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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다 마모루의 <괴물의 아이> vs 디즈니의 <주토피아>


두 편의 애니메이션은 공교롭게도 동물들이 인간처럼 사는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1년 사이에 비슷한 아이디어의 애니메이션이 동서양에서 동시에 등장한 것도 참 이례적인데요. 그러나 두 편의 영화가 그리는 동물세상은 동서양의 간극만큼 차이가 큽니다. 이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괴물의 아이>(왼쪽)와 <주토피아>


1. 존경받는 수장의 쥬텐카이 vs 의심받는 시장의 주토피아


두 영화 모두 다양한 동물들이 한데 모여 살면서 두 발로 걸어다니고, 말을 하고, 문명을 일구며 살아갑니다. <괴물의 아이>에서는 그곳을 '쥬텐카이'라고 부르고, <주토피아>에서는 '주토피아'라고 합니다.


쥬텐카이의 지도자는 토끼 수장입니다. 몇백 살은 먹었을 것 같은 그는 노련하게 쥬텐카이를 다스립니다. 동물들은 수장을 존경하며 그의 말에 따릅니다. 수장이 칼집에서 칼을 꺼내지 말라고 하면 그것은 율법처럼 지켜집니다.



수장은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신출귀몰하는 능력을 가진 그는 자기 할 말만 하고 곧바로 자리를 뜹니다. 그의 행동은 현명한 자는 잘못을 저지를 리 없다고 했던 고대 중국 격언을 떠오르게 합니다.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을 정도로 도를 터득했으니 수장은 곧 신이 될 존재입니다. 그래서 존경도 받는 것이지요. <괴물의 아이> 속에서 수장은 7년 동안 어떤 신이 될지 고민합니다. 그 고민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홀로 수행하듯 합니다.


수장은 따르는 수하 없이 독고다이로 살고 있는 쿠마테츠에게 진정한 강함을 깨닫기 위해 다른 신들을 찾아가보라고 말합니다. 쿠마테츠와 큐타는 먼 길을 떠나지만 제대로 된 답을 얻지 못합니다. 동양 윤리에 따르면 강한 자는 스스로 강함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니까요. 역으로 보면 쉽게 흥분하고 단정짓는 쿠마테츠는 가장 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의 저돌적인 행동을 다독여줄 스승이 필요합니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큐타죠.


<괴물의 아이>의 수장


쥬텐카이에서는 단지 힘만 세다고 수장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존경심을 얻어야 수장이 될 수 있습니다. 영화는 쿠마테츠가 큐타를 제자로 받아들인 뒤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얻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수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쪽이 스승인지 모르겠군. 더 많이 성장한 건 쿠마테츠 쪽이라네."


존경을 얻는 자가 리더가 되는 것이 동양적인 쥬텐카이의 방식이라면 서양식 주토피아는 능력 위주의 사회입니다.


주토피아의 시장 라이언 하트는 동물들의 선거에 의해 시장에 당선된 사자입니다. 더 많은 표를 얻은 자가 시장이 되는 주토피아는 수장이 정한 후보가 싸워서 이기면 수장직을 물려받는 쥬텐카이와 전혀 다릅니다. 주토피아는 더 민주적인 사회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 이면까지 들추고 있습니다. 라이언 하트는 표를 얻기 위해 주판알을 튕깁니다. 러닝메이트 부시장 자리에 양인 벨 웨더를 앉힌 것도 작은 동물들의 표심을 의식해서입니다.


<주토피아>의 라이언 하트 시장


라이언 하트와 벨 웨더는 모두 나쁜 음모를 꾸미다가 용감한 토끼 주디 홉스에게 발각되어 검찰 조사를 받습니다. 이는 부패한 권력을 견제해 언제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민주주의 삼권분립이 주토피아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쥬텐카이와 주토피아는 사실상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력체제를 단순화한 두 사례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쥬텐카이와 주토피아 유형으로 구분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북한마저도 쥬텐카이의 나쁜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장이 된 자가 죽어서 신처럼 추앙받는 것도 비슷하죠. 남한은 주토피아를 지향하는 쥬텐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도는 주토피아지만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자꾸만 쥬텐카이 수장처럼 군림하려고 하니까요.




2. 아버지를 물려받아 아들이 된다 vs 누구나 뭐든 된다


<괴물의 아이>라는 제목에서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감독의 전작 <늑대아이>입니다. <늑대아이>가 특별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 이야기였다면 <괴물의 아이>는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 혹은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아들 이야기입니다. 아홉살난 큐타(혹은 렌)는 쥬텐카이에서 쿠마테츠의 제자가 되고, 그동안 한 번도 자식을 길러본 적 없던 쿠마테츠는 초보 아빠의 마음으로 큐타를 가르칩니다.


<괴물의 아이>에는 두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어릴 적 렌을 떠난 생물학적 아버지와 큐타와 함께 성장한 동물 아버지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일본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텐데요. 낳은 아버지와 기른 아버지를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두 영화가 참 닮았습니다. '어쩌다 어른'이 된 성인 남성이 자신을 따라하는 아이와 동화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한참 후에 렌이 다시 만난 생물학적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는 울림이 큽니다.


"그 시간들, 그리 간단히 메워지지 않아요."

"맞아. 어른과 아이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니까."


<괴물의 아이>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공통적인 메시지는, 아이와 친해지려면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애니메이션 <주토피아>가 그리는 가정은 이와 다릅니다.


<괴물의 아이>의 쿠마테츠와 큐타


<주토피아>에는 부모와 딸이 등장합니다. 홉스의 부모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진 선량한 토끼 커플입니다. 트러블이 될 일은 만들지 않고 당근 농사 지으면서 행복하게 오래 사는 게 꿈인 분들이죠. 그러나 홉스는 다릅니다. 그녀는 "누구나 뭐든 될 수 있어. 누구도 내 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못해"라고 말하면서 도시로 가서 경찰이 되겠다고 선언합니다. 부모와의 작은 갈등이 있지만 홉스는 이에 아랑곳 않고 마이웨이합니다.


두 영화가 그리고 있는 부모와 자식 관계에는 동서양의 차이가 극명하게 반영돼 있습니다. <괴물의 아이>에서 쿠마테츠는 끝내 수장이 될 수 있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큐타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하나가 됩니다. 자신의 영달 대신 자식에 '올인'하는 이런 태도는 다분히 동양적인 자식관입니다. 엔딩에서 감동적으로 그려지고 있듯이 쿠마테츠와 하나 된 큐타는 이제 완벽해져서 더 이상 어둠에 지배받지 않을 것이고 외로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주토피아>의 홉스 부모


반면 <주토피아>에서 홉스는 부모를 떠납니다. 부모는 처음엔 딸을 말리다가도 결국엔 딸이 그들의 방식대로 살기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딸의 마음 속에 들어가는 일도 하지 않지요. 단지 그들만의 농장에서 여생을 즐길 뿐입니다. 나중엔 딸을 이해하며 그동안 멀리하던 여우와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괴물의 아이>의 아들은 아버지를 가슴에 받아들여 일체를 이루었지만, <주토피아>의 딸은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도전해 독립했습니다. 이는 가업을 물려받고 부모와 자식의 일에 연대 책임을 져온 동양 역사와 부모 세대를 부정하고 나만의 세상을 만들겠다며 도전한 사람들이 환영받아온 서양 역사의 차이처럼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모비딕을 잡으려다 마음 속의 어둠을 잡은 큐타


마천루가 솟아오른 주토피아


3. 인간과 분리된 쥬텐카이 vs 야수와 분리된 주토피아


쥬텐카이는 인간과 분리된 세상입니다. 어쩌면 평행우주처럼도 보이는데요. 도쿄 시부야의 한 골목을 통해 두 세계를 왕래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주토피아는 야수와 분리된 세상입니다. 문명을 이루며 살아가는 동물들은 그들의 야수성이 수십만 년 전 사라졌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기엔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주토피아 자체를 인간 사회의 우화로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굳이 인간을 등장시켜 동물을 타자화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주토피아>의 세계관은 인간의 그것과 유사합니다. 문명을 건설한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라고 믿는 서양 철학의 기반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 이성이 아닌 본성에 의한 범죄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처럼, 주토피아의 동물들 역시 특정 약물에 의해 야수화되어 서로를 먹이화하는 살육전을 벌입니다. 이때 위기를 돌파하는 힘은 신뢰입니다. 홉스는 여우 친구와의 관계회복을 통해 범인을 알아내고 결국 주토피아는 평화를 되찾습니다.


<주토피아>에서 크기는 다르지만 함께 살아가는 동물들


주토피아에는 다른 기후에서 자라온 동물들을 배려해 여섯 개의 구역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동물들을 위한 구역, 추운 곳에 사는 동물들을 위한 구역, 더운 곳에서 사는 동물들을 위한 정글 등 거주 환경이 제각각 다릅니다. 마치 차이나타운, 코리아타운이 한데 섞여 있는 다문화 도시를 닮았습니다. "서로를 이해하려고 할수록 서로의 차이를 더 포용하게 될 거예요"라는 극중 대사처럼 <주토피아>의 메시지는 포용입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쥬텐카이는 분리되어 있습니다. 동물과 인간은 따로 살아갑니다. 동물들은 서로 종류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한 종류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키도 비슷하고 생김새도 비슷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현실에서라면 싸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곰과 멧돼지가 막상막하 힘겨루기를 하고, 개와 돼지의 키가 엇비슷해 무슨 종인지 알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이렇게 그린 이유는 영화 속 동물들이 단지 인간과 대비되는 동물이라는 하나의 기능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쥬텐카이로 가는 통로가 있는 시부야


비슷한 동물들이 살고 있는 쥬텐카이에 인간이 나타나자 동물들은 불신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어둠을 품고 있어서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오젠이 키워온 인간 아이 때문에 쥬텐카이에는 대형 사고가 터집니다.


영화는 엔딩에 이르러 동물과 인간의 통합을 강조하고 있긴 하지만 전면적으로 벽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두 명의 인간이 쥬텐카이로 들어오는 것에 그칩니다. 마지막 장면이 약간 뜬금없어 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입니다.


<주토피아>의 주토피아가 서로 다른 종류의 동물들이 각각 개성에 맞게 살도록 놔두면서 포용적인 정책을 폈다면, <괴물의 아이>의 쥬텐카이는 서로 다른 종류의 동물들이 비슷한 외모에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한 곳에 모여 어울려 사는 것 같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그들이 사는 세상은 동서양의 차이만큼 너무 다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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