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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을 가장하는 것보다 더 사람을 기만하는 건 없죠. 그건 자기 견해가 없거나, 은근히 자만심을 드러내는 것일 때가 많아요.”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민음사, 65쪽)
아주 이상한 영화 한 편이 도착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영국 고전소설의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가는데 중간중간 좀비가 등장한다. 자매들은 귀족 청년들의 청혼을 기다리다가 좀비를 만나면 마치 걸그룹처럼 대형에 맞춰 서로를 보호하면서 좀비의 머리통을 날려버린다. 애초 오만에 대한 편견을 경계했던 오스틴의 원작을 단순화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겸손을 모른다. 좀비가 잉글랜드를 지배하는 가상의 19세기, 청정지역에 살고 있는 이들은 오로지 생존을 위해 자신이 좀비가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이 기발한 영화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라는 작가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는 제인 오스틴의 1813년작 [오만과 편견]의 수동적인 여성형을 비틀어 여전사로 탈바꿈시킨 판타지 픽션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를 2009년에 발표해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도약한 남자다. 아주 독특한 콘텐츠를 만든 스미스와 그의 소설을 각색해 만든 이 영화를 명과 암, 두 가지 포인트로 살펴보자.
1. 이질적인 것을 결합해 새로움을 만들다
코믹스와 B급 영화 ‘덕후’인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는 마블의 [스파이더맨]을 파헤치는 책으로 작가 경력을 시작했다. [공포영화 서바이벌 핸드북]으로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추천을 받으며 이름을 알린 그는 출판사 편집자의 제안으로 작가 사후 70년이 지나 저작권이 소멸된 고전 소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저작권이 없기에 마음대로 변형해도 괜찮았고 초기 낮은 인지도를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책이 나오기 전인 2000년대 중후반 미국 픽션 시장의 트렌드는 좀비였다. [월드워Z]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 [몬스터 아일랜드] 등 ‘좀비 픽션’이 마니아 장르를 넘어 대중적인 콘텐츠로 부활했다. 이에 스미스는 좀비와 가장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고전 소설 [오만과 편견]에 좀비 요소를 입혀 새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수백만 권이 팔린 이 영화의 원작소설이다.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
이후 유명한 고전을 전혀 엉뚱한 요소와 결합시키는 방식은 그의 장기가 됐다. 그는 2010년엔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인 링컨의 개인사를 탐구해 그의 비밀일기를 바탕으로 그가 사실 대통령이면서 동시에 뱀파이어 사냥꾼이었다는 가정 하에 [뱀파이어 헌터, 에이브러험 링컨]을 썼다. 이 소설 역시 큰 인기를 얻었고, 팀 버튼의 눈에 띄어 2012년 <링컨: 뱀파이어 헌터>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의 재능은 소재 고갈로 대안을 찾던 할리우드에 단비였다. 과거에 인기를 끌었지만 이제 한물 간 작품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면 손쉽게 또하나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먼저 연락한 곳은 그가 동경하던 마블이었다. 그는 슈퍼히어로를 좀비로 그린 만화 [Marvel Zombies Return] 스토리 작가로 활동했다. 이후 영화 <다크 섀도우>, <판타스틱 4>의 각본을 썼고, 지금은 영화 <비틀 쥬스>, <그렘린> 등 80년대 영화의 리부트 작업을 하고 있다. 또 잭 클레이튼 감독의 1983년작 <이상한 실종(Something Wicked This Way Comes)>을 리메이크하며 직접 감독 데뷔까지 준비하고 있다.
스토리의 홍수 속에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들어내기 어려워지는 시대, 이질적인 것들을 기발하게 결합하는 전략으로 전혀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스미스는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영화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는 소설과 달리 원작의 역량에 미치지 못한 범작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2. 비주얼 속에서 이야기의 길을 잃다
2009년 소설 속 강한 여성상에 매혹된 배우 나탈리 포트먼이 영화 판권을 구입했다. 그러나 영화는 7년이 지나서야 공개됐다. 그동안 감독과 주연 배우가 여러 번 교체되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애초 내정된 감독 데이비드 O 러셀이 빠지고 <디스 민즈 워>, <세인트 클라우드>의 버 스티어스 감독이 투입됐고, 나탈리 포트먼을 비롯해 많은 여배우들이 하차하거나 거절한 뒤 결국 <신데렐라>의 릴리 제임스가 엘리자베스 역, <스윗 프랑세즈>의 샘 라일리가 다아시 역으로 확정됐다.
영화는 장점과 단점이 뚜렷하다. 장점은 강렬한 여성 캐릭터다. 오스틴 소설에서 수동적으로 돈 많은 귀족 청년들의 청혼을 기다리던 자매들은 스미스 소설과 영화에선 중국에서 쿵푸를 배워와 총과 칼을 들고 좀비에 맞서 싸운다. "전 위협을 느낄수록 용감해지거든요"라고 말하며 엘리자베스는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발차기를 날린다. 배우 출신인 스티어스 감독은 여주인공의 액션을 최대한 아름답게 살린다.
그러나 전사로 변한 소녀들과 좀비가 보여주는 낯설고 화려한 비주얼에 가려 정작 스토리는 갈팡질팡한다. 무엇보다 좀비가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한다. 영국이 좀비로 들끓고 있는 와중에 소녀들은 한가롭게 돈 많은 귀족 청년과 ‘밀당’을 벌이는데 오스틴 소설의 애초 스토리를 고스란히 따라가기 급급해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 ‘왜’라는 질문을 놓치고 있다. 좀비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도대체 왜 결혼이 중요한지, 왜 베넷 부인은 생존보다 상류계급과의 결혼에 목매달고 있는지 등이 설명되지 않는다.
이는 영화 <링컨: 뱀파이어 헌터>가 했던 실수를 똑같이 되풀이한 것이다. 워낙 거리감이 느껴지는 두 소재를 합쳐놓았기 때문에 원작자가 아니면 그 의도를 알기 힘들고 그래서 영화 역시 강렬한 이미지에만 치중하며 겉돈다. 비주얼은 화려하지만 링컨이 왜 뱀파이어를 잡으러 다니는지, 또 엘리자베스가 좀비들과 싸우다 말고 왜 다아시의 청혼을 기다리는지 설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과 달리 두 편의 영화가 모두 미국 내에서 흥행에 실패한 이유 역시 이런 까닭일 것이다.
결국 독특한 아이디어로 대성공을 거둔 콘텐츠를 다른 장르로 옮기는 과정은 더 신중해야 한다. 소설이 처음 발표될 때와 달리 관객들은 이미 그 아이디어를 알고 있다. 단지 그 아이디어를 스크린에 툭 던져놓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 관객들은 '오만과 편견'에 '좀비'를 어떻게 결합했을지 그 화학작용을 보고 싶어 극장을 찾을 것이다. 이를 정교하게 설득해내지 못한 영화는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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