에 반해 <아가씨>는 명쾌하게 이야기를 전개해 관객이 찜찜하지 않게 극장을 떠나도록 돕는다. 물론 스토리가 명확하다는 것이 흥행으로 직결되는 필요조건은 결코 아니지만 박찬욱의 경우엔 그에 대해 갖고 있던 ‘영화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선입견을 덜어내는 데 성공한 측면이 있다.
결국 지금 <아가씨>의 흥행 돌풍은 대중에게 더 다가가려는 박찬욱의 친절함과 감독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 두 날개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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